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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8. 2016

전쟁이라는 감옥, 어린 시절은 없다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데뷔작 <이반의 어린 시절>

 1962년에 나온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데뷔작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블라디마르 보고몰로브의 단편소설 『이반』을 각색해 만든 영화이다. 이반(니콜라이 버리아예프)의 평화로운 꿈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총소리에 폐허 속에서 깨어난 소년 정찰병 이반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지나 소련군의 진영에 도착한다. 당돌하게 상관을 불러달라는 이반의 요구에 갈트세프(예브게니 자리코프) 중위는 사령부의 콜린(발렌틴 주브코프)을 부른다. 오랜만에 만난 전우처럼 재회한 이반과 콜린은 전선으로 복귀한다. 이반의 보호자 격인 그라즈노프 대령은 이반을 후방의 군사학교로 보내려 하지만 이반은 이에 반발한다.


 흑백의 화면 덕분에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앙상한 나무들이 전부 검게 보인다. 4:3의 좁은 화면을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앙상한 검은 나무들은 탁 트이게 보여야 할 물가에 쇠창살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이반의 꿈속 들판과 해변과는 달리, 전장이라는 배경은 거대한 감옥처럼 보인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수용소에 붙잡혀 있다 탈출한 이반에게 전장은 그 자체로 감옥이다. 영화 속에서 총 3번 등장하는 꿈 시퀀스는 이반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전장에 갇히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족이 죽은 공간으로써, 꿈과 엔딩의 환상에서 등장하는 시야가 탁 트인 공간으로 갈 수 없는 이반의 상황이 공간적 배경을 통해 드러난다.

 타르코프스키의 <400번의 구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영화이다. 외부의 상황은 12살의 소년으로 하여금 ‘소년다움’, ‘아이다운 순수’를잃어버리게 만든다. <400번의 구타>에서 바람피우는 앙투안의 부모와 한 여자를 두고 지질한 대립을 보여주는 콜린과 갈트세프의 모습은 앙투안 및 이반의 모습과 묘하게 대비된다. 성인들이 짜 놓은 상황 속에서 탈주하거나 정면으로 맞서는 두 소년의 모습과 상황 속에서 지질한 모습을 보이는 성인의 모습의 대비는 그들이 소년에게서 뭘 빼앗아 갔는지를 드러낸다. 전쟁이 끝난 뒤 “이게 마지막 전쟁이겠죠?”라고 묻는 어느 병사의 질문 다음 이반이 처형당했다고 기록된 서류를 비추고 마지막 해변가의 환상 장면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엔딩은 전쟁과 혁명 이후 소련의 모습을 희망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소망처럼 느껴진다.


 소련 하면 떠오르는 감독은 역시 몽타주 기법을 완성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다. 컷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몽타주 기법이다. 소련을 대표하는 또 다른 감독인 타르코프스키는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몽타주 대신 롱테이크를 주로 이용한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며 이반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롱테이크들은 몽타주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미지를 전달한다. 프로파간다 영화들에서 주로 사용된 몽타주 대신 롱테이크를 사용한 타르코프스키의 선택은 기존의 영화들에서 탈피하며 전쟁영화임에도 애국 등의 프로파간다를 희미하게 만든다.

 아직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을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지만, 작품세계의 시작이 되는 영화로써 그의 다른 영화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노스텔지아>, <거울>, <솔라리스> 등의 작품들은 또 어떤 체험을 줄까?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있었던 타르코프스키 전에서 <희생>을 관람할 때 엄청나게 졸아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기억 때문에 다시 접근하기 힘들었던 감독인데, 이번 기회에 그의 작품들을 챙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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