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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05. 2020

2020-11-05

1. 인디다큐페스티발과 영상자료원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된 [인디다큐 시간여행: 초-현실의 다큐멘터리] 상영작들을 이틀 정도만에 몰아봤다. 기존에 봤던 김응수의 <초현실>과 임철민의 <골든라이트>는 빼고. 그러고보니 문소현의 <완성된 몸>도 봐야하는구나. 어쨌든 정재훈의 <환호성>과 김경묵의 <나와 인형놀이>를 본 것만으로도 충만한 기획전이었다. 정재훈의 영화는 아직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 밖에 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환호성>을 보고 그의 작업이 무엇을 향하는 지 조금 더 명확해진 느낌이다. 종종 화면에 끼어드는 (사운드를 포함한) 의도적인 노이즈가 일깨워주는, 집-일터-집-일터의 고단한 루틴이 인상적이다. 김경묵은 올해 들어 아주 뒤늦게 작품들을 찾아봤었는데, 항상 억압되는 상태에 놓인 한국 내 성소수자의 상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번 인상적이다. <청계천의 개>에서의 뒤죽박죽인 서울의 풍경들은 <줄탁동시>의 주유소와 고급 오피스텔과 함께 어떤 덫처럼 작동하고 있는데, <나와 인형놀이>는 인물이 놓인 지정학적 환경(서울) 대신 정체성을 구속하려는 사회적인 시도들에 대한 대응들이 놓여 있다. 그의 중편, 장편영화들에서 서울은 탈주할 수 없는 공간이며, 탈주의 시도들이 현실의 자장 안에서 빈번히 실패에 가까워지는 것과는 다르게, <나와 인형놀이>에서의 인형놀이는 '놀이'라는 행위의 특징이 알려주듯 경계 밖으로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발판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난다.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김경묵의 새로운 단편 세 편이 상영되는데 각각 CCTV, 새, 기계를 다룬다. 어떤 내용일까? 


2. 백종관의 <순환하는 밤>의 가장 좋은 부분은 [햄릿]의 "To Be or Not To Be"를 "죽느냐 사느냐"라는 뻔한 번역 대신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말로 옮겼다는 점이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촬영한 흑백 필름 사진의 확대본의 이야기다. 사진의, 필름의, 흑백의 촬영대상은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 카메라는 자신의 앞에 놓인 촬영대상의 순간을 담는다. 특히 사진이 담아내는 것은 아주 짧은 찰나이며, 셔터를 누른 이후 카메라 앞의 대상은 어떤 식으로든 셔터를 누른 순간에 존재하던 그 대상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클레어의 카메라>를 떠올릴 수도 있다) 즉, 카메라는 자신 앞에 놓인 대상의 어떤 분기점을 만들어내며, 필름에 기록된 것은 대상 자체라기 보단 그 대상의 과거-현재-미래라는 타임라인 속 어느 분기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사진에는 촬영된 대상이 남아 있지만, 그 대상은 이미 사라진 것이기에 그 흔적은 흔히 말하는 유령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 흔적을 두고 흔적을 남긴 대상이 존재했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논한다. <김군>이 같은 테마를 한국 현대사의 측면에서 풀어냈다면, <순환하는 밤> 역시 공적, 사적 푸티지를 모두 동원하며 일종의 역사쓰기를 행하지만, 결국 영상에 드러나는 이미지에 담긴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한 일반론의 전개로 나아간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미지 속에 위치한 대상들이 거기에 있었음을 안다. 그 이전과 이후에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를 뿐이다. "어디선가 본듯한 모습이다"라는 시놉시스의 말은 그 존재의 이전과 이후 대신, 그것이 카메라 앞에 있었던 그 때에 국한된 말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이미지의 질문 앞에서 무언가를 대답할 수 있다. 


3. 어제 <내언니전지현과 나> 상영 이후 있었던 유운성 평론가의 토크 프로그램에서, 유 평론가가 온라인 가상 공간 내에서의 사진찍기(캡쳐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현실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행위는 찍고 나면 그 상황이나 사물이 없어지거나 변화하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 그것을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일랜시아]와 같은 온라인 가상 공간에서의 사진찍기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재현이 가능함에도 <내언니전지현과 나> 속 게이머들은 그것을 기념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이다. 즉, 이는 사진찍기 이후 사라지거나 변화할 어떤 상황과 사물을 담아내는 행위라기 보단, 사진 안에 등장한 길드원들의 커뮤니티라는 의미망 안에서 사진찍기라는 행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 평론가는 이를 설명하며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또한 온라인 가상 공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사진찍기라는 행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여기서 <레디 플레이어 원>을 끌어온다는 것 자체가 유효하지 않은 진단이라 생각했다. 물론 유 평론가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관람한 이후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영화는 [일랜시아] 내의 길드 단체사진과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MT를 떠나 촬영한 실제 기념사진을 중첩시키며 두 사진이 같은 지위에 있음을 드러낸다. (어제 상영본은 86분의 개봉판이며 내가 본 것은 71분의 영화제 버전이라 편집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방식의 기념사진은 사실 인스타그램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술자리나 모임에 부재한 누군가를 태그하며 기념사진 속에 누군가를 동참시킨다거나, 사람 대신 공간이나 음식을 찍고 그 위헤 사람들을 태그해 음식사진을 기념사진으로 변화시키는 행위. 사실 구글에서 적당한 음식사진을 따와서 사람들을 태그해도 어떤 모임을 가진 것으로 꾸며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일랜시아] 내에서의 기념사진은 손쉽게 재현내지는 복원 가능하다는 점에서 종래의 기념사진과 다르지만, 인스타그램 등에서 행해지는 '태그'라는 행위를 통해 (온라인 가상 공간의 캡쳐가 아닌) 기념사진을 생성, 재현, 복원,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실제 사진의 지위는 [일랜시아]의 기념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여기엔 @OOO이라는 '태그'가 사람을 재현하는 아바타와 유사한 역할에 놓인다는 것을 확실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4. 그나저나 15분 정도의 분량이 추가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어떨지 궁금하다.


5. 언젠가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론 비스무리한 것을 써봐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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