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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4. 2020

2020-03-23

1. 로만 폴란스키의 세자르 수상 이후 씨네21에 올라온 듀나와 박우성의 글. 두 사람은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소비하는 것이 비윤리적인가/포기해야하는가에 대해 각각 글을 썼다. 듀나의 글은 내가 이전에 썼던 글(https://brunch.co.kr/@dsp9596/725)과 유사한 입장이었고, 박우성의 글은 그 반대다.


2. "그가 나쁘다고 해서 그의 영화마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미학이라는 ‘특수’를 무시한 검열 행위에 가깝다. 바로 이것이 로만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수여한 2020년 세자르영화제의 논리이며, 최우수감독상을 안긴 201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의 합리화이자, 감독상을 쥐어준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제이고, 황금종려상을 선물한 2002년 칸국제영화제의 원칙이며…,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영화 창작의 기회를 그에게 제공하는 자본의 변명인 것이다." 박우성의 이 문장은 의문 투성이이다. 폴란스키에게 "창작의 기회를 주는 자본의 변명"이라는 부분엔 당연히 동의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폴란스키의 영화와 폴란스키를 동일하게 바라본다. 폴란스키의 영화는 폴란스키의 영화이면서 폴란스키만의 영화는 아니다. 그것은 영화제작을 가능케 한 자본의 영화이고, 듀나가 지적한 것처럼 배우, 제작자, 스탭, 원작자 등의 영화이다. 모든 영화는 작가-감독의 영화이기에 미학과 비평이 성립한다. 동시에 영화라는 장소는 그렇게 쉽게 성역화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공모전에 출품한 30초 짜리 초단편 영화를 찍는데도 대여섯명의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간다. 여기서 각각의 참여자는 얼마만큼의 지분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을 수치화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영화가 작가의 성역이라는 아이디어는 영화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라는 정신적인 성역은 시작부터 세속적인 조건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었다. 폴란스키 사건은 오염의 정도가 영화의 범위를 벗어난 케이스이다.


3. 때문에 미학을 핑계로 폴란스키에게 자본을 쥐어주는 이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폴란스키의 '영화'를 영화사에서 폐기해야한다는 것은, 그것이 영화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폴란스키의 영화'라는 성역을 생산한다. 다시 말해 폴란스키의 영화를 포기한다는 선언은 도리어 영화라는 이름의 성역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정말로 "로만 폴란스키라는 텍스트의 공론화를 전적으로 포기"한다면 그것과 함께 포기되는 폴란스키의 영화는 탈성역화된 오염된 영토로서의 폴란스키의 '영화'가 아닌, 로만 폴란스키라는 이름을 통해 전적으로 성역화된 '폴란스키의 영화'가 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듀나의 말처럼, 우리의 최선은 오염된 영토로서의 영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오염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폴란스키의 여러 수상 목록은 자본, 명예, 권력, 여성혐오가 뒤섞이고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정치적 선택의 리스트다. 폴란스키에게 새로이 돌아갈 영화제작 자본을 무효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며 중요한 일이지만, 이미 존재하는 목록을 지우는 것은 선택지 밖의 일에 가깝다. 가장 시급한 일은 저 목록이 더 늘어나지 못하게 조치를 취하는 일이지, 과거의 목록을 포기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거장을 지우는 것은 그가 범죄자임을 명시하는 것이어야지, 그 자체를 지우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4. 두 사람의 글에서 또 하나의 쟁점은 영화사이다. 듀나는 <차이나타운>과 <악마의 씨>를 빼고 70년대 네오 필름누아르와 호러 장르를 논하거나 연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박우성은 폴란스키를 빼고 영화사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적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무엇인지와 관련해 감쪽같이 모르는 척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라는 말은 곧바로 듀나에 의해 반박되는데, 듀나가 예시로 든 네오 누아르와 호러는 단순히 <차이나타운>과 <악마의 씨>의 미학적 부분에만 영향받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미적 기준만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이 영화 안팎으로 일어난 일들을 모르는 척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영화의 산업적, 자본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모두 거세한 채 오로지 미적 기준만으로 영화사를 쓸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결국 영화와 영화의 미적 주체인 작가를 동일시하고, 영화를 작가의 성역으로 만들고, 그를 계속 '거장'의 위치에 머물게 한다. 영화사를 다시 쓴다고 할 때의 영화사는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5. 어쨌거나 가장 최선의 것은 범죄자가 감옥에 가서  이상 자본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님 얼른 뒤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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