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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16. 2020

세계를 응시하는 복수의 눈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정여름 2020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서울독립영화제(11/26~12/4)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본 글은 웹진 크리틱-칼에 투고되었음 (http://www.critic-al.org/?p=6197)

 

 그라이아이(Γραῖαι)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데니오, 에니오, 펨프레도 세 노파의 이름이다. 메두사의 언니이기도 한 이들의 이름은 각각 ‘무서운’, ‘호전적인’, ‘놀래키는’이라는 뜻을 지닌다.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은 하나의 눈을 돌려 끼우며 살아간다.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이하 <그라이아이>)은 행군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선전영화 푸티지와 함께 그라이아이를 설명하는 시퀀스, 그리고 하나뿐인 눈구멍에 눈알조차 없는 자유의 여신상의 3D모델링 이미지와 함께 시작된다. 여기서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호전적인’ 에니오이다. 영화 속 내레이션에는 ‘전쟁의 신’으로 표현된다.


1. 촬영 없는 영화

 <그라이아이>의 엔딩크레딧에는 ‘촬영’이 없다. 영화는 3D모델링을 비롯해 선전영화, 애니메이션, 위성지도, 뉴스 인터뷰, 시트콤, SNS 캡처, 게임 플레이 녹화영상 등의 푸티지로 채워져 있다. 그중 핵심이 되는 것은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고]의 게임 플레이 녹화영상이다. 해방촌에 거주하는 정여름 감독은 집 인근에 있는 미군기지는 [포켓몬고] 내의 지도는 물론, 국내 포털사이트의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공공시설이나 역사적 장소 등이 등록되어 있는 [포켓몬고] 내의 ‘포켓스탑’이나 ‘체육관’을 통해 미군기지 내의 시설물을 엿볼 수 있다. 포켓스탑이나 체육관은 다수의 유저의 선택을 받아야 지정될 수 있으므로, 미군기지 내에 포켓스탑이 존재한다는 것은 용산 미군기지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포켓몬고]를 플레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여름 감독은 스마트폰 GPS를 해킹해 미군 기지 내에 있는 40여 개의 포켓스탑을 찾아낸다. 영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벽으로 막혀 있어 들여다볼 수 없는 곳. 포털사이트의 지도에는 가상의 녹지로 표현되어 있는 곳. 정여름 감독의 내레이션은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 때의 폭죽 소리를 통해 미군기지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고 언급한다. 미군기지는 그곳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대신 현실의 지리학을 따르는 [포켓몬고] 속 가상의 조형물이 미군기지 내 실제 조형물을 지시할 뿐이다. 촬영 없는 영화인 <그라이아이>의 방법론은 여기서 출발한다. 감독은 용산기지 내부에 잠입하여 그곳에 존재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는 대신, 유튜브와 SNS 등을 뒤져 찾아낸 푸티지들의 조합을 통해 용산기지라는 존재에 다가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촬영 없는 영화나 미디어아트는 <그라이아이>가 최초는 아니다. 최근 국내 영화제들에서 상영된 작품들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찾을 수 있다. 우주인의 <밤낮>이나 이병기의 <이마무라 쇼헤이 입문> 등의 작품은 영화를 위해 새롭게 촬영된 영상이 없거나 매우 적다. 이들의 영화를 채우는 것은 샹탈 에커만의 <잔느 딜망>, 이마무라 쇼헤이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푸티지들이다. 혹은 나선혜의 <8mm>처럼 우연히 발견한 캠코더 속 영상에서 영화가 시작된다거나, 구글 스트리트뷰를 활용한 박세영의 <Windowlicker> 같은 사례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게임 플레이 녹화 영상이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박윤진의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그라이아이>와 유사한 지점을 공유한다. 다만 이 영화들은 결국 ‘촬영한다’라는 행위에 주목한다. <이마무라 쇼헤이 입문>은 “이마무라나 오즈처럼 찍을 수 없는 나”를 이야기하고, <8mm>는 과거의 푸티지 위로 현재의 푸티지를 중첩시키며, <Windowlicker>는 가상 공간 속 붉은 점을 따라가는 가상의 카메라를 가정하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게임 밖과 게임 속을 잇기 위해 게임 밖을 촬영한다. <그라이아이>는 촬영이라는 행위를 전제하지 않는다. 정여름은 이미 촬영된 푸티지들을 모아 존재하지만 가시적이지 않은 세계의 입증을 시도한다. 


 <그라이아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의 몽타주를 통해 세계를, 역사를 드러내는 영화의 예시로는 당연하게도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을 떠올릴 수 있다. 고다르는 “역사를 쓴다는 것은 이미지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느닷없이 이미지들을 서로 근접시켜 불꽃 같은 섬광을 촉발하는 것이다. 이 불꽃이, 발터 벤야민이 원했던 그대로, 서로 근접하거나 멀어지는 별들의 성좌를 구축한다”[1]라고 말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역사는 과거를 선형적으로 수집하고 묘사하는 행위와 무관하며,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환기하는 운동과 지금의 인식 속에서 구축하는 지금의 운동이다.[2]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을 가능케 하는 것을 ‘변증법적 이미지’라 부르는데, 벤야민은 이를 이미지가 어떤 특정한 시대에 이르러 가독성을 얻게 된 때, 즉 비평적 지점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사용한다.[3] 다시 말해 고다르의 작업은 다양한 영화, 회화, 문학 이미지들을 관조하고 몽타주함으로서 변증법적 역사의 운동을 포착한다. 


고다르는 몽타주를 “사물들 사이에 관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을, 어떤 상황을 보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라이아이>의 몽타주도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용산 미군기지를 드러내는 뉴스나 유튜브의 이미지, [포켓몬고]의 포켓스탑 이미지, 가상의 녹지로 뒤바뀐 포털사이트 지도 서비스의 이미지, 애니메이션과 SNL, 시트콤의 이미지. 이 이미지들은 분명 용산 미군기지를 두 눈으로 보게 하는 것에는 실패한다. 미국 청소년의 일상을 다룬 시트콤이 실은 그것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트럼프로 분장한 알렉 볼드윈의 연기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트럼프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용산 미군기지 병사들의 일상을 보여주어 이들의 향수병을 제거하기 위한 영상물이나, 리포터들이 기지 내의 미국 프랜차이즈 식당들을 찾아가는 뉴스 푸티지들은 ‘미국처럼’ 꾸며진 용산 미군기지 내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라이아이>가 인용한 뉴스 푸티지에선 미군기지 내의 패밀리 레스토랑인 ‘텍사스 로드하우스’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의 매니저는 미국 텍사스처럼 꾸며진 이 공간에서 용산 기지의 병사들이 미국을 느낄 수 있고, 미국의 텍사스 로드하우스를 찾은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식사하면 미국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용산 미군기지 속 가상의 미국은 미국이라는 느낌을 제공한다. “디즈니랜드는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임을 은폐하는 것”이라는 보드리야르의 유명한 말은, <그라이아이> 속 푸티지 사이에서 역전된다. 미국이 아닌 곳을 가상의 미국으로 뒤덮는 것은 무엇을 은폐하는가? 가상의 미국을 통해 미국을 느낄 수 있다는 진술은 외려 미국이 시뮬라크르의 세계임을 폭로한다.


<그라이아이>의 몽타주들이 탁월한 지점은 가상을 중첩시킨다는 점에 있다. [포켓몬고]의 지도와 포털사이트의 지도를 맞붙이는 몽타주는 용산 기지를 뒤덮은 가상들의 중첩을 폭로한다. [포켓몬고]의 지워진 지도와 지도가 지워진 구간에 떠 있는 포켓스탑, 국내 포털사이트 지도 서비스에서 용산 기지를 뒤덮은 가상의 녹지, 그리고 가상의 녹지가 용산 기지 이전 이후 시민공원이라는 이름의 실제 녹지로 전환될 것이라는 뉴스, 공간의 왜곡된 위상(topology)을 보여주는 구글 어스 이미지. 이 이미지들은 몽타주를 통해 서로를 마주하고, 몽타주는 용산 기지를 둘러싼 가상의 껍질을 벗겨내 불태운다. 즉 들여다볼 수 없음으로써 발생하는 용산 기지라는 가상의 아우라는, 직접 촬영되지 않은 푸티지들의 몽타주로 인해 파괴된다. 때문에 정여름 감독이 용산 기지의 존재를 새삼 느낀 것이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의 불꽃놀이 때문이라는 점은, 벤야민이 말하는 “재현의 광휘”, “작품 형식이 자신의 광도의 정점에 이르게 되는 작품의 연소 과정”[4]을 떠올리게 한다


2. 복수의 그라이아이

 한여름 밤의 풀벌레 소리를 듣고 저기 어딘가에 벌레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워 있는 동안 귓가를 스치고 간 모기 소리는 모기의 존재를 감각하게 해 잠을 깨운다. 정여름 감독이 불꽃놀이 소리를 통해 용산 기지의 존재를 새삼 다시 느꼈다는 진술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풀벌레나 모기의 존재를 듣게 되는 것과 같다. 신화 속 그라이아이는 하나의 눈을 돌려쓴다. 눈이 없는 외눈박이 노파는 소리를 통해 페르세우스의 등장을 알게 된다. 세 명의 그라이아이는 하나의 눈을 돌아가며 사용해 페르세우스의 존재를 알게 된다. 눈은 카메라다. <그라이아이>는 서로 다른 눈으로 촬영된 푸티지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의 화면을 녹화하고 캡처하는 가상의 카메라이기도 하고, 용산 기지를 비롯한 여러 미군 기지나 미군 또는 미국과 관련된 뉴스, TV쇼, 영화 등을 촬영한 실제 카메라이기도 하다. 복수의 카메라로 촬영된 푸티지들은 한 편의 영화로 엮이며 하나의 눈을 공유하는 그라이아이의 지위를 획득한다. 정여름 감독은 눈 없는 그라이아이로서 눈 있는 그라이아이(푸티지 촬영자)들이 목격한 실재를 끌어모은다. 


 벤야민은 카메라의 발명을 통한 기술적 복제기술이 멀리 있던 대상을 복제품으로 우리 앞에 가져온다고 말한다.[5] <그라이아이>의 푸티지들 또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지 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터뷰는 담장에 가린 기지 내부를 우리의 눈앞에 가져온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라는 표상으로 뒤덮인 미군 기지의 외피를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 것에 불과하다. 벤야민의 언급에서 현재화되는 것은 예술작품이며 그로 인해 예술작품의 가상이 지닌 아우라가 붕괴한다. 반면 <그라이아이>에서 미군 기지 내부를 담은 푸티지, 혹은 [포켓몬고] 속 포켓스탑의 이미지는 미군 기지를 구성하는 가상을 우리의 눈앞에 가져오며 가상의 아우라를 구축한다. 벤야민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 아우라를 정의한다. 바로 담장 너머에 있는 미군 기지는 그곳에 출입할 수 없는 대부분의 시민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곳은 유튜브나 증강현실 게임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그라이아이의 눈은 포켓스탑과 게이머의 아바타를 제외하면 어떠한 지형도 지명도 알아볼 수 없는 공허한 대지를 보여줄 뿐인 [포켓몬고] 지도 화면의 카메라와 닮았다. 


 <그라이아이>를 수식하는 가장 흔한 말은 ‘촬영 없는 영화’다. <그라이아이>가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던 인디포럼2020의 프로그래머 조민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현실의 표면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카메라(촬영)가 제거된 영화”[6]라 <그라이아이>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라이아이>에 정여름 감독이 직접 촬영한 푸티지가 삽입되어 있다. 러닝타임 중반부 즈음 용산 기지의 외부 담장을 보여주는 푸티지들이 그것이다. 이 푸티지에는 [포켓몬고]에 등장하는 포켓몬들이 출연한다. [포켓몬고]는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현실의 이미지 위에 포켓몬의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덧씌운다. 때문에 정여름이 직접 촬영한 이 푸티지는 엄밀히 말하면 [포켓몬고]를 실행 중인 스마트폰 화면을 녹화한 것이다. 게임은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현실(용산 기지)와 가상(포켓몬)을 중첩시키지만, 이것을 찍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의 화면을 녹화해야 한다. 여기서 “현실의 표면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촬영은 정여름 감독의 몫이 아니라 [포켓몬고]의 몫이다. 


 누군가가 촬영한 푸티지들을 끌어 모으는 작업은 촬영을 촬영자가 아닌 게임에 넘기는 것과 유사하다. “나는 키노-아이다”라는 지가 베르토프의 말은 <그라이아이>를 위시한 영화들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어느 블로거는 이를 두고 “키노-아이보다 상위의 개념인 그라이아이를 마주하게 된다”[7]라고 쓰고 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는 어느 정도 수긍한다. 감독과 푸티지(의 촬영자)들은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마치 그라이아이가 하나의 눈을 돌아가며 사용하듯 서로의 키노-아이를 돌아가며 사용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의 키노-아이가 구축한 건축물이 아니라 복수의 키노-아이로 만들어진 이미지 더미다. 복수의 눈을 돌려 사용하는 복수의 그라이아이. 이들은 무언가를 촬영하는 대신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이미지들을 돌려 사용한다. 히토 슈타이얼은 키노-아이를 기반으로 베르토프가 역설한 ‘시각적 유대(visual bond)’가 “현재로 연결된 바로 이 링크”[8]라 쓰고 있다. 전 지구적 정보 자본주의 하에 벌어지는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의 유통이 시각적 유대를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베르토프는 세계 각지의 노동자들이 서로를 볼 수 있는 방법, 즉 서로 다른 신념, 능력, 진실성 등의 요인을 각자의 언어로 기술하는 것을 키노-아이를 통해 공유하는 것을 시각적 유대의 정립이라 보았다. 슈타이얼은 이러한 시각적 유대, 노동자-관객 집단의 조직이 정보 자본주의를 통한 빈곤한 이미지의 유통이라는 비관습적, 우회적, 우연적, 불규칙적 방식으로 정립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라이아이>의 푸티지들은 슈타이얼이 정의한 빈곤한 이미지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빈곤한 이미지들처럼 유통되고, 발견되고, 몽타주된다는 점에서, 키노-아이의 시각적 유대가 아닌 그라이아이의 시각적 유대라 할만한 것을 구성한다. 그라이아이의 시각적 유대는 각자 기술한 이미지를 공유하는 것을 넘어, 각자의 눈을 돌려 사용하는 것이다. 나의 눈은 너의 눈이고 너의 카메라는 나의 카메라이다. 너의 영화는 나의 영화가 되고, 물론 나의 영화 또한 너의 영화가 된다. 다른 사람의 촬영을 통해 담장 넘어 보이지 않는 가상을 보게 되는 영화가 <그라이아이>다. 담장을 넘어오는 소리를 통해 가상의 존재를 감각할 때, 그것을 보게 해주는 것은 그것을 목격한 누군가의 눈이다. 때문에 눈을 돌려 끼우는 그라이아이는 빈곤한 이미지만큼이나 “현실에 대한 것”이다. 

 

3. 세계-이미지

 <그라이아이>의 여러 푸티지 중 식사를 하는 여러 부대의 모습을 담은 루니툰 애니메이션이 기억이 남는다. 보병대, 기관총부대, 자살특공대, 포병대 등의 각기 다른 부대들은 각자의 리듬에 맞춰 밥을 먹는다. 보병대는 행군하는 듯한 리듬으로, 기관총부대는 자동소총처럼 빠르게, 포병대는 떨어지는 포탄을 받아내듯이, 자살특공대는 우울하고 느릿한 리듬으로 음식을 먹는다. 들뢰즈는 명시적인 꿈의 상태와 명백히 구별되는, 몽상, 백일몽, 낯섦, 마법과 같은 상태를 통해 존재하는 상태에서 시지각적, 음향적 이미지는 세계의 운동으로 연장되고 있다고 말한다.[9] 그는 이를 꿈의 세계가 외면화되어 나타나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상정하는 운동이 아닌 세계 전체가 운동하는 것과 같은 세계-이미지라 말한다. 가령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의 뮤지컬 코미디 영화에서, 춤을 추는 이들의 몸은 춤이라는 운동을 시작하는 인물이 아닌 운동하는 세계에 올라타듯이 춤을 춘다. 혹은 자크 타티의 영화에서, 윌로 씨는 <트래픽>의 전람회장, <나의 아저씨>의 전기집, <플레이타임>의 대기실과 식당 등의 세계가 준비한 운동 위에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탄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라이아이>의 애니메이션 푸티지에서 병사들은 전쟁, 전투의 리듬에 올라탄다. 홀로 다른 리듬으로 식사하던 보병은 전우의 지적을 받고 세계의 운동 위에 올라탄다. 이들의 운동은 세계의 운동으로 규정된 리듬일 뿐이며, 이들은 탈인격화된 시지각적, 음향적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탈인격화된다. 


 <그라이아이>의 첫번째 푸티지는 일제강점기 말에 제작된 선전영화 <병정님> 속 행군장면이다. 조선 청년들을 태평양전쟁에 보내기 위해 훈련시키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 속 공간은 용산 기지가 위치한 그 곳이다. <그라이아이>는 <병정님> 속 행군 장면을 가져온다. <병정님> 속 행군, 훈련 장면은 루니툰 푸티지의 애니메이션 병사들처럼 세계의 운동에 휩쓸린다. 이는 <그라이아이> 도입부에 삽입된 푸티지가 병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전쟁터로 떠나는 <병정님>의 마지막 숏이라는 점에서, <그라이아이>는 ‘병사들의 운동’보다는 이들이 올라탄 세계-이미지를 끌어오고 있다. [포켓몬고]를 통해 촉발된 영화는 용산 기지를 둘러싼 가상을 보여주는 푸티지는 정여름 감독의 내레이션에 맞춰 몽타주된다. 이 때 푸티지들이 정렬되는 리듬은 푸티지 내의 삽입된 사운드와 운동이 아닌 정여름의 내레이션, 푸티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오는 음향에 맞춰져 있다. 뉴스, 유튜브, [포켓몬고], 선전영화, 위성지도, 애니메이션 등의 푸티지는 기록의 역사로 구축된 하나의 건축물이나 기념비 대신 불규칙적, 우연적, 우회적 이미지들을 몽타주하며 세계-이미지를 구성한다. 


 <그라이아이>가 담아내는 세계, 향수병을 감추고 병사들에게 미국을 선사하기 위한 가상의 공간, 담장과 가상의 녹지로 숨겨진 장소가 담장 없는 실제의 녹지로 변경된다는 계획, 그리고 그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가상의 기념비(포켓스탑). <그라이아이>는 실제의 기념비를 기반으로 세워진 가상의 기념비라는 지점을 기반으로 가상으로 뒤덮인 실제의 장소를 가상의 공간을 통해 탐색한다. 때문에 <그라이아이>의 세계-이미지는 가상(들)의 세계의 운동이다. 전쟁을 감추기 위한 가상, 그 가상을 숨기기 위한 가상, 그 가상을 발견하게 해주는 가상, 가상의 녹지를 실제의 녹지로 덮겠다는 계획의 조감도라는 가상. 영화 후반부 구글어스를 통해 용산 기지 인근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지표면으로 수직낙하 하는 인공위성 카메라의 시선을 지표면 위에 놓인 시점으로 바꾸는 순간, 수많은 인공위성 사진 이미지로 구성된 가상의 지표면은 굴곡 없는 지형으로 실제 공간을 왜곡하던 자신의 속성을 드러낸다. 외눈박이 자유의 여신상의 외피를 둘러쓴 에니오는 그 세계의 목격자이다. 관객은 다른 그라이아이처럼 에니오가 세계를 목격했던 눈을 다시 사용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지각-신체-행동으로 이어지는 감각-운동적 관계, 즉 운동-이미지의 유기적, 종합적 세계는 분산적, 불확정적, 불규칙적 세계를 ‘순수 시지각적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는 시간-이미지의 영화로 이행한다. 시간-이미지에서 시간이 운동에 종속된 운동-이미지와 다르게, 과거-현재-미래가 잠재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현재가 되어가는 혹은 될 수 있는 잠재적 이미지인 크리스탈-이미지(crystal-image)가 현재적 이미지와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들뢰즈가 오손 웰즈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만들어낸 철학적 전환이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이미지는 필름 영화의 시간-이미지와 다르게 실시간과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 거의 항상 아카이빙되고 있는 디지털 이미지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실시간으로 합성하고, 인간 신체를 중심으로 구축된 시간을 벗어난다. 즉, 디지털 이미지의 시간은 필름과 인간 신체의 물질성을 벗어나 지속적이고 즉각적인 변형과 변화를 가능케하며, 여기서 지나가는 현재와 지나간 과거를 잡종적으로 분리되고 결합한다.[10]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는 그 자체로 과거와 현재를 분별없이 뒤섞어 놓는, 시간의 공간화인 아카이브와 같다. 그렇다면 이 아카이브에선 무엇을 선택해 정리해야 하는가?


4.

 우리는 에니오의 눈을 주목해야한다. 고다르는 정보값을 남기지 않은 이미지들을 몽타주하여 역사적 몽타주의 방법론을 만들었다. 이미지에서 정보의 탈색. 가령 마이클 베이의 <13시간>에서 잘라낸 폭격과 전투의 푸티지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이미지북>에 삽입된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저택 앞에 쳐진 철조망은 맥락에서 분리되어 나치의 철조망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정보값의 삭제는 몽타주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부여받는다. 반면 에니오의 눈을 통해 <그라이아이>에 삽입된 푸티지들은 정보값을 유지하고 있다. 내레이션이나 자막은 그것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것은 소거되거나 탈색될 수 없는 정보들이며, 정여름 감독은 그것을 재배치해 세계-이미지를 구성한다. 과거와 현재를 잡종적으로 보여주는 디지털 이미지들은 용산 기지라는 가상적 공간에 잠재된 세계를 드러낸다. 수많은 이들의 눈구멍을 거쳐 에니오의 눈구멍에 도착한 눈은 그 세계를 바라본다. 


 히토 슈타이얼은 역사적 방법과 고고학적 방법에 대한 푸코의 말을 인용한다. 푸코에 따르면 전자는 과거의 기념비들을 기록으로 변화시키고, 사건들을 그 사건의 부재를 가리키는 흔적으로 바꾼다. 반면, 후자는 기록을 기념비로 변화시키고, 기록들의 특정한 배열에 의해서 어떤 지식의 건축물이 생겨나는지를 연구한다. 슈타이얼은 아카이브가 두 방법을 결합하고, 기억하면서 또 그만큼 망각한다고 말한다.[11] <그라이아이>는 두 방법을 오간다. 기념비를 바라보며 시작된 영화는 기념비가 가리키는 흔적들의 층위를 탐구하고, 선택된 몇몇의 기념비가 용산에서 평택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니오는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유의 여신상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의 결과이자 전쟁을 지속하는 기념비이다. 호전적인 에니오의 눈은 세계 곳곳의 미군 기지를 통해 전개되는 전쟁을 보는 눈이다. 기념비들에서 출발한 <그라이아이>는 기념비에 붙은 이름과 형상을 재해석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외눈박이 에니오가 되듯, 해적은 침략자가 되고 훈장은 살인면허가 된다. 기념비는 기념비를 기록한 기록들로 해산되고 재배열, 재해석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라이아이>나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 <이미지북>처럼 이미 존재하는 푸티지들을 발굴 및 재발견하여 영화를 제작한 사례의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언급한 최근의 한국 단편영화들 외에도, 캐나다 도슨 시티 영구동토층에 묻혀 있던 필름들을 우연히 발굴하여 얻은 푸티지들로 구성된 빌 모리슨의 <도슨 시티: 얼어붙은 시간>, 수많은 영화 속 로스엔젤레스라의 재현을 쫓아가며 도시의 주체성, 객체성, 건축, 공공운수, 인종주의 등을 성찰하는 톰 앤더슨의 <로스엔젤레스 자화상>, 미 해군에 의해 압수된 필름 기록 대신 진주만에 대한 영화나 뉴스 등의 푸티지를 끌어와 할아버지의 기억을 복원하는 레아 타지리의 <역사와 기억>,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KBS 아카이브의 수많은 푸티지를 동원한 이태웅의 <모던 코리아> 연작을 떠올릴 수 있다. 많은 아카이브 푸티지 기반의 영화들은 푸코의 분류에서 고고학적 방법을 택한다. <도슨 시티: 얼어붙은 시간>은 발굴한 푸티지들을 통해 도슨 시티와 북미 영화사(史)의 선형적인 역사를 써 내려간다. <로스엔젤레스 자화상>은 “Los Angeles Plays Itself”라는 제목처럼 로스엔젤레스라는 도시가 영화의 배경에서 스스로를 캐릭터화하게 되는 역사를 분석한다. <역사와 기억>은 개인의 기억을 공동의 기억을 담은 푸티지들을 결합해 복원해내고, 반대로 <모던 코리아>는 공동의 기억을 특정한 테마 아래에 묶어낸다. 역사, 장소, 기억은 아카이브 영화라 할 수 있는 여러 영화들에서 기념비 혹은 기억의 궁전에 자리잡는다. 


 반면 <그라이아이>는 익숙한 아카이브 필름에서 벗어난다. 영화는 정여름 감독의 기억이 아니라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어느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윙윙거리는 소리를 통해 모기의 존재를 감각하고, 형광등을 켠 뒤 모기를 잡기 위해 방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또는 모기가 앉아 있을 만한 위치를 노려보는 것과 같다. <그라이아이>는 감각한 것의 원인을 탐색하는 수단으로 복수의 그라이아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그것은 기록을 기념비로, 기념비를 기록으로 만드는 과정의 방법이다. 영화를 하나의 건축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아카이브 영화들은 푸티지들의 집합을 통해 어떤 형상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대개 수많은 재현과 기록 속에서 건져낸 형상이다. 반면 <그라이아이>가 그려내는 형상은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것, 재현되지 않던 것, 가상의 것이다. 실체라고 부르기엔 카메라(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몸이 없다. 용산 기지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홀로그램 같은 것이다. 거기에 있다고 감각되지만 거기에 있지 않은 것. 


용산 기지를 지시하는 이미지들은 망각할 것과 기억할 것을 구분한다. <그라이아이>의 방법론은 그것을 재배열함으로써 비가시화되어 우리가 망각하게 된 것을 다시금 감각하게 한다. 과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이 잡종적으로 출현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아카이브는 종종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의 감각을 무화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가상은 당장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을 저 멀리 있는 것으로 덮어버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기념비는 망각되고 누락된 기록의 아카이브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기록들은 기념비의 파편들을 모아 누락된 것의 흔적을 지시한다. 때문에 <그라이아이>는 공간화된 시간, 기억의 궁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담장으로 가려진 아카이브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폭파시킬 섬광을 만들어내는 몽타주다. 기록을 축조하는 것과 축조된 기록을 해체하는 방법론의 이중화는 아직 망각할 것과 기억할 것으로 구분되지 않은 이미지들을 감각하게 한다. 그곳에 존재하는 가상의 신은, 관객이라는 그라이아이에게 세계를 목격한 눈을 넘겨주기 위해 주둔하고 있다. 


          


[1] http://derives.tv/le-cinema-a-ete-l-art-des-ames-qui/

[2] 이정하, “<영화의 역사(들)>(고다르)의 벤야민적 역사인식과 역사서술 방식”, 영상문화콘텐츠연구 16집, 2019, 215p.

[3] 이러한 벤야민의 사유는 [반역가의 과제]의 ‘번역 가능성’이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과 같은 개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인식비판적 서론,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외, 서울: 도서출판 길, 2008, 153p.

[5]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기술적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서울: 도서출판 길, 39~96p.

[6]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906

[7] https://blog.naver.com/archona121/222055676394

[8] 히토 슈타이얼, 김실비 역,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스크린의 추방자들,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8, 59p.

[9] 질 들뢰즈, 이정하 역, 시네마2 시간-이미지, 서울: 시각과 언어, 2005, 123p.

[10] 정헌, 들뢰즈의 시간-이미지와 디지털 미학, 현대영화연구 Vol.33, 2018, 157p.

[11] 히토 슈타이얼, 기록과 기념비-아카이브의 정치, 진실의 색, 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9, 49~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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