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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5. 2020

2020-03-05

0. 코로나19 때문에 극장 개봉작도 없고 영자원도 휴관 중이라 집에서 쌓아둔 블루레이와 넷플릭스/왓챠플레이 리스트를 처리하는 중. 최근 본 영화 몇 편에 대한 간단한 메모를 남기려 한다.


1. 이소룡 <정무문> <맹룡과강> <사망유희>

 <정무문>의 유명한 프리즈 프레임 엔딩은 최근 읽고 있는 로라 멀비의 [1초에 24번의 죽음] 속 한 단락을 떠올리게 한다. 멀비는 프리즈 프레임 엔딩이 "'정지는 죽음과 같다'는 은유를 파괴해버린다"는 가렛 스튜어트의 말을 인용하며, 이러한 정지가 필름스트립 그 자체의 정지를 감춘다는 점을 논의한다. 사진처럼 정지된 프리즈 프레임 이미지는 그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흐르고 있는 필름스트립의 존재를 감추며, 멀비는 이를 "일반적으로 운동과 연결된 영화와 스토리텔링의 유사성은 이와 같은 순간에서 또 다른 미학적 물질화 과정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정지된 이미지는 사진의 정지성을 회상하도록 하는 반면, 사진의 미학은 영화의 물질적인 성격을 교란시킨다." 멀비는 프레즈 프레임 엔딩이 서사에서의 죽음 충동을 재현하는 은유의 장소로서, 그리고 영화의 물질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연속되는 개별 프레임이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한 열망을 재현하는 것으로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정무문>의 엔딩은 죽음충동의 서사와 연관된다. 사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 홍구도장을 찾아간 진진(이소룡)은 그곳의 일본인들을 쓰러트린다. 사부를 독살한 일본인의 행위로 촉발된 갈등은 홍구도장을 찾아간 진진의 운동에 의해 가시화되고, 정무문과 홍구도장 사이의 갈등으로 번진다. 노골적으로 반일감정을 내세운 이 영화는 서로의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격투 끝에 맞이한 정당한 결투의 클라이맥스 이후, 진진을 체포하기 위해 총을 들고 도장 앞으로 찾아온 경찰들을 향해 뛰어오르는 진진의 모습을 정지시킨다. 하늘로 날아오른 진진은 정지했으나, 이소룡 특유의 기합소리, 총성, 그리고 진진의 분노와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며 감정을 고취시키는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영화 매체에서 소리는 영상에 복무하는 도구가 아니다"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을 떠올려보면, <정무문>의 프리즈 프레임 엔딩에서 흐르는 사운드는 그 자체로 서사적 도구임과 동시에 필름스트립의 흐름을 은은하게 폭로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필름으로 상영되는 발성영화는 필름에 사운드트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노가 극에 달해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진진의 죽음충동과 연관된 것이자, 정지된 이미지와 함께 흘러나오는 사운드가 진진의 분노를 영화 내부의 남은 정무문의 사람들 혹은 관람자인 홍콩~중국인에게로 넘겨주는 영화 이후의 서사와도 연관된다. 

 <맹룡과강>은 크게 특출난 영화는 아니다. 이소룡이 직접 연출한 두 편의 영화 중 하나인 <맹룡과강>은 로마를 배경으로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몰아내려는 이탈리아 깡패를 홍콩에서 날아온 당룡(이소룡)이 저지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소룡의 연출 스타일은 그와 <정무문>, <당산대형> 등을 함께한 감독 나유의 것을 닮았으며, 액션 시퀀스의 편집은 역시 나유와 몇 편의 영화를 함께한 성룡의 연출작에서도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다. 재밌는 것은 척 노리스가 연기한 콜트와 당룡이 콜로세움에서 결투를 벌이는 영화의 후반부이다. 난데없이 등장한 아기 고양이가 액션 시퀀스 사이 사이에 인서트로 등장한다. 갑자기 나타난 아기 고양이는 무엇인가? 결투를 시작하기 전 몸을 푸는 당룡과 콜트의 모습 사이에 기지개를 펴는 고양이의 모습이 나타나고, 두 사람이 결투를 시작하면 고양이는 마치 이종격투기 시합을 관전하는 관객처럼 고개를 좌우로 옮기며 두 사람을 바라본다. 당룡과 콜트가 펼치는 결투의 유일한 목격자는 그 고양이 뿐이다. 어째서 고양이인가? 영화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수많은 이들이 애묘인이며, 이소룡 또한 그렇기 때문인가? 이소룡은 영화 속 무술 동작을 고양이의 모습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영화 내내 '중국 무술'에 정통한 캐릭터인 당룡의 수호신 같은 존재인가? 그렇다기엔 당룡이 수행하는 '중국' 무술과 고양이의 상관관계는 적다. 갑작스러운 고양이의 등장은 이소룡이라는 존재감(그리고 척 노리스가 패배하는 두 작품 중 하나라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크게 흥미로운 구석이 없는 <맹룡과강>의 가장 즐거운 부분이다.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는 그의 짧은 커리어를 총집합한다. 홍콩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이소룡답게, 극의 주인공인 빌리 또한 두 국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액션 스타이다. 영화의 시작은 <맹룡과강> 속 당룡과 콜트의 결투를 촬영하는 장면이며, 영화 초반에 <정무문>의 프리즈 프레임 엔딩을 촬영하는 도중 빌리를 살해하려던 깡패가 몰래 영화 촬영용 총에 실탄을 넣어 빌리를 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소룡이 출연 분량은 40여분 밖에 되지 않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영화의 서사로 출연시키는 작품이기에 그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물론 김정태와 원표가 죽은 이소룡을 대신해 촬영한 여러 액션 시퀀스(락커룸에서 빌리와 척 노리스의 격투 등)가 등장하고, 이소룡과 얼굴이 다른 대역 배우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빌리가 사망한 것으로 꾸며진다는 것과 할리우드 연예계를 다룬다는 이야기는 이소룡이 쓴 본래 각본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망유희>의 핵심은 이소룡의 필모그래피를 사후(事後/死後)적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이소룡의 실제 장례식 장면을 극 중 빌리의 장례식으로 삽입하는 대책없는 자본주의적 결과물인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출연한 각 영화의 영화-이후, 그리고 각종 짜깁기 영화와 어설픈 대체품의 양산이라는 이소룡-이후의 상황을 모두 내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2. 로버트 에거스 <더 라이트하우스>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부터 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더 라이트하우스>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참조하고, 크툴루 신화와 성긴 BL서사를 엮은 애매한 결과물. 영화의 배경인 1890년대라는 배경에 맞추기 위해, 로버트 에거스는 프리츠 랑이나 G.W. 파브스트 등이 사용한 1.19:1 화면비와 35mm 흑백 필름을 사용하고, 빈티지 렌즈를 활용하였으며, 고전적인 느낌을 위해 Double-X 5222 필름과 함께 아주 밝은 조명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시상식에서 촬영상 후보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작인 <더 위치>에 비해 밀도가 떨어진다. 등대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두 주인공의 설전은 다소 따분하고,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크툴루로 이어지는 '바다의 저주'라는 공포를 형상화시키는 방식은 기대보다 무난했다. 밀폐된 극장에서 봤다면 조금 더 흥미로웠을까?


3. 마이클 파웰 <저주받은 카메라>

 [1분에 24초의 죽음]에서 정지 및 죽음충동고 연관해 분석하는 것은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분홍신>이다. 마침 왓챠플레이에 마이클 파웰을 검색해보니 <분홍신>도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자기 직전에 보기엔 다소 길어 함께 올라와 있는 마이클 파웰의 <저주받은 카메라>를 먼저 감상했다. 영화는 영화 촬영장에서 촬영부로 일하는 청년이 일과시간 이후엔 소형 카메라를 품에 숨기고 여성들을 쫒아가 촬영하고, 이들을 살해하면서 이들이 죽는 순간을 사진으로 촬영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멀비는 <분홍신>에서 발레라는 행위의 정지와 죽음충동을 연관시킨다. 물론 그것은 영화 내 운동의 정지이지 필름의 정지는 아니다. <저주받은 카메라>의 오프닝 시퀀스는 정지와 죽음, 그리고 흐르는 필름의 관계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마크의 품 속에 있는 카메라의 시점으로 마크가 노리는 성노동자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는 카메라보단 카메라 뷰파인더의 시점을 택한다. 뷰파인더에 그려진 십자 모양의 수평선과 수직선은 마치 저격소총의 스코프를 통해 대상을 보는 것처럼 여성을 보게 한다. 마크는 그를 따라가고, 그를 살해한다. 그 과정은 마크의 품 속 카메라를 통해 영상으로 담기고, 마크가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사진으로 촬영된다. 삼각대의 한쪽 다리에 숨겨진 칼로 피해자를 살해하는 마크는 칼이 피해자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피해자가 죽음을 느끼는 순간 플래시를 터트린다. 마이클 파웰은 플래시가 터지는 그 순간 영사기에 걸린 필름스트림이 흐르는 것을 보여준다. 마크는 정지-죽음을 담으려 한다. 그것은 과학자인 그의 아버지가 공포를 실험한답시고 어린 시절의 마크를 학대한 결과이다. 마크는 정지-죽음을 담는다. 그것은 필름스트립의 흐름-운동을 통해 영사된다. 영화의 마지막, 마크는 자신이 흠모하던 헬렌에게 자신의 비밀스런 범죄를 들키고, 자신이 피해자들에게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살한다. 하지만 그는 사진 카메라 앞이 아닌 영화 카메라 앞에서 죽는다. 그는 죽어 쓰러지고, 그 장면을 목격한 헬렌 또한 쓰러지지만, 헬렌이 목격한 살해장면이 기록된 필름은 쓰러진 영사기와 함께 계속 움직이며, 마크가 스스로를 찌른 카메라 또한 계속 돌아간다. 집 곳곳에 설치된 도청기가 녹음하는 소리를 기록하는 테이프들 또한 계속해서 돌아간다. 마크는 계속해서 흐르는 필름들 사이에서 정지한다. 마크는 정지-죽음을 내재화함으로써 필름의 흐름-운동에서 벗어난다. 그는 자신의 정지를 보고 싶어하던 아버지라는 유령에서 정지를 통해 벗어나지만, 정지한 그의 주변엔 계속해서 운동하는 필름스트립들이 널려 있다. 영화는 영사기에 걸려 돌아가던 필름스트립이 끝까지 다 감겨 마침내 정지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아마도 그 필름에 기록됐을 어떤 화면을 보여주며 끝난다. <저주받은 카메라>는 마침내 정지하며 마크의 죽음 자체를 내적인 것으로 품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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