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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17. 2020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미야케 쇼 2018

*스포일러 포함


 ‘나’(에모토 타스쿠, 극 중 이름이 등장하지 않음)는 서점에서 일한다. 그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 시즈오(소메타니 쇼타)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서점에서 함께 일하는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와 연애를 시작한다. 사치코와 시즈오, 그리고 ‘나’는 함께 여름을 보낸다.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홋카이도의 바다 마을 하코다테에서 살아가는 세 명의 청춘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트뤼포의 <쥴 앤 짐>부터 수많은 로맨틱코미디나 멜로드라마의 소재가 된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홋카이도 하코다테의 짧은 여름을 배경으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은 ‘나’와 ‘사치코’가 연애를 시작한다는 것 정도뿐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세 사람이 노는 모습을 담고 있다. 세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고, 대화하고, 클럽에서 춤을 추고, 새벽 길거리를 걷고, 당구나 다트를 즐긴다. 미야케 쇼는 직접적인 대사나 행동으로 세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지 않는다.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표정들의 교차, 말하는 사람보단 듣는 사람을 보여주는 카메라,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의 조명이 세 캐릭터를 각기 표현하는 것처럼 등장하여 이들이 함께 있을 때 뒤섞이는 모습은 전형적인 삼각관계의 드라마성을 덜어내고 (혹은 더 나아가 폴리아모리의 가능성 또한 내포하며)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은 여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집중한다. 

 여기서 여름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대신 ‘유지한다’고 쓴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홋카이도의 여름이 짧기 때문임과 동시에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듯 휘발되는 몸짓과 대화들을 가능한 붙잡아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술과 춤과 함께하는 대화는 어슴푸레한 새벽의 햇빛과 함께 휘발되고 그 잔상만이 세 사람의 주인공에게 남는다. 그 잔상이 세 사람의 현재를 지탱한다. 넓게는 하코다테라는 지역, 좁게는 ‘나’와 사치코가 만난 서점이라는 장소, 사치코와 시즈오를 매개하는 ‘나’는 세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는 매개체이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름이 불러지지 않는 ‘나’라는 1인칭의 인물을 내세우지만, 영화는 세 주인공의 분량을 유사하게 배분한다. 세 사람의 존재는 각자의 존재를 지탱하고, 끝이 있는 여름과 새벽은 예정된 끝을 맞이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는 증거로써의 잔상을 남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후반부가 그렇다. 영화는 수미상관을 이루듯 초반부에 등장했던 숏, 가령 동 틀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는 인물들, 하코다테의 야경, 푸른빛이 도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먹는 ‘나’의 모습 등이 그렇다. 어찌 보면 영화 전체가 하나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나’와 시즈오의 집에 모였던 세 사람은 연애라는 삼각구도에서든, 가족 등 세 사람의 관계 밖의 관계에서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지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만나러 간 시즈오는 세 사람이 함께하던 자취방의 냄새를 떠올리지 못하고, ‘나’와 사치코의 관계는 시즈오와 연애하게 되었다는 사치코의 선언으로 일단락되는 듯하다. 하지만 시즈오는 냄새를 그대로 떠올리지 못할 뿐 자취방의 냄새라는 사실 자체를 기억한다. ‘나’는 사치코와 처음 번호를 주고받았을 때처럼 120까지 숫자를 세며 기다리지만 결국 숫자를 다 세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리고 사치코의 표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 사람의 관계가 붕괴되지 않고 유지될 것임을 지시한다. 이건 세 사람의 대화나 행동을 통해 논리적으로 유추되는 결론이라기보단, 세 사람의 여름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관객의 직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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