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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22. 2020

<낭트의 자코> 아녜스 바르다 1991

 프랑스 누벨바그 시기에 활동했으며, <쉘부르의 우산>이나 <로슈포르의 숙녀들>과 같은 뮤지컬 영화들을 연출한 자크 드미는 뇌종양으로 인해 1990년 10월 27에 사망했다. 아녜스 바르다는 자신의 남편인 자크 드미의 어린 시절을 영화로 만든다. <낭트와 자코>는 아녜스 바르다가 촬영한 자크 드미의 말년과 극형식으로 꾸며진 낭트에서 나고 자란 드미의 어린 시절, 자크 드미의 영화 푸티지가 뒤섞여 있다. 때문에 언뜻 <낭트와 자코>는 드미에게 보내는 바르다의 러브레터라던가, 여느 영화광 감독들이 그렇듯 자신의 우상을 담아내고자 하는 전기영화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30여 년간 함께 생활하고 활동해온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낭트와 자코>는 바르다가 자크 드미의 어린 시절에서 드미의 영화를 구성하는 모티프들을 수집하는 영화가 된다. 

 바르다는 드미의 어린 시절, 즉 그가 ‘자코’로 불리던 시절을 흑백으로 담아낸다. <쉘부르의 우산> 초반의 자동차 정비소 시퀀스와 유사한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자코의 아버지의 정비소부터, <쉘부르의 우산>은 물론 <로슈포르의 숙녀들>, <롤라>, <당나귀 공주> 등의 숏과 대사가 드미의 어린 시절 속에 산재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바르다는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자코의 삶 속에서 자신의 동반자이자 동료인 자크 드미의 영화 속 모티프들을 찾아낸다. 아니, 이는 그 모티프들을 파도에 떠밀려온 모래사장 위의 해초나 조개껍데기처럼 흩뿌려 놓고 재발견하는 것에 더 가깝다. <낭트와 자코>의 첫 쇼트는 해변을 보여준다. 이어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청청패션의 자크 드미가 등장하고, 풀숏으로 해변에 누워 있는 드미를 보여준다. 해변은 바르다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이다. 어촌 마을을 다룬 데뷔작 <라 푸엥트 쿠르트로의 여행>에서 시작된 바르다의 필모그래피는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거쳐 <얼굴들, 장소들>과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해변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수집이라는 모티프는 <얀코 삼촌>이나 <엘자 라 로즈>와 같은 단편은 물론,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이때의 수집 대상은 감자와 같은 실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르다 자신의 영화를 담고 있는 필름(설치작품 <영화관: 행복의 온실>)이기도, 스스로의 행적이기도(<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익명에 가까운 개인들의 얼굴이기도(<얼굴들, 장소들>), 혹은 어떤 이야기이기도(<얀코 삼촌>, <엘자 라 로즈>, <방랑자>)이기도 하다. 결국 <낭트의 자코>는 바르다의 모티프 속에서 드미의 모티프를 새로이 생성하는 작업에 가깝다. 

 자코의 어린 시절을 흑백으로 담고 있음에도, 몇몇 장면들을 컬러로 처리했다는 점은 ‘새로이 생성하는 자크 드미의 모티프들’이라는 영화의 목적을 충실히 보여준다. 바르다는 단순히 2차 대전과 직업학교 등 암울하고 칙칙한 현실 속에서 빛나는 색색의 모티프를 발견하는 자크 드미의 모습을 대비시키기 위해 흑백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물론 흑백의 숏 사이에 등장하는 컬러의 숏들은 훨씬 선명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자코의 삶 속에서 컬러로 담기는 것은 대개 자코를 영화감독의 삶으로 이끌어낸 것들이다. 카니발, 해군 병사들, 영화 포스터, 카메라, 자코가 직접 만든 미니 영화관, 인형극 등이 컬러로 등장한다. 그것들은 대개 오른쪽을 가리키는 손가락 모양의 그림(☞)에서 시작되어 왼쪽을 가리키는 그림(☜)으로 끝나는 자크 드미의 영화 푸티지로 연결된다. 그 손가락이 증명하듯, 자코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컬러 숏들은 드미의 영화, <낭트의 자코>의 후반부에서 파리 영화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드미의 삶, 그리고 드미의 모티프들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바르다는 투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대담하고 친절하게 검지 손가락(Index Finger)을 사용해 그 지표들을 알려준다. 여기서 드미의 영화와 드미의 삶을 도식적으로 분리하는 시도는 불필요해진다. 바르다의 대범한 친절함이 첫 번째 원인이고, 각 모티프를 통해 재현된 드미의 영화와 바르다의 카메라를 통해 재현된 자코의 삶이 결합되는 것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여기서 컬러 숏들이 ‘선명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거기에 색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컬러는 선명함을 보증하지 않는다. <롤라>가 <쉘부르의 우산>에 비해 선명하지 않은 영화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도리어 흑백의 숏을 선명하지 못한 것이 아닌 것으로,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모티프를 생성하는 자크 드미 개인의 역사로 끌어올린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말년의 자크 드미와 그의 팔이나 머리카락, 목 등에서 출발해 눈에서 끝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죽어가는 드미의 구석구석을 담아내려는 바르다의 애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코가 눈으로 경험한 현상들이 그의 삶과 필모그래피를 구성하는 모티프로 끌어올려졌는지를 모여준다. 검지 손가락 그림으로 시작된 영화 푸티지 시퀀스 중 하나는 왼편으로 향하는 손가락 그림 대신 드미의 손과 드미의 어깨에 올라간 (아마도) 바르다의 손을 담는다. 드미의 손 위에 포개진,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가시적인 바르다의 모습인 바르다의 손은 이 영화를 직접 연출하고자 했던 드미의 과업을 바르다가 이어받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바르다는 자신의 영화 속 모티프를 정리하고자 했던 드미의 과업을 자신의 모티프를 통해 전개한다. 바르다는 자크 드미라는 넓은 해변, 꿈-기억-추억의 해변을 탐구한다. 이것은 한 영화감독이 다른 영화감독의 삶을 해부하고 해체하여 어떤 근거를 찾아내려는 작업이 아니다. 바르다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펼쳐온 모티프 속에서 드미의 모티프를 새롭게 발견하고, <낭트의 자코>라는 새로운 바탕을 생성한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되기 전 자코는 인형극을 보고 있다. 인형극이 끝나자 나가자는 엄마에 말에 자코는 “막이 내리고서도 다시 시작하는 극이 있어요”라고 대꾸하며 자리를 뜨길 거부한다. 바르다는 막이 내린 인형극 무대 위에 오프닝 크레딧을 띄운다. 사실 그것은 90년대 영화의 통상적인 오프닝 크레딧이라기보단 엔드크레딧에 가까운 정보량을 담고 있다. 영화가 완성된 것은 자크 드미가 사망한 이후이다. 영화의 두세 번째 쇼트에서 드미의 모습을 보여준 바르다는 이내 영화의 막을 내려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시작한다. 자크 드미의 영화와 삶, 그것을 구성하는 모티프는 바르다의 모티프 속에서 재발견되고 새로운 삶을 얻는다. <낭트와 자코>는 자크 드미와 그의 작품의 지속되는 삶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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