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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24. 2020

<사냥의 시간> 윤성현 2020

 준석(이제훈)은 3년 만에 출소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친구 기훈(최우식), 장호(안재홍)와 함께 회포를 푼다. 이들은 함께 도둑질을 했던 사이이다. 준석은 자신이 수감된 사이 경제위기로 인해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치솟아 함께 훔친 돈이 휴지조각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한때 함께 활동했던 상수(박정민)를 끌어들여 마지막으로 큰 한탕을 시도한다. 한편, 정체불명의 남자 한(박해수)이 이들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파수꾼>으로 이름을 알린 윤성현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인 <사냥의 시간>은 가까운 미래에 찾아온 금융위기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자욱하게 깔려 있고, 문 닫은 상가의 상점들 위엔 온갖 그래피티가 가득하며, 생존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연일 시위를 이어가고, 총과 마약이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세팅만 보면 핵전쟁이나 질병, 환경오염 등을 원인으로 하는 여느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영화는 그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의 장면과 분위기를 끌어온다. 가령 <28일 후>와 <나는 전설이다>의 황량한 도시 풍경, <블레이드 러너>, <아키라>, <공각기동대> 같은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봐온 매연 위로 빛을 쏟아내는 도시의 전경과 독특한 디자인의 차량, <매드 맥스> 시리즈 같은 황량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혹은 <시카리오>와 같은 범죄영화에서 보아온 총격전 등이 그러하다. 다시 말해 <사냥의 시간>은 다가올, 혹은 이미 도래한 파국의 세계에 던져진 이들의 이야기이며, 영화의 이미지 대부분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영화 안에서 세계관의 구성물로 느껴진다기보단,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레퍼런스의 리스트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익숙하게 보아온 범죄-도주-추적의 서사가 한국영화에 한정 지어 희귀했던 이미지의 세계관 속에서 벌어질 뿐이다. 동반자살이라 불러도 좋을 관계의 파국으로 향해가는 남성 청년 캐릭터들이 누군가에게 추격/추적된다는 점에서 <파수꾼>의 이야기를 장르만 바꿔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유사한 이야기를 다른 세계관에서 펼치는 작업은 분명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여러 영화에서 빌려온 이미지들은 서사 혹은 세계관을 구성한다기보단 분절된 시퀀스를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시위대의 이미지는 파국의 세계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도식적 선택일 뿐이며, 기훈의 아버지가 시위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단지 서울 밖에 위치한 기훈의 집 시퀀스로의 연결고리이지, 시위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극 초반 자동차를 탄 세 주인공의 시점으로 등장하는 원경의 시위대는 분위기에 봉사하지만, 기훈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현실의 시위에서 가져온 클로즈업된 시위대 이미지는 오히려 <사냥의 시간>이 유지하려던 세계관과 해당 시퀀스를 분리한다. 다시 말해, <사냥의 시간>이 추구하려던 레퍼런스 속 파국의 세계관은 현실에서 따온 이미지를 통해 그것의 세부를 묘사함으로써 붕괴된다. 

이는 각본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령 한의 총에 맞은 장호를 데리고 준석과 기훈이 병원으로 향하는 시퀀스를 보자. 간판에만 불이 들어와 있을 뿐 어두운 응급실엔 두 명의 간호사와 장호의 팔에서 총알을 제거하는 의사가 있다. 이 병원엔 그 누구도 입원해 있지 않는 것처럼 비상등만이 켜져 있을 뿐이지만, 밤새워 야근하는 인력이 존재한다. 실제로 한이 세 주인공을 쫓아 병원에 도착해 총격적을 벌일 때 이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기서 병원은 세 주인공과 한이 총격전을 벌이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 거대한 소총과 산탄총을 들고 복도를 돌아다님에도 아무도 놀라선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각본은 그것을 그렇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대부분의 시퀀스가 이런 방식이다. 절대 철들지 않을 것 같은 남성 청년들은 그렇게 장르적 상투성으로 가득한 공간을 떠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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