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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14. 2020

<바람의 언덕> 박석영 2019

*스포일러 포함


 재혼한 남편이 병으로 죽은 뒤, 영분(정은경)은 고향인 강원도 태백으로 훌쩍 떠난다. 그곳에선 영분이 어렸을 때 낳은, 고아원에서 자란 딸 한희(장선)가 있다. 영분은 어느 모텔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그곳에 투숙한다. 한희는 외진 지역의 상가에서 필라테스 학원을 열고 강사로 일하고 있다. 집이 없는 한희는 밤이면 필라테스 학원에 텐트를 치고 잠에 든다. 한희의 상황을 알게 된 영분은 한희 모르게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하고 강습을 받는다. 한희는 얼마 안 되는 회원인 영분을 살갑게 받아준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진다. 그러던 중 영분의 양아들 용진(김태희)이 영분에게 재산포기각서에 서명해줄 것을 요구하며 찾아온다. 박석영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바람의 언덕>은 ‘꽃 삼부작’이라 불린 전작들과 궤를 같이 하면서 약간의 변주를 준다. 

 ‘꽃 삼부작’이라 불린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은 배우 정하담이 연기한 세 명의 ‘하담’이 주인공이었다. 하담은 집을 나왔고, 집이 없었으며, 마침내 집이라 부를 만한 장소가 생겼다. 그가 왜 홀로 길거리를 떠돌며 또래들을 만나고, 파도를 맞으며 탭댄스를 따라 했는지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마치 날 때부터 혼자였던 사람처럼, 하담은 같은 옷, 같은 가방과 함께 여기저기를 떠돌다 <재꽃>에 도달해서야 어딘가에 정착한다. <바람의 언덕>은 그 역을 보여준다. 물론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두 여성 또한 집이 없다. 영분은 남편의 죽음과 함께 집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한희는 성인으로 성장하고 학원까지 있지만, 그곳은 집이라기보단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여건을 제공하는 거처에 가깝다. 달라진 것은 카메라가 쫓는 인물이 영분과 한희, 두 사람이라는 점이다. 영분은 혼자가 된 사람이라기보단 누군가를 혼자로 만든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영화는 영분의 전사를 충분히 전달하지 않고, 대신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 정도만 건조하게 암시한다. 영분은 한희를 고아원에 맡겼고, 양아들을 두고 훌쩍 고향으로 향한다. 반면 한희는 거의 삶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혼자였다. 물론 ‘고아원의 엄마’도 좋은 사람이었다 말하지만, 필라테스 학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그의 지금은 완전한 혼자이다. ‘꽃 삼부작’이 한희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바람의 언덕>은 영분으로부터 시작한다.

 <바람의 언덕>은 고아원에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어느 엄마와 딸의 감동적인 재회를 다룬 신파가 아니다. <바람의 언덕>은 혼자가 된 사람과 혼자였던 사람, 혹은 혼자였던 사람과 혼자가 된 사람의 궤적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감정을 담아내려 애쓴다. 영분이 한희의 필라테스 학원을 찾아가는 초반부를 보자. 영분은 한희와의 짧은 (하지만 한희는 모르는) 재회 이후, 필라테스 학원의 전단지를 한 움큼 집어 온다. 한희가 몇몇 곳에 붙여준 전단지를 봤던 영분은 태백 곳곳에 학원 전단지를 붙여준다. 한희는 우연히 전단지를 붙이던 영분을 발견한다. 며칠 뒤, 한희에게 전단지를 붙이지 말아야 할 곳에 전단지가 붙어 있다는 전화가 오고, 한희는 전단지를 떼러 나간다. 전단지를 붙이며 태백을 한 바퀴 돌았던 영분의 궤적을 한희는 전단지를 떼며 뒤따른다. 어느샌가 한희는 자신의 붙였던 전단지를 다시 떼고 있던 영분과 마주친다. 두 사람의 궤적은 마침내 맞물린다. 맞물린 궤적은 영분이 숨기던 비밀을 진실로 만들고, 두 사람은 마침내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이 과정이 썩 매끄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관객은 두 사람의 숨겨진 전사를 두 사람의 상황을 통해 상상해내야 하고, 때문에 영분이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풀어놓는 장면은 다소 당황스럽다. 한희가 발작적으로 과호흡 하는 모습은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인상이 강하다. 영분과 우연히 만난 택시기사 윤식(김준배)은 어느샌가 극에서 사라진다. 또한 ‘꽃 삼부작’이 그러했듯, 박석영 감독의 영화에서 감정의 분출은 영화가 성실하게 따라온 인물의 궤적에서 돌출되어 있다. 원을 그리듯 유사한 공간들을 반복해서 지나치는 인물들은 어느 한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는데, <바람의 언덕>에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공간은 태백에 막 도착한 영분이 잠시 몸을 기대어 한희의 명함을 살펴보던 다리이다. 그곳에서의 돌출은 공간의 순환을 담아내던 카메라의 궤적에서 벗어난 공간으로의 이동을 가능케 한다. 가까스로 맞물린 궤적에서 빠져나온 영분은 한희의 사진으로 암시되던 공간인 ‘바람의 언덕’으로 향하고, 한희 또한 그곳으로 향한다. 다소 거친 도약을 통해 도착한 장소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같은 곳을 바라본다. 그것을 보여주며 끝나는 영화는, ‘마침내’의 이르는 과정이나 그 저변에 끌린 감정이나 시선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그러한 감정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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