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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8. 2020

사라지지 않을 것들에 대하여

<8mm>, <이별유예>, <실>, <우리가 꽃들이라면>

*이 글은 지난 12월 26~27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씨네미루의 [사라지지 않을 것들에 대하여] 상영회에서 배포된 글입니다.


 기록은 기억하는 행위다. 다만 기록=기억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SNS에 공유하고, 잊어버린다. 기록은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업로드 후 24시간 뒤에 사라지는 인스타스토리와 같은 SNS의 휘발성 기능의 흥행이 이것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곧 사라질 기록이라도 그것을 SNS에 업로드하는 행위는 기억해야 할 것이 포화상태인 상황에서 어떤 기억 혹은 추억들을 SNS라는 외부적 장치로 배출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러 SNS에서 ‘n년 전 오늘’이라는 기능을 통해 사용자의 과거를 끌어오는 것은 이 행위를 강화한다. 즉 스마트폰과 SNS를 비롯한 우리 주변의 기록장치들은 외재화된 기억의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이는 굳이 스마트폰과 SNS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 존재해왔던 것이다. 각자의 공책에 기록되던 일기부터 일상적인 사진, 비디오의 발명 이후 등장한 수많은 홈비디오 또한 기억의 네트워크를 구성해온 기록장치들이다. 우리가 항상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의 보급이 이를 급격하게 확대했을 뿐이다. 


 그림, 문자, 사진 등 여러 기록장치들이 존재했지만 영화의 등장은 그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사건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기록한 시간이 1초에 24장의 사진을 보여줌으로써 나타나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이론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영상에 담긴 것이 영상의 러닝타임 동안 카메라 앞에 실재했던 대상이라 여긴다. 때문에 영화는 기록하지 않으면 곧 사라질 지금 여기의 시간을 기록하는 장치다. 유튜브를 통해 100여년 전에 촬영된 영상들을 보고 있자면, 다시 복구될 수 없는 어떤 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특정 상황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 또한 유사한 행위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복구되거나 재현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재현되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기념사진 혹은 영상이 촬영된 시점과는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무엇인가를 촬영한다는 것은, 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대상의 지금 여기를 기록하는 행위다. 70~80년대 한국영화를 보며 당시의 도시풍속을 발견하는 민족지학적 연구나, 90년대 액티비즘적 독립영화들의 아카이빙을 통해 당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연구하는 것 등의 방식이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네마테크에 아카이빙 된 과거의 영화들을 되짚어 보며 연구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물론 시네마테크와 영화제들이 아카이빙된 영화들을 특정 주제에 맞춰 상영하는 것이나, 빌 모리슨의 <도슨 시티: 얼어붙은 시간>처럼 발굴된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을 역사로 조립하는 작업들에서 기록장치로서의 영화의 기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최근 등장한 한국의 독립영화들은 개인의 홈비디오는 물론, 홈비디오와 유사하지만 더욱 손쉽게 대량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스마트폰의 사적인 사진과 영상들, SNS나 유튜브 등 온라인에 업로드된 영상, 뉴스와 같은 기존 매체 및 스마트폰 게임과 같은 새로운 매체 등을 통해 공개된 영상 등을 끌어온다. 이는 기록, 기억의 네트워크가 사적, 공적 영역으로 양분될 수 없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것들이 픽션과 논픽션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어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채 촬영된 이미지들로 구성된 작품보단, 자신 혹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주로 가족이나 공동체)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사적, 공적으로 촬영된 이미지의 정리되지 않은 아카이브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굴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버블패밀리>, <개의 역사>, <웰컴 투 X-월드>, <94’ 비디오앨범>, <핑크페미>, <ㅅㅇ, ㅅㄹ, ㅅㅇ>, <옵티그래프>, <공사의 희로애락>,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내언니전지현과 나>, <사랑 (사이) 깍두기> 등의 논픽션 영화들을 이러한 예시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IMF, 세대론, 젠더이슈, 유년시절, 가족관계, 폭력, 역사, 노동, 미군기지, 온라인 게임, 우정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해낸다. 물론 이런 영화들이 지금에서야 등장한 것은 아니다. 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과 영화 자체의 분간이 무의미한 경순의 <쇼킹 패밀리>라던가, 최근 <사당동 더하기 33>으로 이어진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2> 등의 영화들도 존재해왔다. 다만 장단편을 가리지 않고, 최근 주목받은 여러 작업에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선혜의 <8mm>와 조혜영의 <이별유예> 또한 이러한 경향에 동참하는 작품이다. 먼저 <8mm>를 살펴보자. 나선혜 감독은 집에 방치되어 있던 8mm 비디오테이프 캠코더를 발견한다. 친언니가 대학시절 밴드부에서 사용하던 캠코더 속의 테이프에는, 밴드부의 공연과 일상이 기록된 영상 외에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어린 형제의 모습이 담겨 있다. 동아리방에 방치된 캠코더 속에 원래 들어있던 기록이다. 감독은 밴드부 멤버들을 찾아 캠코더 속 영상을 보여주고, 8mm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된 어린 형제의 정체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실패한다. 나선혜 감독의 카메라는 어린 형제의 정체 대신 그들의 기록 위에 덮어 씌워진 기록과 그것을 다시 대면하는 주변 사람들을 향한다. 그 과정을 위에 부모님께 “촬영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어떤 순간을 기록하려고 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 과정 끝에 마주하는 것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과거, 자신이 지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과 말들, 노래와 목소리들을 마주한 지금의 사람들이다.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각자의 대응은 다르다. 대학 시절 밴드 공연을 진행하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밴드부 멤버들은, 자신이 지녔던 과거의 열정과 생기를 추억하며 웃는다. 반면 즐거워 보이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감독의 친구는 울음을 터트린다. 자신이 기억하는 당시는 저렇게 즐겁고 웃음이 만개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때문에 카메라, 특히 <8mm>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아날로그 방식의 카메라는 촬영된 것이 카메라 앞에 실재했음을 증거하는 지표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과거의 자신을 마주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떤 시간이 자신의 기억과 다를 때의 간극 사이에서 오는 당황스러움이다. 게다가 그 순간이 촬영을 기대한 순간이 아니기에, 이러한 감정은 더욱 극대화된다. 감독의 어머니는 어떨 때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느냐는 질문에, 시간을 들이고 공들여 자신을 치장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고 대답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감독은 베트남에 살던 어린 시절의 사진들을 보며 그 시간을 회상한다. 카메라 앞에서 촬영된 준비를 마친 뒤 촬영되는 기념사진이나 영상은 분명 사진이 촬영된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다소 무차별적으로 촬영된 사진과 영상은 ‘촬영하다’를 의미하는 영단어 ‘shot’이 총을 쏠 때와 같은 단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영사기가 카메라의 구조를 뒤집은 기계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카메라에 촬영된 과거는 그것을 대면하는 현재의 자신을 잠재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이별유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는 조혜영 감독이 서울의 집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서울 집은 네모나지도 않고, 천장엔 누수의 흔적이 가득하고, 작은 창으로 검지손가락만큼 한강이 보이는 곳이다. 감독은 그러한 집이 서울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비슷하고, 자신의 삶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전주에 있는 본가와 부모님 및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본다. <이별유예>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삶의 흔적과 동일한 것으로 다뤄진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대신 자막을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데, 그 자막이 감독이 처음 제작한 영상이 담긴 8mm 테이프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즉 감독은 자신의 작품이 기록된 8mm 테이프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자신의 기록을 삭제함과 동시에 자신의 현상태를 기록한다. 다만 여기서 기록의 삭제는 단순히 기억의 삭제가 아니다. 8mm 테이프라는 물리적 매체를 활용해 삭제와 기록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유예 행위다. 무엇을 유예하는가? 집과, 가족과, 기억과의 이별을 유예한다.


 이별은 불가역적이다. 아무리 붙잡는다고 해도 이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다만 그 순간을 유예하려는 시도는 가능하다. <이별유예>는 그것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첫 작업물이 담긴 8mm 테이프 위에 낸 구멍들은 반사판의 빛을 통해 글씨로 인식된다. 기록에 구멍을 내어 지금을 기록하는 행위, 그것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 기록해둔 것과의 이별이 불가역적임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별해야 하는 자신의 현재를 가능한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감독은 아버지에게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전해준다. 운전기사로 일하는 아버지는 전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중 필름카메라로 무언가를 찍는다. 그것은 눈 덮인 터널, 언덕처럼 쌓인 자재, 황량한 도로, 교통체증이 벌어지는 고속도로 등이다. 어떤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촬영된 필름카메라 속 이미지는 현상 과정을 거쳐 되돌아온다. 사진을 찍을 당시 뷰파인더로 봤던 이미지는 현상된 결과물과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필름의 화학적 작용이나 뷰파인더와 카메라 렌즈 사이의 미세한 각도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촬영된 필름 이미지가 현상되어 되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거친 기억하는 이미지와 현상된 이미지 사이의 간극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지연의 과정, 유예의 과정에서 기억은 변화한다. 하지만 기록은 유지된다. 유지된 기록은 변화한 기억을 겨냥한다. 때문에 <이별유예>는 집, 가족, 기억이라는 재료에서 출발하여, 기록이라는 유예의 형식을 통해 삶 속에서 찾아오는 이별들을 붙잡아 본다. 


 그렇다면 논픽션 작업이 아닌 픽션에서는 기억-기록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조민재, 이나연의 <실>은 독특한 방식으로 기억-기록을 사용한다. 우선 이 영화의 주제는 노동이다. 영화는 창신동의 봉제 노동자 명선의 이야기를 다룬다. 사실 어떤 이야기를 담아낸다기보단, 명선을 비롯한 창신동 봉제 노동자들의 일상을 다이렉트 시네마의 문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보는 게 <실>에 대한 조금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이는 실제로 창신동에서 오랜 세월 노동해온 조민재 감독의 어머니 김명선이 영화의 주연으로 출연하며,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는 작업실 또한 실제 노동 현장이라는 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조민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배우를 따로 섭외하고 미싱 자문을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그 몸에 담긴 역사는 결코 따라 할 수가 없겠더라”라고 어머니를 배우로 섭외한 이유를 밝혔다. <실>은 감독의 말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영화는 명선의 작업실을 중심으로, 의상 제작 주문을 위해 작업실을 찾은 TV드라마 의상 디자이너, 근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된 동료 노동자, 창신동을 찾은 프랑스인 여행객 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명선에게 도움을 요청한 외국인 노동자 흐엉이 일하는 공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실>은 노동하는 몸의 기록이자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기록이다. 또한 명선의 작업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은 마치 스크린 앞의 장막이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지점에서 <실>은 노동에 대한 영화임과 동시에 노동을 기록하는 것에 대한 영화로 나아가기도 한다. 창신동은 전태일 열사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곳을 찾은 프랑스인 여행객은 제작한 옷의 사진을 찍는 명선과 그의 작업실을 카메라에 담는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동대문과 창신동 일대의 봉제 노동자들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만들어 유튜브에 업로드한다. 명선은 유튜브의 자동자막 기능을 통해 그 영상을 본다. 노동자가 아닌 이가 노동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간극을 낳는다. 프랑스인 여행자의 카메라에 담긴 명선과 창신동의 모습은 그가 언급하는 창신동과 동대문의 역사 속에 다소 매몰된다. 반면 영화 자체의 카메라는 좁은 작업실을 채운 명선의 몸과 그 몸으로 행해지는 노동과정을 ‘다이렉트하게’ 담아내고, 천을 자르는 그의 작업대 위에 창신동에서 벌어진 노동운동의 역사를 담은 영상을 영사하며 영화가 봉제 노동자의 노동 및 그것의 역사를 담기 위해 무엇을 찍고 있는지를 분명히 한다. 더불어 명선의 작업실이 영화 안에서 마지막으로 닫힌 뒤 등장하는 공간이 흐엉의 노동 공간이라는 점에서, 한국인 여성에서 이주민 여성으로 이어지는 창신동 노동의 역사를 특정 시기와 공간, 인물에 정박된 것이 아닌 연속되고 계속 흐르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 때문에 <실>은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될 수 있는 요소들을 공동의 기억의 네트워크에 기입하는 것과 같다.


<실>이 공적인 기억의 네트워크에 기록되는 것으로 영화의 기억-기록 작용을 다뤘다면, 김율희의 <우리가 꽃들이라면>은 다분히 공적인, 혹은 공공성의 영역에 놓인 기록의 방식을 사적인 기억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영화는 친구 사이인 두 소년의 이야기다. 상현은 친구 정우의 집으로 향한다. 정우는 시력을 잃었다. TV로 영화를 보는 상현에게 정우는 지금 어떤 장면인지를 묻는다. “그냥 서 있어”라는 무심한 대답에 정우는 마음이 상한다. 시력을 잃기 전의 과거가 멀게만 느껴진다는 정우에게, 이사를 앞둔 상현은 <우리가 꽃들이라면>이라는 영화의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을 제작해 선물하기로 한다. 이러한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아직 비디오로 영화를 보던 시기다. 상현은 카세트 테이프에 음성해설을 녹음한다. 극 안에서 상현이 제작하는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은 온전히 정우를 위한 것이지만(이 지점에서 영화는 꽤나 퀴어하기도 하다), 이는 원래 다분히 공적인 목적을 지닌 채 제작되고 유통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음성해설의 제작을 두 소년 사이의 사적인 관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위치시킨다. <우리가 꽃들이라면>은 이를 통해 공적 영역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일반을 평등하게 공유하는 방법으로써의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을 사적 영역으로 끌어오며, 두 소년 사이의 사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상현의 음성해설을 다시금 공적 영역으로 발산한다. <우리가 꽃들이라면>의 관객은 두 인물이 기억을 기록하고 감각하는 방식을 공유함으로써 이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즉, <우리가 꽃들이라면>은 다분히 사적인 기억과 기억의 정박지인 상현의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이라는 기록에 관객들을 동참시킨다. 이로써 두 인물 사이의 기억은 기록과 기록의 관람을 통해 재의미화된다. 


 언급한 네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와 형식을 지니고 있다. 기억, 기록, 이별, 가족, 공간, 노동, 역사, 여성, 감정, 우정(혹은 애정) 등 각각의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식도 다르다. 어쩌면 이들 영화를 하나의 테마로 묶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들은 기록이라는 작업이 일상화되고, 수많은 일상의 이미지와 대화가 저장되는 이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8mm>와 <이별유예>는 언제라도 다시 우리를 겨냥할 과거의 기억들, 기록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들은 단순히 잊힌 기억들의 재등장일 수도, 현재의 자신을 강타하는 잊고 싶었던 어떤 것일 수도, 드디어 청산할 수 있게 된 과거일 수도, 현재를 유예하기 위해 끌어올려진 과거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잊힐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두 영화는 사라지지 않을 그것들과 모종의 대결을 벌이며,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내려는 시도들이다. <실>과 <우리가 꽃들이라면>은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적절히 다뤄지지 못할 어떤 기억과 기록들에 대한 영화다. 두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각기 다르지만, 두 영화는 인물의 지금을 기록함으로써 그것을 역사적으로, 영화 밖으로 확장해낸다. 언뜻 사적인 영역에 놓인 단어처럼 읽히는 ‘기억’은 영화라는 기록을 통해 모종의 확장성을 지님을 두 영화는 보여준다. 이러한 확장은 <우리가 꽃들이라면>이 보여준 것처럼 두 인물 사이의 감정이라는 주제일수도, <실>이 보여준 것처럼 노동과 그에 기반한 우정과 연대일 수도 있다. 이러한 두 영화의 주제를 깊게 다루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다만 앞서 이어온 맥락 속에서 그러한 주제들을 두 영화가 기록하는 방식을 통해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두 영화가 기능하는 방식 <8mm>, <이별유예>와 유사한 선상에 놓인다. 


 많은 것이, 거의 모든 것이 기록됨과 동시에 기억에서 잊혀지는 시대다. 네 영화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각자가 다루는 것의 사라지지 않음을,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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