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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8. 2020

속도에서 튕겨져 나오다

<캐쉬백> 박세영 2019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코미디언 로니 쳉이 최근 선보인 스탠드업 코미디에는 이런 농담이 나온다. "구매 버튼을 클릭하면 바로 상품이 내 손 안에 들어오게 해줘요. 미국에서는 지연을 허락하지 않아요. … 우리집에 무작정 들어와서 내가 주문한 음식을 내 입에 넣어줘요." 아마존의 유료 구독 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을 놓고 펼쳐지는 농담이다. 로니 쳉은 아마존 프라임 당일배송을 미국적이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딱히 미국적인 것만은 아니다. 총알배송, 로켓배송. 국내 온라인 쇼핑몰을 몇 분간 돌아다니기만 해도 이런 문구들을 볼 수 있다. 물류의 유통, 특히 개인의 집 앞으로 배송되고 이들의 손에 쥐어지는 물품을 유통하는 것은 속도의 전쟁이다. 의류나 음식부터 스마트폰, 가구, 완구, 심지어 주민등록증까지 수많은 배송 서비스를 통해 개인에게 배송된다. 폴 비릴리오는 이를 ‘시간의 전쟁’이라 명명한다. 그는 화물선과 기차를 통한 배송이 활성화된 17~19세기 초반 사이에 부의 성격이 고정되고 축적되는 것에서 유동적인 것으로 변화했다고 언급한다. “부의 성격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세계 경제의 속도가 변했다는 것, 즉 세계 경제가 이동성의 단위에서 시간의 단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전쟁으로 말이다.”[1] ‘시간의 전쟁' 속에서 가속화된 물류의 이동은 비가시화된다. 이동은 사라지고 내 손 안에 들어온 배송품만이 이동의 존재를 증명한다.


 박세영의 <캐쉬백>은 어떤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급하게 150만원이 필요한 주인공 고우가 밤을 새워 자신이 지닌 물건들을 직거래하는 이야기다. 개인 간의 직거래는 시간의 전쟁으로 비가시화된 물류의 이동을 개인이 직접 감각할 수 있는 기회이다. 화물선, 트럭, 오토바이 등으로 물류를 직접 배송하는 유통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배송하는 행위는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순간은 집 앞에 도착한 배송기사에게서 물건을 건네받거나,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발견했을 뿐이다. <캐쉬백>은 사라진 이동의 감각을 되살린다. 급전이 필요한 고우는 집을 뒤적여 팔 수 있는 물건들을 고르고, 사진을 찍어 중고거래 사이트에 업로드하고, 구매자의 연락을 받은 뒤 자신의 몸뚱이만 한 가방에 물품들을 집어넣는다. 거대한 가방을 짊어지고 직거래 장소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시간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전화를 통해 구입해야 할 물건의 가격과 거래시간을 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뒤이어 영화의 제목이 등장하고, “6 HOURS LEFT”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타이머는 고우를 움직이는 동력임과 동시에 그를 계속 압박한다. 게다가 낯선 이와 직거래를 하는 것은 굉장한 심리적 압박을 동반한다. 상대가 에누리를 요구하면 어떡하지? 물건의 어떤 부분을 꼬집어 거래를 거부하면 어떡하지? 게다가 고우는 중고거래 사이트에 헐값에 올라온 카메라를 구매해 친구에게 값을 더해 판매할 계획까지 갖고 있다. 구매자로써 낯선 판매자를 만나는 경험은 판매자로써 낯선 구매자를 만나는 경험과 다르다. 물건을 받고 현금을 건네기 전 물건에 하자는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판매자인 그의 시점에서 헤드폰이나 외장하드를 살펴보는 구매자들의 행동은 괜히 생트집을 잡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고우와 상대들이 거래하는 장면에서 절대 이들을 한 프레임 안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고우가 친구인 제이에게 방금 구매한 카메라를 되파는 장면을 제외하면, 낯선 이들과의 거래에서 고우와 상대방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미디엄 숏에서 시작해 점점 얼굴 클로즈업으로 향하는 카메라는 직거래의 심리적 압박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고우가 느끼는 심리적 압박은 단지 낯선 상대방과의 접촉에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겐 시간제한이 걸려있다. 이는 한정된 시간 안에 누군가를 구출해야 하거나 폭탄을 해체해야 하는 등의 문제보단 속도의 문제와 직결된다. 가령, 우리가 배달앱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온라인 서점에서 당일배송으로 책을 주문하면 배송기사에겐 시간제한이 부과된다. 그는 그 시간 안에 배송을 완료해야 보상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배송기사가 빠르게 물류를 배송할수록 시간의 전쟁은 그에게 더 많은 화물을 부과한다. 노동의 밀도는 속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시간제한과 속도의 압박 속에서 고우는 초조해한다. 급박해진 그는 제이에게 카메라를 판매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인다. 그 중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제일 좋아하는 화각이 28mm에, 조리개 2.8에, 셔터 스피드 250"을 그 카메라가 구현하고 있다는 언급은 속도의 순간을 붙잡으려 한 브레송의 도시 사진과 <캐쉬백>을 연결한다. 브레송은 "나는 현행범을 잡듯이 사진을 바로 그 현장에서 찍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 종일 길을 걸어 다녔다. 특히, 나는 갑자기 발생하는 사건 현장의 핵심을 단 한 장의 영상 안에 포착하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며 “사진은 정확한 순간을 고정시키는 유일한 것"이라 말한다.[2] <캐쉬백>이 고우가 언급하는 카메라 세팅을 통해 촬영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브레송이 고정시키고자 한 정확한 순간을 지향했다는 짐작은 가능하다. 고우가 걷는 서울의 풍경, 네온사인을 비롯한 온갖 간판, 자동차, 가로등이 만드는 빛은 도보를 통한 고우의 직거래 여정 속에 번져 있다. 특히 오프닝 타이틀과 함께 등장하는 지하철의 번진 빛과, 마지막 거래 물품인 우표를 잃어버리고 길거리를 뒤적이는 고우의 모습 사이에 삽입된 어지럽게 번진 도시의 불빛은 촬영된 순간의 직전과 직후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핵심을 포착한다. 그 핵심은 시간의 전쟁의 시발점인 속도이다.


 물류와 사람을 실어 나르는 각종 이동수단의 속도는 도보로 이동하는 고우의 속도를 언제나 앞지른다. 시간의 전쟁에서 속도를 갖지 못한 고우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우는 학이 그려진 우표를 잃어버려 우표집을 판매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낯선 구매자들이 생트집을 잡아 시간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그가 뛰어든 전쟁은 시야에서 사라진 물류의 이동을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며, 그것은 한 인간의 육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다. 비릴리오는 “네가 가진 것은 속도가 아니다. 네가 속도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속도 자체가 된다는 것은 속도라는 차원이 감각, 사고, 신체 등 삶의 모든 국면에 삼투하는 것이다.[3] 그러나 고우는 가시적인 실체로 다가온 속도 앞에 무릎 꿇는다. 그는 학이 그려진 우표를 찾지 못했고, 6시간 안에 150만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정지했다. 정지한 고우는 강가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학을 바라본다. 고우가 배송해야 했어야 할 우표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학은 이내 하늘을 날아간다. 줌 인을 통해 촬영된 학의 비행은 디지털 줌 인의 조악한 화질을, 프레임 내부를 금방이라도 무너질 픽셀 덩어리처럼 보이게 하는 디지털 노이즈을 노출한다. “정지는 죽음이다”라고 비릴리오는 말한다.[4] 시간의 전쟁에 참전한 고우는 가시적으로 다가온 속도를 체화하지 못하고 탈진한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디지털 노이즈로 일그러진, 물류 배송의 속도 밖으로 튕겨져 나온 학의 비행 속도뿐이다. 

          

[1] 폴 비릴리오, 『속도와 정치: 공간의 정치학에서 시간의 정치학으로』, 이재원 옮김, 그린비, 2004
[2]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영혼의 시선』, 권오룡 옮김, 열화당, 2006.
[3] 이영준,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 현실문화연구, 2006.
[4] 폴 비릴리오, 위의 책.

이 글은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공모에 냈다가 낙선한 글이다. 아래는 심사평 중 언급된 부분.


"박동수의 장평 「기억의 조건(들)」은 1990년대 후반 무렵에 출생한 세대의 ‘기억의 조건(들)’을 이 세대에 속한 젊은 연출자들의 작품을 통해 짚어보는 글이다. 그는 이 세대를 디지털 매체가 전면화되기 이전 아날로그적 기록/기억을 통해 유년기를 우연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로 규정하며, 특히 비디오 캠코더를 통해 기록된 과거의 홈비디오 영상을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는 최근의 작업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논리정연하고 정돈된 글쓰기가 장점인 글이지만,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특정한 경향에 대한 진단과 매체의 조건에 대한 논의는 있되 그것들의 정치적·사회적·미학적 가능성 혹은 가능한 저항의 방식에 대한 고찰이 결여된 점이 아쉬웠다. 또한, 개별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다소 피상적인 데서 그치고 있다. 이러한 아쉬움은 단평으로 제출한 박세영의 <캐쉬백>에 관한 글 「속도에서 튕겨져 나오다」를 통해 보완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도 유동적이고 속도에 내맡겨진 것으로 변한 자본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특정 작품이 하나의 사례로서 호출되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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