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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8. 2020

2020-10-28

1.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을 끝냈다. 아직 부산이지만 오늘 오후에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다. 17편을 예매해놓고 11편을 본... 머문 기간에 비해 역대급으로 영화를 안 본 영화제이지만, 나름 즐거웠다. 오늘은 영화제 외에 <소리도 없이>를 보고,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빌 비올라 전시를 봤다. 빌 비올라는 이름만 많이 들었지 제대로 작품을 본 적은 없었는데, 역시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 더글라스 고든의 <24시간 싸이코>와 같은 작품을 미리 선취하는 작품들이랄까? 영상의 물리적인 시간을 몇 배로 늘린다거나, 정지화면과 흐르는 화면을 동시에 보여주며 (디지털이 아닌) 비디오의 타임라인을 영상이미지 자체로 보여준다거나 하는 등의 작업들이 흥미로웠다.


2.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의 단평

<구름 위에 살다> 아오야마 신지 2020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나오미(타메 미카코)는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큰아빠 부부가 마련해준 고층 아파트로 이사한다. 구름 위에서 도쿄 시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곳에서 톱스타 토기토(이와타 타카노리)의 광고 간판이 보인다. 고양이 하루와 함께 살아가던 나오미의 앞에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토키토가 나타나고, 미묘한 분위기의 사건들이 이어진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나오미의 집은 그야말로 구름 위에 있고, 토기토는 건물 위에 놓인 간판의 이미지로 존재한다. 나오미의 큰엄마는 버블경제 당시 승무원으로 일했으며 당시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혼전임신한 나오미의 직장동료는 자신의 처지를 타파할 방법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계획한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중에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인물은 고층 아파트에서 주택을 개조한 출판사로 출퇴근하는 나오미 뿐이다. 영화는 나오미를 중심으로 하늘과 땅 사이, 가상과 실재 사이, 거짓과 진실 사이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토기토는 연기가 거짓 속에서 진실을 끄집어 내는 것이라 말하지만, 나오미는 진실 속에서 거짓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들이 살아가는 곳은 수많은 이분법 사이의 끼인 공간,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다. 톱스타와의 만남, 연기와 광고판, 짐도 채 풀지 않은 고층 아파트 등의 모습은 그러한 테마들을 가로지른다. 다만 영화가 주제를 보여줌에 있어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들을 산만하게 전개하고 있고, 그 산만함은 주제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킨다. 

<운디네> 크리스티안 펫졸트 2020

이 영화는 한 커플의 비극을 담아낸 멜로드라마이자 펫졸트가 자신의 삶의 터전인 베를린에 바치는 헌사다. 영화는 베를린 도시개발 박물관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운디네(폴라 비어)가 우연히 만나게 된 산업 잠수사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와 사랑에 빠지며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이들이 만나는 공간은 베를린의 어딘가이고, 그곳은 운디네가 일하는 박물관의 도시 모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메라는 종종 모형을 훑으며 두 사람의 행적을 그 위에 오버랩시킨다. 그곳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분단되어 있던 베를린의 역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운디네'가 신화 속 '물의 요정'임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물에 관한 영화다. 물은 흐르고 또 고여있다. 크리스토프는 저수지에 있는 터빈을 고치는 일을 하며, 저수지에 가라앉은 폐건물에서 'Undine♥'라고 쓰인 글귀를 발견한다. 물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동시에 물은 파괴적이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처음 만날 때, 카페에 있는 수조가 부셔지고 두 사람은 넘어진다. 운디네는 물에 휩쓸려 온 유리조각에 찔려 다치기도 한다. 두 사람이 이별하는 것도 결국 물 때문이다. 물은 그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나 역사(몇 차례 등장하는 거대 메기)와 같은 것일 수 있다. 동시에 물은 그것들을 집어 삼키고 파괴한다. 물 밖에 사는 이들은 물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물 속에 들어가고 물 속에서 사랑을 확인한다. 사랑, 역사, 운명, 약속, 만남, 그 모든 것은 물에서 시작되고 물 속으로 침잠한다. <운디네>는 그렇게 가라앉은 것을, 베를린이라는 도시 속에 침잠해 있는 것을 돌아본다. 

<친애하는 동지들!>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2020

영화는 1962년 구 소련 노동자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던 사건을 다룬다. 노동자의 국가여야 할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총에 맞아 쓰러지고 학살은 은폐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루드밀라(율리아 비소츠카야)는 투철한 지역 공산당원이다. 공장 노동자인 그의 딸은 물가는 올라가고 배급은 제한되는 상황에 반기를 들며 시위에 앞장선다. 루드밀라는 학살 이후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처음 당원 활동을 시작했던 스탈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스탈린의 시신을 레닌 옆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 흐루쇼프를 비난한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이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학살당했고 착취당했던 어떤 시절이다. <친애하는 동지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끔찍한 관료주의를 비판한다던가, 구 소련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강한 비판을 가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겨냥하는 대상은 구 소련보다는 지금의 러시아, 더 나아가 빠른 속도로 극우화되어가는 유럽 전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유럽(또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 전체)의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유럽의 과거를 끌어오는 최근의 경향을 답습한다. 가령 <스탈린이 죽었다!>나 <마틴 에덴> 같은 작품들처럼 말이다. 다만 <친애하는 동지들!>은 언급한 영화들만큼의 날카로움이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진 못한다. 학살 장면에서는 <화려한 휴가>라는 좋지 못한 예시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자체의 준수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와닿는 영화는 아니었던 이유다.

<재춘언니> 이수정 2020

영화는 콜트콜텍의 정리해고로 인해 30여년 간 일하던 기타공장에서 나와 복직투쟁을 이어가는 임재춘의 이야기다. 제목이 알려주듯, <재춘언니>는 '복직투쟁'보다는 '임재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복직투쟁 과정을 다룬 작품이기에, 이 영화는 투쟁과 연대를 다룬다. 하지만 그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깃발, 창공, 파티>, <보라보라>, <그림자들의 섬>처럼 투쟁과정에 동참하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영화들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재춘언니>는 차라리 <패터슨>에 가까운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 등장한 임재춘의 모습은 연극 [햄릿]을 공연하기 위해 오필리아 분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무대에서 대사를 읊고, 무대 뒤의 스크린에는 투쟁하는 임재춘과 동지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2007년부터 2019년까지 13년, 4464일 동안 이어진 임재춘과 동지들의 투쟁은 어느 순간 예술의 방식으로 전환된다. 임재춘은 연극도 하고, 글도 쓰고, 음악도 연주하고, 낭독도 하고, 예술 퍼포먼스에 참여하기도 한다. <패터슨>이 어느 노동자의 일상 속 예술을 발견하는 영화라면, <재춘언니>는 노동을 잃어버린 노동자의 투쟁과정,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투쟁에서 예술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임재춘의 투쟁은 예술의 재료가 아닌, 그의 삶에서 상호공존하는 무언가가 된다. <재춘언니>는 그 무언가를 담아낸다.

<스파이의 아내> 구로사와 기요시 117

구로사와 기요시가 하마구치 류스케, 노하라 타다시와 함께 각본을 쓴 TV영화이자, 그의 첫 시대극이다. 영화는 1940년의 일본 고베를 배경으로, 무역상인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가 만주를 여행하던 중 관동군의 생체실험을 목격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일을 진행하던 중, 그것을 알게 된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가 동참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이 <스파이의 아내>인만큼 영화는 사토코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의 카메라는 만주로 가지 않는다. 대신 유사쿠가 복제해 온 기록영상이 관동군의 만행을 보여줄 뿐이다. 유사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던 사토코는 우연히 그 영상을 보고 동참을 결심한다. 여기서 두 가지 관계가 교차한다. 코스모폴리탄으로서 국적과 상관없이 관동군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려던 유사쿠의 정의와, 유사쿠와의 관계를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며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정의라 생각했던 사코토, 두 정의는 공교롭게도 영화에 등장한 두 편의 8mm 필름을 통해 교차된다. 하나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가져온 기록영상이고, 하나는 유사쿠와 사코토가 함께 찍은 홈메이드 영화이다. 기요시의 말대로라면 예산부족으로 인해 세트장을 운용하면서 창 밖 풍경을 날리기 위해 조명을 쎄게 친 것이겠지만, 흔히 영화 속에서 스크린의 비유로 사용되는 창문이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빛과 같은 흰 색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유사쿠와 사토코의 집에 있는 모든 창문은 그 밖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거실에 설치된 스크린에 영사되는 8mm 필름의 이미지가 외부를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는 두 가지 외부 중 어느 것이 낭만적 거짓이고 어느 것이 참혹한 진실인지 이분법적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두 영상은 만주의 풍경을 담은 동일한 인서트 숏으로 시작된다. 태평양전쟁 직전의 일본이라는 불안정한 공기, 필름을 통해 전해진 관동군의 만행, 만주의 길거리를 담은 인서트 숏 다음엔 사토코가 주연을 맡은 픽션이 상영되어도, 만주의 참상을 담은 기록영상이 상영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때문에 유사쿠가 국제사회를 향해 떠나가고 홀로 남게 된 사토코는 기록영상 대신 자신이 출연한 픽션이 상영된 스크린 너머를 보려는 듯이 돌진한다. 결국 <스파이의 아내>는 스크린에 영사되는 무언가를 대면하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영화다.

<소울> 피트 닥터, 켐프 파워스 2020

솔직히 말해보자. <인사이드 아웃> 이후의 픽사는 실망 뿐이었다. <토이스토리4>는 전작들만 못했고, <카3>, <도리를 찾아서>, <인크레더블2> 등은 전작의 성공에 기대어 만든 익숙한 속편이자, 잘 만들어졌다 해도 전작의 업데이트 버전에 불과했다. 범-디즈니의 보수적 가족주의를 타문화에 외주한 것이나 다름없는 <코코>나, [던전&드래곤]보다도 낡아 보였던 <온워드>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다시 말해, <소울>과 피트 닥터 감독은 픽사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 없었다. 픽사의 신작들이 계속 흥행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들의 영화는 점점 그들의 전성기에서 멀어져 갔기 때문이다. <인사이드 아웃> 이후로 5년만에 피트 닥터가 연출한 영화 <소울>은 사후세계를 다룬다. 중학교 음악교사로 근근히 살아가던 가드너(제이미 폭스)는 우연한 기회로 유명 재즈 뮤지션과 협연할 기회를 얻은 날 사고사한다. '저 너머의 세계'로 가는 계단에서 얼떨결에 빠져나온 그의 영혼은 새로운 영혼들의 성격이 형성되는 공간인 '유 세미나'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수천년 째 지구로 가지 못한 영혼 22(티나 페이)를 만난다. 지구로 돌아가려는 가드너는 22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몰래 지구로 복귀하지만, 혼수상태였던 그의 몸에 들어간 영혼은 22였고 자신은 고양이의 몸에 들어가게 된다. 전작 <인사이드 아웃>만큼 간단히 요약하기엔 어려운 이야기지만, 영화 자체는 상당히 친절하다. 사후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지에 대한 청사진이 명확하게 그려지고, 그것에 대한 설명도 과할 정도로 친절하다. 문제는 가드너와 22의 영혼이 지구로 온 뒤의 이야기이다. 22에겐 어떤 '불꽃'이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영혼이 지구로 내려가기 위한 마지막 조건이다. 유 세미나에선 그것을 찾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다만 시각과 청각이 가능한 데 반해 후각, 미각, 촉각이 없다는 설정은 어딘가 이상하다) 하지만 22는 자신의 불꽃을 찾지 못한다. 그는 우연히 가드너의 몸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것을 찾는다. 살아있다는 것, 육체를 가지고 감각한다는 것, 오감을 충분히 활용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감각하는 것, 그것이 불꽃이다. 물론 꽤나 대책없고 나이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엔 특정한 목적이 없다는 것도 옳지만, 삶은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살아지지 않는다. <소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삶의 충만함을 예찬한다. 추상적인 형태의 사후세계와는 달리 사실적으로 묘사된 <소울> 속 뉴욕의 모습에서, 팬데믹의 시대에 쉬이 감각하기 어려운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마스크를 낀 채 옆 사람과 2m의 간격을 두고 영화를 보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소울>이 이번 관람만큼 좋은 경험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드너의 몸 속에 들어간 22가 감각하는 것, 신체를 통해 감각한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 자체의 예찬은, 고립과 분리의 시기에 독특한 감상을 부여한다. 


<눈물의 소금> 필립 가렐 2020

별로였다... 딱히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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