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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2. 2020

2020-03-22

1. 지난 주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드디어 관람한 김에 주말 내내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를 봤다. 이틀 동안 나눠서 관람한 556분의 거대한 영화는, 마치 <철서구>나 <사령혼> 같은 왕빙의 영화가 그러하듯, 방대한 러닝타임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다. <쇼아>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당시 수용소에서 부역했던 사람 등의 인터뷰와 수용소가 있던 자리의 현재(영화는 1985년에 제작되었다)를 함께 담아내고 있으며, 2차대전 당시를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 지점에서 <쇼아>와 <쉰들러 리스트>(를 위시한 여러 홀로코스트 극영화들)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쉰들러 리스트>는 재현에 충실하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작가 스필버그와 블록버스터 감독 스필버그 사이의 혼란을 볼 수 있다. 스필버그가 정확한 숏과 세트를 통해 재현하는 폴란드 크라쿠프의 유대인 격리구역과 프아쇼프 수용소의 모습은 스펙터클하다. 그가 이 영화와 같은 해 개봉시킨 <쥬라기 공원>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D-Day 시퀀스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스펙터클을 선보인다. 그 스펙터클은 주로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수용소장 괴트의 명령 혹은 행동을 통해 벌어진다. 괴트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밀어 넣기 위해 유대인 격리구역의 유대인들을 쥐 잡듯이 잡아낸다. 이 장면은 마을 밖 산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쉰들러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쉰들러의 시점으로 내려다 본 마을의 전경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마치 쉰들러의 눈이 키노-아이가 된 것마냥 격리구역 곳곳을 돌아다닌다. 카메라는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격리된 유대인들 중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괴트와 나치 군인들의 총을 피해 집 여기저기에 위치한 구멍에 숨는 유대인들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폭력적으로 이송되고, 많은 수가 나치의 총에 죽는 광경을 담아낸다. 그리고 쉰들러의 눈에 들어온, 흑백의 화면 속에서 홀로 색을 지닌 붉은 코트의 소녀가 이 장면의 스펙터클의 정점을 차지한다. 이러한 스펙터클은 수용소 내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괴트는 수용소보다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한 자신의 관사 발코니에서 스코프가 달린 소총으로 수용자들을 쏜다. 이 장면은 FPS 게임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는 아군과 적군이 싸우는 통상적인 전쟁영화가 아니다. 196분의 러닝타임 동안 프레임 안에서 죽는 나치는 종전 이후 교수형에 처해진 괴트뿐이다. 반면 수많은 유대인들은 프레임 안에서 피를 쏟아낸다. 스필버그는 그 피와 폭력을 가감없이, 유려하게 재현한다. 흑백화면은 최소한의 필터링이다. 반면 <쇼아>는 스펙터클을 자제한다. <쇼아>가 지닌 동력과 박진감은 클로드 란츠만의 집요함에서 시작된다. 란츠만의 카메라는 이미 없어진 수용소 자리, 현대적으로 뒤바뀐 기차역, 한 때 유대인 격리구역이었던 폴란드 크라쿠프 등을 보여준다. 그곳에 나치의 흔적은 없다. 다만 증언들이 남을 뿐이다. 란츠만의 작업은 신의 형상이 없는 그리스 신천에서 신을 본다는 하이데거의 묘사와 유사하다. 카메라는 대지를 담고 증언들은 그 위에 세계를 열어 젖힌다. 


2.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통해 라즐로 네메시 감독의 <사울의 아들>에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 아우슈비츠에서 온 네 장의 사진]을 통해 <사울의 아들>의 주인공인 '존 더 코만도'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위베르만의 저작과 유사한 방식의 사유는 하룬 파로키의 <베스터보르크 수용소>와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을 통해 접할 수도 있다. <베스터보르크 수용소>는 수감자인 사진가 루돌프 브레스라우어가 촬영한 사진들만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유대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파로키의 두 영화아 위베르만의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은 재현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재료로 삼는다. 반면 <사울의 아들>은 당시를 재현한다. 위베르만이 [어둠에서 벗어나기]에서 언급한 '다큐멘터리적 정확성'은 도리어 <사울의 아들>에선 탈각된다. 아들을 찾아 수용소를 헤집고 다니는 사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카메라는 프레임 중앙에 위치한 것을 제외하면 주변부를 흐릿하게 처리한다. 다큐멘터리적 정확성과 극영화적 재현대상 사이의 초점거리는 <사울의 아들>에서 가장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때문에 <사울의 아들>은 <쉰들러 리스트>처럼 직접적인 스펙터클을 묘사하진 않는다. 다만 스펙터클은 사울이 지나다니는 수용소라는 동굴 외부에서 진동하는, 그것이 사운드가 됐건 포커스가 나간 이미지가 됐건 간에, 그런 것이 된다. 위베르만이 이 영화를 어째서 지지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3. <사울의 아들>과 <쉰들러 리스트>는 유사한 맥락에서 아쉬웠고, <쇼아>는 놀라웠다. 사실 <쉰들러 리스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종종 괴트를 매력적으로 묘사하려는 충동이다. 영화는 빈번히 괴트를 악마적으로 보이지 않게 묘사할 수 있는 지점들을 놓친다. 나치당원이지만 천 여명의 유대인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는 악인 괴트에 대립항에 서 있는 의인이며, 쉰들러의 대척점에 위치한 괴트는 거의 철저한 악인이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여느 블록버스터가 그러한 것처럼, 악당에게 매력을 부여하는 습관을 쉽게 놓지 못한다. 스필버그에겐 <바스터즈>의 타란티노 같은 뻔뻔함이 없다. 그렇다고 <데드 스노우> 시리즈나 <쿵퓨리> 같은 B급 장르영화에서 나치를 조롱하듯이 다루지도 않는다. 진중한 작가로서의 태도와 블록버스터 연출자로서의 태도는 <쉰들러 리스트>에서 격렬히 충돌한다. 스필버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이미지는 오스카 쉰들러의 묘지를 방문한 생존 인물과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모습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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