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디액트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프로그램 상영회에서 나선혜의 <8mm>(2019)를 보며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의 한 단편섹션 상영작들을 떠올렸다. 섹션의 상영작 네 편 중 세 편, 유하은의 <오늘과 내일>(2019), 남아름의 <핑크페미>(2018), 허세준의 <94. 비디오 앨범>(2018)이 그것이다. 이 네 작품은 모두 비디오테이프로 촬영된 홈비디오 영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8mm>는 우연히 발견된 비디오 캠코더 속 자신과 친구들의 과거,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추적한다. <오늘과 내일>에서는 유하은의 어머니이자 다큐멘터리 연출자인 어머니가 촬영한 홈비디오 영상이 등장한다. <핑크페미> 또한 여성의 전화 활동가인 어머니가 직접 비디오 캠코더로 남아름의 어린 시절을 촬영한 영상들이 삽입된다. <94. 비디오앨범>은 자신의 유치원생 시절 촬영된 비디오 영상을 리믹스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작품들의 연출자들은 198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각자의 어린 시절이 비디오 캠코더에 기록되던 거의 마지막 세대이며, 동시에 비디오 캠코더의 조작법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촬영된 날짜가 영상에 표시되는 비디오 캠코더의 특징 덕분에, 캠코더에 담긴 이들의 어린 시절이 1990년대 중분에서 2000년대 초반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는 2002년 국내에서 디지털카메라가 필름 카메라의 매출액을 추월한 시기와 절묘하게 겹친다. 결국 이들의 홈비디오는 비디오 테이프라는 물리적인 기록매체가 요구되는, 아날로그 기록장치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마지막 시기의 기록과도 같다.
자연스럽게 마민지 감독의 <버블 패밀리>(2017) 또한 떠올렸다. 이 작품 속 홈비디오는 90년대 초중반 부동산 버블과 맞물려 비디오 캠코더가 급속하게 보급화되며 촬영되고, 1997년 IMF를 기점으로 사라진다. 마민지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하는 것처럼, <버블패밀리> 속 홈비디오는 IMF 외환 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드러내는 지표적 장치로 사용된다. 앞서 언급한 네 편의 작품은 <버블 패밀리>처럼 시대 자체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물리적 매체로서 비디오테이프가 지닌 지표성은 작품 속에 남아있다. 이들의 작품 속 비디오테이프 영상은 각 연출자의 과거를 기록한 채, 각자의 단편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이는 각 비디오테이프들이 촬영되던 시기와 디지털카메라 및 캠코더로의 이행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디지털 매체 시대에 접어들어 사진과 영상의 지표성은 다소 탈각되었지만, 비디오테이프에 촬영된 영상들은 여전히 과거를 지시하고 있다. 누군가는 기록된 과거를 망각하고 다른 기억으로 대체하거나(<8mm>), 자신의 과거를 리믹스라는 수단을 통해 재매개하며 새로운 기억을 덧씌우거나(<94, 비디오앨범>), 아날로그 매체에 담긴 과거를 과거의 지표 그 자체로서 받아들인다(<오늘과 내일>, <핑크페미>). 자신의 과거를 IMF 외환 위기의 지표로써 사용하는 <버블 패밀리> 또한 같은 맥락 아래에서 비디오 캠코더 영상을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들은 영화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비디오테이프들을 지표로써 사용한다. 이들은 아날로그 기록 매체에서 디지털 기록 매체로의 이행이 벌어지는 과도기에 놓여 있고, 자신의 과거가 아날로그 기록 매체, 즉 물리적인 매체에 기록되어 명확한 지표성을 가지는 마지막 세대에 가깝다.
2.
200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디지털카메라가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핸드폰에 카메라가 장착되기 시작하고, 버디버디와 싸이월드로 대표되는 미니홈피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미니홈피에 업로드하기 시작한다. 아날로그 사진은 디지털 사진으로 변환되고, 디지털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나 핸드폰에서 미니홈피로 옮겨진다. 각자의 과거를 기록하는 매체는 사진앨범과 비디오테이프와 같은 물리적 매체에서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같은 디지털 매체로 옮겨지게 된다. ‘미니미’라는 아바타를 내세우고, 미니홈피 메인에 걸려 있는 ‘미니룸’을 꾸밀 수 있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사진앨범이나 비디오테이프를 집에 보관하던 현상을 인터넷 공간에 그대로 재현한다. ‘미니미’와 ‘미니룸’은 미니홈피가 개인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미니홈피 속 사진첩이 미니홈피 소유자의 것임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는 각종 포털사이트의 개인 블로그를 비롯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텀블러 등 SNS 서비스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로 촬영된 과거의 기억을 디지털 기록 매체에 저장한다.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로 디지털로 촬영된 사진은 실시간적으로 SNS에, 그리고 클라우드에 올려진다. 아이클라우드, 구글 드라이브, 네이버 N드라이브 등의 클라우드들은 사진이 촬영된 장소와 날짜, 시간에 맞춰 분류해준다. 앨범에 인화한 사진을 정리하고, 비디오테이프에 라벨을 붙이던 인덱스의 과정은 A.I.에 기반을 둔 디지털 기록 매체에 양도되었다. 사진과 영상에서 누가 누구인지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분류하는 과정마저 디지털 기록 매체들이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구글 드라이브 등의 몇몇 SNS와 클라우드 서비스들은 ‘n년 전 오늘’의 형식으로 과거의 기록을 상기시켜준다. 이는 특정 계기나 우연을 통해 사진앨범과 비디오테이프 더미를 뒤적이던 아날로그 기록 매체 때와는 다른 상기이다. 기억의 상기는 물리적인 뒤적임에서 일정한 알고리즘을 통해 수행되는 스마트폰의 팝업 알림창으로 대체된다. 기억해내고 싶은,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우연을 가장한 자의를 넘어 기억의 기록과 인덱스를 양도받은 디지털 기록 매체, 즉 타의에 의해 상기된다.
디지털 기록 매체에 양도된 기록의 수행은 언제든지 파쇄될 수 있다. 이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이어지는 싸이월드 폐쇄와 관련된 문제들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이들이 사용한 싸이월드는 SNS가 주된 미디어로 등장하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대량의 사용자 이탈을 겪게 된다. 돈을 벌지 못하게 된 서비스는 폐쇄된다. 이 단순한 자본 논리에 의해 싸이월드는 도메인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올해에는 10월 도메인이 삭제 직전까지 가게 되고, 접속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비슷한 예시로 올해 3월 갑작스레 서비스를 종료한 웹하드 서비스인 클럽박스를 들 수 있다. 온라인을 통해 ‘덕질’을 하던 이들이 영화와 드라마, 자막, 팬픽 등을 업로드 하던 공간인 클럽박스는 파일시티라는 다른 웹하드 서비스와 통합되면서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개인 유저들이 업로드한 파일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유저들이 업로드해온 수많은 ‘덕질’의 기록들이 한순간에 증발한 것이다. 싸이월드는 이런저런 이유로 도메인이 조금씩 연장되고 있으나, 이 역시 언제 서비스가 종료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와 티스토리, 아이클라우드와 N드라이브 등에서는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디지털 매체의 기록은 생각보다 불안정하며, 기억의 주체인 각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증발해버릴 수 있는 기록들이다.
3.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출발점이 된 홈비디오 영상들은 아날로그 세대의 마지막 흔적들이다. 물리적 기억 저장 매체에 기록된 감독들의 어린 시절은 각자의 계기를 통해 상기되고, 영화를 통해 재매개되어 스크린에 등장한다. 이것이 2000년대 이후 출생자들, 다시 말해 아날로그 기록 매체, 아날로그 기억 저장 매체의 시대가 지나간 이후에 출생한 세대에게도 똑같이 발생할 수 있을까? 홈비디오나 사진은 자녀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이다. 거실의 걸린 가족사진이 가족의 화목했던 한때를 알려주는 지표인 것처럼, 어린 시절을 기록한 홈비디오와 사진은 단순한 양육의 기록을 넘어 (상황과 감정을 포괄하는) 과거 자체를 상기시켜줄 지점을 만들어주는 지표이다. 90년대생 영화감독들의 출발점들이 홈비디오인 이유가 이것이다.
기억 저장 매체가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며, 홈비디오와 사진은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그 자리를 넘겼다. 저장되는 기억의 내용은 유사할지라도, 저장하는 매체가 변화한 것이다. 지금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어린 시절을 보여줄 때 사진앨범이나 비디오테이프 더미를 뒤적이지 않는다. 대신 스마트폰 갤러리나 클라우드 서비스의 폴더를 들여다본다. 혹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의 한없이 긴 타임라인을 내려가며 사진과 영상을 찾는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스토리’ 기능과 스냅챗은 SNS의 시간적 한계를 스스로 반영하고 있다. 24시간 동안만 게재되는 스토리들은 따로 저장해두지 않으면 사라진다. 디지털카메라가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폰의 갤러리가 SNS의 타임라인으로 통합되면서, 기억을 뒤적이는 행위는 한없이 타임라인을 내리는 제스처로 대체된다. 해시태그나 SNS 내 검색기능을 통해 뒤적임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는 있으나, 사진앨범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뒤적이는 행위만큼 직접적이지도 못하다. 컴퓨터 내 폴더 이미지는 여전히 서류집이나 사진앨범의 이미지를 하고 있으며, 정리와 라벨링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SNS의 타임라인과 스토리 기능은 정리와 라벨링이 목표가 아니다.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인 기록과 로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상기시켜주는 것이 SNS의 기능이다. 정리되지 않은 기억과 기록들은 비물질적인 형태로 SNS와 클라우드를 표류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기록의 상실이 일어난다. 싸이월드나 마이스페이스 같은 초기의 SNS에서 인스타그램과 카카오톡으로 계정을 옮기는 과정에서 자신이 업로드한 모든 사진과 글을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백업 기능을 지원하는 서비스도 많지 않다. 행여 SNS의 비밀번호를 완전히 잊어버렸으며, 그것을 찾을 방법조차 막힌 경우, 업로드된 기록들을 다시 꺼내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오프라인에서도 여러 차례 겪어왔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이전, 하지만 핸드폰에 카메라가 장착되던 시점에는 기기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이 사라졌다. 지금은 클라우드 서비스 앱을 통해 간편하게 사진을 업로드하고 새로운 기기에 옮길 수 있지만, 스마트폰 이전의 핸드폰들은 그러지 못했다. 클라우드 대신 기기 내 용량만으로 사진과 영상들의 데이터를 감당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도 많은 기록들이 사라졌다. 한동안 새로운 핸드폰을 구입할 때 기존에 사용하던 기기에 저장된 기록들을 새로운 기기로 옮겨주는 것은 핸드폰 대리점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이제는 그런 업무나 서비스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누구나 손쉽게 저장된 기록들을 옮길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이 기억의 기록과 저장을 간편하게 해주는 한편, 그 과도기에 위치한 수많은 디지털 기억들은 어딘가에 매장되었다.
어쩌면 2000년대 이후의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사진이나 영상을 우연히 접할 기회에서 배제되었을지도 모른다. 방구석이나 창고에 놓여 있는 비디오 캠코더나 사진앨범을 우연히 발견하는 상황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SNS 프로필에 접속해 한없이 타임라인을 들여다보거나, 부모의 PC를 뒤져보는 방법밖에 없다. 만약 이들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SNS를 캡처해 지신의 SNS에 업로드한다 해도 그것은 타임라인 저 밑으로 내려갈 기억을 업로드하는 것이다. 발견한 과거의 사진앨범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로 촬영하거나 변환하여 SNS에 업로드 하는 행위도 크게 다르지 않다. SNS에 업로드 된 기억들은 그 위로 퇴적되는 현재들로 인해 타임라인 저 밑으로 가라앉는다. 어느 순간 “쨘”하고 발견되는 아날로그 기억 저장 매체들과 SNS 타임라인의 차이점이다.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기억의 조건은 다른 것이 되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의 거의 모든 부분은 디지털 기록 매체로 인해 외재화되고, SNS나 클라우드 서비스의 기능을 통해 무작위적으로 상기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외재화된 기억들은 수많은 물질적/비물질적 플랫폼을 오가는 와중에 소실되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감독과 같은 세대의 사람들 중,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과도기의 기록, 즉 SNS나 클라우드에 업로드 되지 않은 기록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행여 그 기록들이 남아있다 해도, 그것들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발굴해야만 찾아낼 수 있는 기억과 기록들일 것이다.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촉발되는 기억과 기록의 네트워크는 모든 것을 나의 앞으로 가져오지만, 정작 자신의 기억은 저 밑으로 밀어 내버린다. 비디오 캠코더로 자신의 어린 시절이 기록되던 세대와 유튜브 및 인스타그램에 기록되는 세대 사이엔 기억에 조건에 대한 상이한 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기억이 기록되는 매체, 기억을 상기시키는 행위, 기억을 발굴하는 행위 등 기억하기의 조건들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4.
앞서 언급한 감독들은 각자(<8mm>의 경우엔 타인까지)의 어린 시절이 기록된 홈비디오 영상과 사진들을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사실 홈비디오를 영화의 출발점이자 재료로 삼아온 사례는 넘쳐 흐른다. 잠시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유작 <노 홈 무비>(2015)까지 이어지는 샹탈 애커만의 영화 속 홈비디오,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1972)과 같은 요나스 메카스의 작업들, 이어지는 인종차별의 고리를 탐구하기 위해 1940년대에 촬영된 선조들의 (8mm로 촬영된) 홈비디오를 가져오는 트래비스 윌커슨의 <누가 총을 쐈는지 궁금해?>(2017) 등의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다. 국내의 경우 이원우의 <옵티그래프>(2017) 같은 작품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홈비디오에 활용되는 장치가 필름에서 비디오로, 그리고 디지털로 옮겨 가면서 홈비디오와 사적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는 점점 더 허물어지고 있다. 당장 유튜브에 올라오는 수많은 브이로그(Vlog)들을 살펴보자. 20세기의 홈비디오와 2010년대의 브이로그는 일상의 기록이자 기억의 저장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상과 기억을 편집해 유튜브나 SNS에 올려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행위는 사진 앨범이나 홈비디오 테이프를 라벨링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우리는 이미 당장 주변에 놓인 일상이나 주변 인물을 촬영하고 특정한 주제나 목적 아래 편집하여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 장윤미의 <공사의 희로애락>(2018), 김소람의 <통금>(2018), 김보람의 <개의 역사>(2017)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할 것이다. 이 사적 다큐멘터리들은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며 기억, 페미니즘, 재건축 등의 이슈를 다루고 있다.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끌어와 공적 영역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버블 패밀리>는 IMF와 부동산 버블, <오늘과 내일>은 청소년의 장래에 대한 고민, <핑크페미>는 영페미(Young Feminist)에서 영영페미/넷페미(Young Young Feminist/Net Feminist)에 이르는 국내 페미니즘 운동의 이야기를 꺼낸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8mm>와 <94. 비디오앨범>이다. 두 작품이 주목하고 있는 주제는 ‘기억’이다. 글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다섯 작품은 아날로그 매체로 촬영된 홈비디오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8mm>는 우연히 (재)발견한 비디오 캠코더에 들어있는 영상을 추적해나간다. 학창시절 우연히 손에 넣은 캠코더로 밴드 동아리의 일상을 촬영한 그 영상은 캠코더 안에 들어 있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촬영한 테이프 위에 덮어 씌워졌다. 감독은 덮어 씌워진 학창시절의 영상 사이에 등장하는 이름모를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찾아 나선다. 결국 캠코더의 원래 주인과 영상 속 주인공을 찾는 것은 실패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영상에 등장한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만나고, 비디오에 기록된 기억에 관해 대화한다. 그 당시를 좋지 않은 시간으로 기억하던 한 친구는 영상 속 웃고 있는 자신을 낯설어하며 눈물을 흘린다. 누군가는 영상에 기록된 웃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그 당시를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누군가는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까? 누군가는 자신이 그때 웃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지내며, 누군가는 웃고 있는 당시의 영상을 자신의 기억으로 덮어 씌운다. 현재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기억은 과거의 실재를 마주하며 변화한다. 한편 자신의 과거를 물리적으로 잃어버린 영상 속 어린아이들은 과거의 실재와 마주하며 기억을 수정할 기회를 놓친다.
<94. 비디오앨범>은 (재)발견한 비디오테이프 속 실재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감독은 비디오 속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며 묘한 노스텔지어를 발견한다. 비디오 속 어린 자신은 웃으며 학예회 공연을 진행하지만,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웃는 표정 속에서 슬픔을 본다. 감독이 향하는 곳은 영상 속 어린이집이다. 현재의 그곳은 과거의 그곳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비디오 속의 자신을 마주하며 변화한 기억은 어린이집에 찾아감으로써 고정된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크로마키 스튜디오이다. 감독은 비디오 속 학예회 복장과 유사하게 차려 입고 그린 스크린 앞에 서 공연의 동작들을 반복한다. 비디오 속 어린 자신의 공연에 성인이 된 자신의 움직임이 더해진다. 과거의 기억을 매개하는 비디오테이프는 디지털 변환과 합성을 거쳐 과거와 현재의 결합체로 재매개된다. 감독은 디지털로 재매개된 영상을 다시 비디오테이프로 변환하고, ’94. 비디오앨범 REMIX’라는 라벨을 붙인다. 때문에 <94. 비디오앨범>은 사그라지는 과거에 슬픔을 느끼고,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비디오라는 매체적 조건을 디지털 환경에서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재)발견된 비디오를 통해 상기된 과거의 기억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8mm> 속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 물리적 매체에 박제된 과거의 실재라면, <94. 비디오앨범>은 그것마저 수정할 수 있는 지금의 기술적 조건을 시사한다.
5.
이러한 과거의 발견은 과거의 기억을 디지털 기억 저장 매체에 기록할 수밖에 없는 지금 세대에겐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창고나 방구석, 서랍이나 장롱 밑에서 우연히 비디오테이프나 사진을 발견하는 것은 과거의 행위가 되었다.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의 과도기에 놓인 이들의 어린 시절은 빠르게 변화하는 기억 장치들과 함께 실종되었고, 온라인에 저장된 기억들 또한 각 서비스의 종료를 기다리는 처지에 놓였다.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 어린 시절이 기록되는 세대는 과거를 우연히 발견할 수 없다. 이들이 발견하는 우연한 과거는 SNS의 알고리즘을 통한 타의적 상기이거나, 우연한 계기를 통해 우연하지 않은 방법으로 클라우드와 SNS의 타임라인을 끝없이 내리며 발굴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기억하기’의 조건은 변했다. 우리는 기억이 정리된 물리적 매체를 뒤적이는 대신 터치스크린 액정 화면을 끝없이 스와이프하거나, 클라우드 서비스에 접속해 원하는 기억을 찾을 때까지 마우스를 스크롤해야 한다. <8mm>와 <94. 비디오앨범>을 비롯해 기억을 비디오 매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대의 영화들은 비디오와 필름으로 촬영된 사진을 디지털로 변환하고 가공한다. 편집의 과정은 수작업 대신 편집 소프트웨어의 타임라인으로 대체됐다. 과도기를 지나 사라지고 있는 매체는 각자의 영화 작업을 통해 디지털로 부활한다. 이들은 기억을 클라우드와 SNS에 흩뿌리는 대신, 죽어가는 매체에 담긴 기억을 디지털로 변환해 편집 소프트웨어 타임라인에 올린다. 디지털의 타임라인 위에서 과거의 기억들은 재료가 되어 영화로 기록된다. 때문에 이들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일종의 시간 여행자가 된다. 자신은 과거의 기억으로 들어가고, 과거는 현재의 디지털 타임라인 위로 소환된다. 우연히 발견된 과거들을 현재의 기억으로 번역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은 SNS 타임라인에 차곡차곡 쌓이는 지금의 기억들과는 분명 다르다. 이러한 작업은 우연히 발견될 기억을 지니지 못한 디지털 기억의 세대에선 불가능에 가깝다. 어쩌면 이들은 변화한 기억의 조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일련의 작업들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고 느끼는 감정들은 사라지는 비디오 매체에 대한 슬픔과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기억 사이의 간극에서 출발한다.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기억이 기록되는, 그것의 우연한 (재)발견과 상기가 불가능해진 조건에서, 이들은 과거의 지표로서의 기억, 타의에 의해 증발할 수 있는 기억, 거대한 기억의 데이터 속에서 침몰하는 기억을 붙잡고 되살리고 수정하고 리믹스한다. 디지털로 인해 변화한 기억의 조건(들) 사이에서, 비디오 세대와 유튜브 세대 사이의 간극에서, 이들은 각자의 기억을 놓고 분투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공모에 냈다가 낙선한 글이다. 아래는 심사평 중 언급된 부분.
"박동수의 장평 「기억의 조건(들)」은 1990년대 후반 무렵에 출생한 세대의 ‘기억의 조건(들)’을 이 세대에 속한 젊은 연출자들의 작품을 통해 짚어보는 글이다. 그는 이 세대를 디지털 매체가 전면화되기 이전 아날로그적 기록/기억을 통해 유년기를 우연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로 규정하며, 특히 비디오 캠코더를 통해 기록된 과거의 홈비디오 영상을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는 최근의 작업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논리정연하고 정돈된 글쓰기가 장점인 글이지만,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특정한 경향에 대한 진단과 매체의 조건에 대한 논의는 있되 그것들의 정치적·사회적·미학적 가능성 혹은 가능한 저항의 방식에 대한 고찰이 결여된 점이 아쉬웠다. 또한, 개별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다소 피상적인 데서 그치고 있다. 이러한 아쉬움은 단평으로 제출한 박세영의 <캐쉬백>에 관한 글 「속도에서 튕겨져 나오다」를 통해 보완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도 유동적이고 속도에 내맡겨진 것으로 변한 자본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특정 작품이 하나의 사례로서 호출되었다는 인상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