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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1. 2020

2020-02-29

1. 세자르 시상식에서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상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세자르에서 열 번째 트로피를 거머쥐게 되었다. 지난 해 크리토프 뤼지아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하며 프랑스 영화계의 #Me_Too 운동을 재점화시킨 아델 에넬은 감독상 수상자로 폴란스키가 호명되자마자 시상식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 즈음부터 파리 시내에서 폴란스키의 감독상 수상에 반발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상식이 열리기 며칠 전, 폴란스키의 <장교와 스파이>가 12개 부문 최다후보에 오르며 한 차례 논란이 있었고 세자르 위원회 전원이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폴란스키는 수상을 해선 안 됐다. 사실 그가 감옥에 가는 대신 아직도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고, 누군가 그의 영화에 투자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사실 끔찍한 것은 영화사의 거의 모든 남성 거장 감독들, 더 나아가 미술, 문학, 음악계의 거의 모든 거장이 폴란스키 혹은 하비 와인스틴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얼마 전엔 엘리야 카잔에 대한 폭로가 있었고,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존 휴스턴, 니콜라스 레이, 스탠리 큐브릭 같은 할리우드의 거장들은 물론, 임권택과 같은 한국의 거장들 또한 여성 배우를 (촬영 과정에서든 그 밖에서든) 성적으로 착취했음이 드러났다. 어디든 안 그러겠는가? 미술사, 문학사, 음악사 등 예술 장르의 대부분은 남성 거장들이 저지른 성착취를 무시해왔다. 물론 그것은 예술의 역사 서술이 남성의 시각으로 쓰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예술인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의 전통 아닌 전통을 고스란히 가져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하는가? 남성 거장들의 성착취로 점철된 예술사를 폐기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에 가깝다. 히치콕 없이 서스펜스를 논할 수 없고, 임권택 없이 한국영화사를 논할 수 없다. 이건 피카소 없이 큐비즘을 논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것들은 이미 폐기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들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 작품들은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고정되어 있다. 


2. 다만 영화는 미술, 음악, 문학과는 살짝 사정이 다르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감독-작가 혼자만의 예술이 (물론 그런 작품도 더러 존재하지만) 아니다. 2018년 영상자료원에서 '흥해랏, 그녀들! - 배우 이민지, 이상희, 이주영' 기획전을 진행할 당시, 성추행 폭로가 이미 터져나온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을 상영작에서 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SNS에서 터져나왔다. 결국 상영은 이루어졌다. 영자원은 "저희는 영화가 감독 개인의 것이 아니라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 모두의 것이라는 측면을 고려했습니다. 감독 개인의 잘못으로 인해 배우의 훌륭한 연기조차 만날 기회가 전혀 없다면 그것 역시 배우에게는 커다란 피해이자 관객에게는 큰 손실이라고 생각해 깊은 고민 끝에 상영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흥미로운건, <꿈의 제인>과 유사한 위치에 놓인 이상희 배우의 주연작 <연애담>은 애초에 상영 리스트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 상황은 <연애담>의 이현주 감독이 유사한 시기에 고발된 수많은 남성 감독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감독협회에서 퇴출됐다는 사실과 겹쳐보인다. 게다가 이현주 감독 이후 유사한 사례는 없다. 같은 상황에서도 남성 감독에 비해 여성 감독은 더욱 빠르고 강력한 처벌을 받으며, 그 여파 또한 다른 양상을 띤다. 이 과정의 희생양은 어쨌든 해당 영화를 상영할 기회를 잃은/잃을 수 있는 배우이다.


3. 작가-작품은 동일한가? 사실 이 논란은 이 문제로 귀결되는 양상을 띤다. 이것은 당연히 답을 내릴 수 없다. 작가와 작품은 동일하진 않다. 하지만 유사하다. 범죄를 저지른 작가의 작품이 곧바로 범죄와 직결되진 않지만, 미세한 유사성과 연결점으로 인해 관객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영상매체에 한정하여, 작품에 출연한 배우가 범죄자라면 그의 모습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즉각적으로 불쾌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그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유일하게, 가장 윤리적인 방법인가? 나는 케이시 애플렉의 성범죄 폭로가 이루어진 뒤에도 그가 출연한 <고스트 스토리>와 <노인과 총>을 관람했다. 관람 전까지 고민했지만, 두 영화의 감독인 데이빗 로워리와 영화에 함께 출연한 루니 마라, 로버트 레드포드, 씨씨 스페이식 등을 케이시 애플렉 때문에 놓쳐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전자의 고민을 앞질렀다. "작가의 범죄 앞에서 작품에 대한 소비와 비평은 중단되어야 하는가?"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나는 김성욱 프로그래머에 대한 폭로 이후 서울아트시네마를 가지 않고 있으며, 임권택이 연출한 작품의 블루레이를 구매했으며, 케빈 스페이시의 성범죄 폭로 이후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볼 계획을 접었고, 오프 더 레코드로 주워들은 여러 한국 독립영화 감독들의 뒷풀이 행태를 알고 있음에도 그들의 신작이 개봉하길 기다린다. 모든 것 거부하고 폐기할수도, 그 반대항으로 모든 것을 수용할 수도 없다. 나는 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갈 뿐일지도 모른다. 은은한 죄책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말이다.


4. 우리는 D.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과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를 탐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한다. 물론 이 두 작품은 작품 내적으로 인종주의와 나치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문제가 되는 감독, 배우들의 작품과는 다른 지점을 갖는다. 하지만 해당 작품들을 대하는 태도는, 미적지근하고 중립적일 뿐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해답을 줄 수 있다. 과거를 무작정 폐기하는 대신 제작, 소비, 검열, 비평, 비판, 성취 등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이들로 인해 드러나지 못한 다른 창작자들을 현재로 끌어 올리는 작업을 동시에 할 수는 없는가? 이것은 끝없는 헤게모니 싸움을 제시하는 것과 같지만, 동시에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접근법일 수도 있다. 결론은... 나는 아직 비겁하게 양측을 오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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