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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6. 2020

2020-10-26

1. 상상마당시네마가 문을 닫는다는, 아니 상상마당의 영화사업부 전체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상마당은 <피의 연대기>, <이태원>, <반짝이는 박수소리>, <집의 시간들>, <땐뽀걸스>, <할머니의 먼 집> 등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를 배급했던 든든한 버팀목 중에 하나였고, <족구왕>, <경복>, <문영>, <환상 속의 그대>, <돼지의 왕> 등의 한국 독립 극영화들을 배급했던 곳이다. 홍상수, 라브 디아즈, 가와세 나오미가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어떤 방문>의 배급사이기도 하다. 상상마당시네마를 처음 찾은 것은 아마도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어떤 영화를 봤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 도착한 지하 4층 상영관의 아담한 분위기는 생생하다. 대학교를 홍대로 다니게 되며 공강시간에 종종 상상마당시네마를 찾았다. 영화를 기다리며 로비 한켠에 놓인 만화책들을 읽던 기억이 난다. 상상마당 음악영화제에서 소노 시온의 <도쿄 트라이브>를 봤었고, <록키 호러 픽쳐 쇼>의 싱어롱 상영을 갔었고, <우리들>의 무대인사를 봤으며, 이주영 배우 단편영화 기획전을 본 뒤 이주영 배우와 사진을 찍었었다. 영화제에서 <김군>과 <야광>을 본 뒤 상상마당에서 강상우 감독 단편기획전, 임철민 감독 단편기획전을 접한 기억도 생생하다. 매년 진행된 씨네아이콘 영화제도 기억나고, 연말마다 상상마당에서 상영된 영화 중 투표를 통해 상영되었던 <캐롤>을 보러 갔다가 '경영진의 선물'을 받았던 기분 좋은 기억도 떠오른다. 극장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 기억들을 되짚을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77석의 작은 극장에서 나는 언제나 E열 1번 자리에 앉았었다. 영사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짐을 놓기 편했던 자리다. 올해 상상마당시네마는 코로나19로 인해 장기관 휴관했다. 상상마당시네마를 마지막으로 찾았던 것은 1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개봉했을 때였고, 애인과 영화를 본 뒤 3층에 올라가 포스터를 샀다. 그러고보니 애인과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 상상마당시네마에서 <피의 연대기>를 보고 홍대입구역 근처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 카페는 이미 사라졌다. 이제 상상마당시네마도 사라진다. 그 때에도, 올해에도 나는 상상마당시네마 E열 1번 자리에 앉았었다. 다시 그 자리에 앉아서, 편안하게 짐을 놓고 영화를 보고 싶다. #상상마당시네마를지켜주세요


2.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에 대한 단평. 부산에 와서 생각보다 영화를 많이 못 봤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어야 했는데 자느라...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2019


 서부개척시대의 오리건 주 어딘가, 덫 사냥꾼들과 함께 이동중인 요리사 쿠키(존 마가로)는 얼떨결이 살인을 저지른 중국인 킹 루(오리온 리)를 우연히 마주친다. 하룻밤 동안 그를 돌봐 준 쿠키는 그와 갈라져 어느 정착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킹 루와 재회한다. 함께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떠올리다가 정착지의 권력자 팩터(토비 존스)의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내어 비스킷을 만들어 팔기로 한다. 실력 있는 요리사인 쿠키의 빵은 큰 인기를 끌고, 결국 팩터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가며 그가 그들을 찾아온다.

 켈리 라이카트의 7번째 장편영화인 <퍼스트 카우>는 우정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를 인용하며 시작된다.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다르다. 쿠키는 소심하다. 식재료를 제대로 구해오지 못한다고 다른 이들에게 구박받으면서도 제대로 화를 내지 못하고, 돈을 벌 수 있지만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일에 쉽게 뛰어들지 못한다. 걷고 달리는 그의 모습도 어딘가 느릿하다. 반면 킹 루는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말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어렸을 적 무역선에 올라 유럽과 아프리카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말하기도 한다. 다소 판이한 성격의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났고, 우연히 재회한다. 이들이 재회했을 때 킹 루에겐 거처가 있다. 조악한 오두막이지만 두 사람이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다. 편안히 있으라고 말한 뒤 장작을 패러 간 킹 루를 보며 쿠키는 빗자루를 들어 바닥의 낙엽을 쓸어낸다. 두 사람은 다르고, 닮았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이 이런저런 잡일을 처리하며 대화하는 장면이 10여분 정도 이어진다. 쿠키가 빨래를 하고 있으면 킹 루는 가사도구를 정비한다. 쿠키가 요리를 하고 있으면 킹 루는 옷을 기운다. 두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해야 할 공통의 일을 각자 나누어 하면서 살아간다. 비스킷을 만들어 팔자는 이야기는 이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라이카트의 카메라는 그러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팩터와 같은 권력자들이 유럽에서의 패션 유행을 이야기하고, 세계 무역과 돈에 대해, 정치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어딘가에 호텔을 세우겠다는 몽상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생활의 아름다움, 어딘가 더럽고 불편해 보이며 번거로울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서부개척시대의 생활, 그 생활을 위한 손동작. 정착지에 오는 동안 짝을 잃은 젖소에게 말을 걸며 젖을 짜는 쿠키의 손과 나무 위에 올라 망을 보는 킹 루의 모습이 교차되는 순간은 생활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언제라도 박살낼 수 있는 존재를 주시하는 것의 숏-리버스 숏이다. 

 두 사람이 맞이할 엔딩은 영화 초반에 이미 제시된다. 오프닝 시퀀스의 시공간이 현대의 오리건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화물선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강가를 떠도는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개는 땅을 판다. 한 소년이 개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곳에 묻혀 있던 것을 본다. 땅을 파헤치자 두 사람의 해골이 드러난다. 영화는 이 순간 과거로 이동해 숲에서 버섯을 채집하는 쿠키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개와 소년이 발견한 해골이 쿠키와 킹 루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의 엔딩은 두 사람이 해골과 같은 자세로 누워 죽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라이카트는 두 사람이 결국 그렇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퍼스트 카우>는 그 죽음을 천천히 다가가는, 우정과 사랑으로 충만하고 생활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낸다. 죽음의 흔적에서 출발한 영화는 가장 충만한 형태의 삶을 경유해 죽음으로 되돌아간다. <퍼스트 카우>는 그 순환을 채우는 두 사람의 궤적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찍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는 아름다운 것을 포착한다. 우정은 아름답다. 때문에 영화는 그 우정을 포착한다. 

<암모나이트> 프란시스 리 2020

3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큰 호평을 받은 게이 로맨스영화 <신의 나라>의 프란시스 리 감독의 신작. 이번 영화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이기에 당시 과학계에서 말 그대로 배제되었던 고생물학자 메리 애닝(케이트 윈슬렛)과 요양차 그의 마을에 온 샬롯(시얼샤 로넌) 사이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 <신의 나라>를 보지 못했지만 그 영화가 워낙 호평을 받았기에 이번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영화를 예매하며 품었던 기대감에 비해선 아쉬웠다. 자신의 놀라운 성과를 인정받지 못할 뿐더러 런던의 남성 과학자들에게 빼앗기기만 했던, 그럼에도 화석에 대한 강한 열정을 품고 있던 메리 애닝의 복잡다단한 속내를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은 훌륭했으나, 그와 시얼샤 로넌 사이의 로맨스적 케미가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사실 배우의 문제라기보단 각본의 문제처럼 느껴지는데,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변화가 너무 급속도로, 그것도 순식간에 널뛰기하듯 전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 명의 아이를 출산했으나 메리와 다른 한 아이만 살아남았다는 메리의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한 다른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메리와 같은 마을에 사는 엘리자베스 필팟과의 관계가 그저 언급만 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쉬웠다. 좀 더 정석적인 전기영화에 샬롯과의 로맨스를 서브플롯으로 풀어나갔다면 더 안정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친애하는 홍콩> 앤슨 호이샨 막 2020

영화는 세 명의 홍콩인을 인터뷰한다. 세 사람은 모두 현재의 홍콩에서 아이를 키우는 30~40대이다. 영화가 촬영된 시점은 2019년부터 2020년, 다시 말해 시진핑 정부의 보안법 시행을 반대하며 벌어진 홍콩민주화운동과 코로나19 팬데믹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세 사람의 인물을 차례대로 인터뷰하기 전, 홍콩 인근 바다에서 촬영한 영상과 함께 감독의 내레이션을 들려준다. 흔들리는 바닷물의 이미지, 그리고 그 위에 중첩되는 우산혁명부터 작년 민주화운동, 그리고 홍콩의 야경. 이 장면을 보며 떠오른 것은 작년 10월 시위에 참여한 한 중학생의 시신이 홍콩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다. 이들은 어떤 시공간을 살고 있는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대학생 주도의 운동이었다면, 홍콩의 민주화운동운 조슈아 웡을 비롯한 10대들의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영화의 세 주인공은 우산혁명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위를 이끄는 이들보다 윗세대이며, 그들의 바로 아래 세대가 될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 양육자다. 그들은 시위에 참여한 10대들이 부상당하고 죽는 모습을 목격한다. 사실 이 상황은 그들이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니다. 2003년 사스 위기 때도, 2014년 우산혁명 때도, 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앤슨 호이샨 막 감독이 세 명의 인터뷰이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은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혹은 두려움과 자유, 용기, 안정 등의 개념은 어떻게 관계되는가? 세 명의 인터뷰이와 감독이 내린 정의는 각각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의 말에는 모종의 용기가 숨겨져 있다. 죽음이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시공간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어떻게 다음 세대가 될 수 있는가? 이들에게 현재가 주는 두려움은 자신들의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닌, 아이들이 다가올 미래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예방접종 같은 것이다. <Fear(less) and Dear>라는 제목은, 두려움과 친애 사이에 위치한 지금 여기의 홍콩과 다가올 거기의 홍콩을 포괄한다.

<생존의 기술> 미나 케샤바르츠 2020

영화의 감독 미나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할머니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할머니는 조혼했고, 가정폭력의 피해자였으며, 자살했다. 감독은 1979년 이란혁명 전에 죽은 할머니의 이야기과 혁명 이후에 태어난 자신의 현재를 중첩시키며, 할머니에게 편지를 쓰듯이 영화를 전개한다. 이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이란에는 가정폭력 방지법을 비롯한 여성인권에 관련된 법안들이 통과되었었다. 이란혁명 이후 들어선 정권은, 이란혁명의 가장 중요한 참여계층이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에 존재했던 여성인권과 관련된 모든 법률을 폐기한다. 감독이 동료들과 함께 전개하는 가정폭력 방지법 제정을 위한 운동은, 혁명에 참여했던 윗 세대 여성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여러 차례 난관을 마주한다. 세계 여성의 날에 진행한 평화시위에서 활동가들이 체포되고, 가정폭력 피해 증언을 수집하는 데 난관을 겪으며, 활동가들이 스스로 겪은 피해사실 또한 존재한다. 실질적으로 법안을 비준하려는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하는 법들과으 충돌을 막기 위해 국회의원이나 남성 변호사들과도 협력해보려 하지만, 41년 동안 비준되지 못한 법안을 본 이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활동을 이어나간다. 이들이 활동을 이어나갈수록, 가족들의 얼굴들 속에서 좀처럼 선명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할머니 사진의 인서트가 점점 선명함을 갖춰간다. 미나를 비롯한 이들이 현재 전개하는 활동은 할머니가 죽은 당시부터 이어지고 있는, 그들의 생명권과 관련된 투쟁이며, 2020년 현재에도 전개되고 있다. 다소 정리되지 못한 인상을 주긴 하지만,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과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동시에 취하면서 과거에서 현재로 향하는 차별과 법적, 사회적, 문화적 퇴보의 역사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영화다.

<미나리> 리 아이작 정 2020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딸 앤(노엘 케이트 조), 아들 데이빗(앨런 킴)과 함께 도시에서 시골 아칸소로 이사 온다. 제이콥은 이 곳에서 미국에 이주해 오는 한국인들을 위한 한국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장을 시작하려 한다. 모니카는 그런 제이콥이 못마땅하지만 심장이 약한 데이빗을 돌보고 병아리 감별사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러던 중 두 아이를 돌보기 위해 제이콥의 어머니 순자(윤여정)이 아칸소에 도착한다. <미나리>는 교포인 리 아이작 정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아들 데이빗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험난한 미국 생활을 이어가는, 마치 미나리처럼 어디서든 강인하게 자라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나리>는 사건으로 가득한 영화는 아니다. 이들이 제이콥의 가족은, 물론 인종차별적 언행을 듣긴 하지만, 인종차별적 폭력의 피해자이지도 않다. 제이콥은 지극히 동아시아적인 가부장이지만, 그가 행하는 폭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저 "회초리 가져와"라는 대사 끝에 강아지풀을 꺾어 오는 데이빗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데이빗이기에, 영화는 이들이 겪었을 생존의 험난함과 폭력적이었을 상황들을 고스란히 담아내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그러한 상황의 분위기, 그리고 처절한 실패를 담아낸다. <미나리>에서 주목해볼만한 것은 그 실패다. 이들은 어떻게 실패하는가? 한국교회를 피해 도망친 이들이 모이는 시골에서 제이콥은 한국 농작물을 도시에 팔아 성공하려 한다. 그 꿈은 이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한국적인 이에 의해 저지된다. 착실한 아메리칸 드림의 예정된 붕괴를, 서로를 구원하고자 약속했지만 결국 뿌리에 발목잡힌 이들의 상황을, 이 영화는 보여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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