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9. 2020

2020-03-09

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개봉 및 흥행 기념으로 CGV 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된 셀린 시아마 특별전을 통해 <워터 릴리즈>, <톰보이>, <걸후드>를 관람했다. 이로써 셀린 시아마의 장편 필모그래피를 모두 관람한 셈이다. <워터 릴리즈>의 소녀 마리는 자신이 좋아하게 된 청소년 싱크로나이즈 선수 플로리안을 찾아간다. <톰보이>는 스스로를 남성이라 여기는 소녀 로르가 새로 이사간 마을에서 자신을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남자 아이로 속이고 동네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걸후드>에선 프랑스 빈민가에 사는 흑인 소녀 마리엠이 우연히 만난 다른 여성 친구들과 살아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화가 마리안느가 초상화에 담아야 할 대상인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진다. 네 편의 영화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제외하면 모두 청소년기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들에겐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레즈비언, 헤테로, 흑인, 중산층, 상류층, 학생, 화가, 운동선수 등 성적지향, 인종, 계급, 직업 등의 정체성이 덧씌워진다. 네 편의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제스처는 남성의 등장이다. <워터 릴리즈>의 후반부 마리와 플로리안은 파티에서 키스를 나눌듯 말듯 춤을 추고 있다. 어느 순간 프로리안은 자신의 뒤에 나타난 남자친구 프랑수아와 춤을 추고, 마리는 정지한다. 이 장면은 <걸후드>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범죄조직을 이끄는 남성 아부 밑에서 일하게 된 마리엠은 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고, 룸메이트인 모니카와 함께 춤을 춘다. 그러던 중 모니카는 춤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고, 마리엠의 뒤엔 아부가 나타나 함께 춤 출 것을 요구한다. 마리엠이 거부하자 아부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톰보이>에서는 조금 다르다. 10살의 아이가 파티에 가진 않기 때문이다. 로르/미카엘은 친구들과 축구를 하던 중 아무렇지 않게 들판에 오줌을 싸는 남자 아이들을 본다. 자신도 소변이 마렵지만 여성의 신체를 지닌 그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밝힐 수 없다. 그는 슬그머니 숲으로 들어가 소변을 본다. 그러던 중 함께 놀던 한 남자아이가 뒤에서 나타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또한 약간의 변형이 일어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집으로 향하는 초반 시퀀스 외에 남성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엘로이즈를 데려가기 위하 한 남성이 마리안느, 엘로이즈, 하녀 소피만이 있는 집에 들어온다. 식당 문을 연 마리안느는 소피가 차린 음식을 먹고 있는 남성을 발견한다. <워터 릴리즈>와 <걸후드>에서는 남성이 프레임 오른편에서 여성 캐릭터의 뒷편으로 접근해오고, <톰보이>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프레임 외부 혹은 벽으로 가려진 공간에 있던 남성이 컷을 통해 프레임 안에 들어오거나 문이 열리며 보여지게 된다. 후자의 연출은 <걸후드>의 초반에서도 발견된다. 미식축구 게임을 즐긴 여성들은 함께 귀가한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수다를 나누던 이들은 프레임 안에 남성이 들어오자 말을 멈춘다. 이는 이들이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까지 지속된다. 또는 마리엠의 폭력적인 오빠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는 마리엠과 그의 여동생들을 조용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출은 <워터 릴리즈>에선 남성-이성의 연애에 대한 반감으로, <톰보이>에서는 성정체성의 문제로, <걸후드>에서는 인종-계급 문제 하에 놓인 여성의 생존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타인에 의한 사랑의 종결로 다뤄진다. 이는 주인공인 여성의 시선을 담은 혹은 시점숏을 담은 네 영화의 마지막 숏과 함께 셀린 시아마의 인장이다. 이는 오랜 기간 유지되지 못하는 여성의 공간, 여성들의 안전과 생존, 외부적 요인으로 분열되는 레즈비언 관계 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그 결과 여성 캐릭터들의 시선으로 끝나는 각 영화의 엔딩은 프레임 밖에서 찾아오는 남성의 침범을 마주하게 된다. 


2. 코로나19 덕분에(?) 멀티플렉스는 다양성을 회복했다. 라고 손쉽게 적고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텐트풀 영화들이 개봉을 연기하며 비교적 작은 영화들이 더 많은 시간표를 확보한 것은 사실이나, (관객수나 단축운영 같은 변수들과는 별개로) 신작이 없기에 진행되는 게으른 라인업의 멀티플렉스별 기획전 밑 재개봉작 라인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CGV의 경우 '인생영화 기획전'이라는 이름으로 <비긴 어게인>, <싱 스트리트>, <캐롤>, <어바웃 타임>을 1주차에, <메멘토>, <살인의 추억>, <조커>, <말할 수 없는 비밀>, <스타 이즈 본>, <포드 V 페라리>를 다시 상영하고 있다. 롯데시네마의 경우 '힐링무비 기획전'이란 이름으로 <리틀 포레스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그린북>, <원더>, <아이 필 프리티>, <레미제라블>, <스타 이즈 본>, <비긴 어게인>, <맘마미아!>, <어거스트 러쉬> 등을 상영하며,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재개봉이 예정되어 있다. 넷플릭스와 제휴를 맺은 메가박스는 '명작 리플레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리시맨>이나 <결혼 이야기> 등 작년 개봉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과 함께 <나이브스 아웃>,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타 이즈 본>, <그녀>, <스포트라이트>, <문라이트>, <겟 아웃>,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겟 아웃>,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을 상영중이다. 각 멀티플렉스의 라인업들은 조금씩 겹치며, CGV는 IMAX 상영을 겸하고, 롯데시네마는 음악영화 위주의 라인업을, 메가박스는 <로마>까지 아우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라인업을 선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 라인업을 모조리 묶을 수 있는 아주 단순한 키워드, 신작의 부재에 대항하기 위한 멀티플렉스 3사의 라인업은 한없이 안전하다. 물론 이중엔 개봉 당시 크게 상영되지 못한 작품도 많다. 가량 <캐롤>은 CGV 개봉 당시보다 더 많은 극장에서 더 많은 회차를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안전한 라인업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개봉한 신작들의 자리를 빼았는다. 이 지점은 언제나처럼 동일하다. 3월 5일 개봉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유사한 규모의 영화들보다 많은 200여개의 상영관을 확보했다 하지만, 기개봉작 및 흥행작들로 구성된 멀티플렉스 3사의 안전제일주의 상영작들은 여전히 개봉하는 작은 영화들보다 월등한 접근성을 지니고 있다. 연일 극장 관객수가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기에 뭐가 됐든 팔리는 영화를 걸어야 하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팔리는'이라는 단서 하에서 작은 영화들은 여전히 밀려나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2020-03-0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