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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5. 2021

‘퀴어한 신체’의 불완전한 계보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학교 미술비평수업 과제로 작성한 글이다.


 지난 5월 8일 아르코 미술관에서는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귀국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가 열렸다. 전시에는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정은영 작가의 작품이 선보였다. 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은영 작가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이었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여성국극(女性國劇) 2세대 남역 배우 이등우(이옥천)이 연기를 위해 분장하고, 무대에서 연기를 펼치는 장면이 세 파트로 나누어 세 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다.(도판1) 그 옆엔 장막으로 둘러 쌓인 공간이 있다. 마치 거대한 댄스홀처럼 조성된 공간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서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의 본편이 상영된다.(도판2) 작품엔 네 명의 퍼포머가 등장한다. 오픈리 트랜스젠더이자 전자음악 뮤지션인 키라라,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의 연출가이자 배우인 서지원, 퀴어-페미니스트 접점으로써의 드랙문화를 선보이는 드랙킹 아장맨, 레즈비언 연극 배우 이리. 전자음악, 퍼포먼스, 드랙, 연극이라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네 명의 퍼포머는 무대와 퀴어한 신체라는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정은영의 작품은 남성중심적이며 가부장적, 이성애중심적으로 쓰여 온 한국 연극의 역사를 퀴어한 신체라는 키워드로 확장한다.


 여성국극은 정은영의 커리어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다. 때문에 여성국극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짚어 보고자 한다. 여성국극이란 창극의 한 갈래로서 연극의 한 장르이다. 일본의 가부키나 중국의 경극처럼, 19세기 중반까지의 창극은 주로 남성 배우들이 여성 역할까지 맡아 공연했다. 해방 이후인 1948년, 국악원에서 떨어져 나온 여성 연극인들로 구성된 여성국악동호회가 출범하며 여성국극이 시작되었다. 여성들만이 단원이었기에 여성국악인들이 남장을 하고 공연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다카라쓰라와 유사하기도 하다. 1948년 10월 창립공연을 마친 여성국악동호회는 인기를 얻게 되었고, 6.25 전쟁 중에도 공연을 이어갔다. 여성국극은 특히 많은 여성, 주로 가정주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쟁 이후 영화의 인기와 너무 많아진 여성국극단, 고루해진 표현방식 등을 이유로 60년대 초 여성국극은 몰락하게 된다.[1] 이러한 맥락 하에서, 여성국극은 전통, 근대, 젠더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맥락화된다.


 정은영은 2008년부터 진행해온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 여성국극 장르를 현대에 다시 소환한다. 이는 여성국극의 아카이브를 뒤적여 장르의 내부 서사를 연구하고 그것을 존중하며, 그것이 존재했던 당대의 시공간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정은영이 선보인 작품들은 그것을 넘어선다. 게이남성합창단 지보이스(G-Boys)를 코러스로 동원한 여성국극의 재해석인 <변칙 판타지>(2016)나 [올해의 작가상 2018]에서 선보인 <유예극장>(2018)은 이성애 남성 중심의 무대 공간에서 배제된 퀴어한 신체로서 게이남성합창단, 여성국극의 남역 배우, 가곡창자가 등장한다. 이들의 공연 또는 공연의 기록영상과 함께 전시되는 여성국극의 아카이브는 현재화된 시공간에 안착하고, 가시화된다.


 현재 생존한 여성국극 배우들은 여성국극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그것을 습득한 2~3세대 배우들이다. 여성국극은 한국 판소리 전통의 근간인 ‘구음전수’를 고수했기 때문에, 배우들이 여성국극을 습득한다는 것은 신체적이며 수행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정은영은 여성국극이 근대화를 거치며 발생한 일제강점기 말~해방 직후의 급진적 성정치를 끌어온다. 그는 여성국극이 채현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에로-그로-넌센스(에로틱-그로테스크-넌센스)’ 문화가 조선 대도시에 다다른 시기에 갈수록 심화되는 여성해방 및 여성신체 대상화의 얽힘, 그리고 여성의 역할과 운명이 국가의 역할 및 운명과 결부되었는지에 주목한다.[2] ‘에로 그로 넌센스’란 일반적으로 일본의 모더니즘 시대와 파시즘 시대 사이에 존재한 데카당트한 사조를 의미하며, 조선에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 대중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성과학에 대한 책, 누드사진, 사도-마조히즘적 소설 등이 당시 조선에서 출판되거나 수입되었고, 여러 신문에 선정적으로 보도된 성도착자, 동성애자, 성전환자 등에 대한 기사나 콘돔 광고, 성적인 내용의 잡지 삽화 등을 통해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3] 즉, 이 시기 ‘에로 그로 넌센스’는 그 이전엔 상상하지 못한 젠더적 타자들의 출현을 보여준다. 해방 이후 시작된 여성국극은 그 시작부터 근대화 및 민주화로 인해 변화의 역동에 놓인 여성의 역할과 운명을 체화하고 있다. 동시에 ‘구음전수’라는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전수 방법을 택한다는 점에서, 여성국극을 습득하고 공연한다는 것은 에로-그로한 신체의 습득과 수행이다. 또한 주로 여성관객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남역을 맡은 배우가 큰 인기를 얻자 무대 밖에서도 남성적인 행동을 이어갔다는 사실 등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직후까지 이어지는 ‘에로 그로’한 젠더 규범의 얽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의 네 퍼포머는 정은영이 여성국극에서 ‘에로 그로 넌센스’를 끌어온 결과와 같다. 트랜스젠더, 장애인, 레즈비언, 드랙킹이라는 네 퍼포먼의 퀴어한 신체는 작품의 본편을 보기 전에 관람하게 되는 여성국극 남역배우 이등우의 신체와 유사하다. 세 파트로 눠진 이등우의 퍼포먼스는 남역을 위해 분장하는 그의 모습과 무대에서 남역을 수행하는 모습으로 구성된다. 여성의 신체에서 남성의 신체로 분장하는 이등우의 모습은 여성국극의 가장 특수한 양식적 독자성을 보여준다. 이등우를 비롯한 여성국극 남역 배우들의 신체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독자적인 성별이다. 그들이 공연을 통해 재현하는 ‘남성성’은 언뜻 전형적인 남성성을 모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성성의 전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결국 여성국극 남역 배우들이 보여주는 무대는 성별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정관념이 안정적이며 고정적이고 정상적이라는, 그것을 수행하는 신체와 정신이 성별 고정관념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관념을 뒤흔든다.


 이는 곧바로 네 명의 퍼포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리고 작품 외의 개별적 활동으로 보여준 것과 연결된다. 키라라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트랜스젠더 음악가라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부단히 하고 있다. 주로 샘플링을 사용하는 그의 음악적 방법론은 끊임없이 전통, 규범, 역사, 매체를 부수고 재조립한다. 서지원은 장애 역시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정상성의 규범과 그 수행을 통해서 강제되는 개념이라 여기며, 예외적인 행위미학을 만들어왔다. 정은영의 전작에 출연하기도 했던 아장맨은 남성성을 공연하고 패러디하는 드랙킹 퍼포먼스를 이어왔다. 그가 재현하는 남성성은 남성에게만 전유되어 온 것들을 재전유한다. 이리는 연극씬에서 드물게 자기 젠더를 잘 연기하지 않는 배우다. 공연을 통해 커밍아웃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배역과 배우 간에 비판적 거리를 섬세히 취하고, 당사자성에 갇히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는다.[4] 네 명의 퍼포머가 각자의 커리어를 통해 실천해온 수행들은 전통과 역사가 만들어낸 정상성의 규범과 수행을 부수고, 탈주하고, 패러디하고, 거리를 둔다. 여성국극 남역 배우의 신체는 근대화와 민주화, 여성의 해방과 억압이라는 이중적인 역사의 얽힘을 체현하는 것으로서, 여성 또는 젠더 자체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페미니즘 미학을 보여준다. 네 퍼포머의 신체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자신의 신체에 덧씌워진 정상성의 규범을 뒤틀어 수행하며 젠더가 규범을 통해 수행된다는 주디스 버틀러에서 출발한 퀴어 이론, 퀴어 미학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정은영은 네 퍼포머와 여성국극을 연결한다. 이들이 기존에 해오던 작업은 여성국극 남역 배우의 여성도 남성도 아닌 ‘에로 그로’한 신체, ‘퀴어적 신체’와 맞닿아 있다.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은 단순히 이들의 기존 퍼포먼스를 가져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의 본편이 상영되는 장막으로 둘러 쌓인 공간은 여성국극이 공연되던 극장의 장막을 연상시킨다. 관객은 무선 헤드폰을 쓰고 그 안으로 입장한다. 거대한 스크린 앞에 텅 빈 공간이 놓여 있으며, 관객은 그 자리에 서서 작품을 감상한다. 작품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한 키라라의 음악적 특징, 그리고 제목에도 나와 있는 섬광과 잔상으로 가득한 영상 때문에 그 공간은 한때 유행했던 사일런트 디스코[5]를 연상시킨다.


 미셸 푸코는 “서로 구별되는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며,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반공간”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 ‘헤테로토피아’라 명명한다.[6] 사일런트 디스코는 헤테로토피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길거리에서,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어야 할 클럽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되는 사일런트 디스코는 장소의 기존 규범이나 규칙과는 상관없는, 혹은 그것에 이의제기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본편이 상영되는 공간은 이와 닮았다. 이 공간은 미술관의 규범을 파괴한다. 작품의 영상 내적인 내용 또한 그러하다. 작품 속에서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공간은 무대다.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수행되고 촬영된 이들의 퍼포먼스는 그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정상적인 신체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이 각자의 커리어를 쌓아온 공간, 가령 클럽, 소극장, 볼룸(Ballroom)[7] 등의 장소는 각자의 신체를 통해 수행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무대에 이식된다. 이들이 공연하는 순간, 무대는 한시적인 헤테로토피아로 변모한다.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관람하는 공간은 그러한 무대의 확장이다.


 여성국극이 공연되는 무대 또한 이와 같은 한시적 헤테로토피아였다. 그곳은 남성중심적인 창극과 국악계에서 떨어져 나온 여성들의 무대였고, 근대와 전통이 뒤섞인 에로-그로한 신체가 출연하는 장소였다. 구음전수를 통해 계승되던 여성국극의 짧은 역사는 아카이브라는 이름을 지닌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로 남진 못했다. 정은영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 구술사로, 현재에 다시 수행되는 여성국극 퍼포먼스로, 남아 있는 기록의 조각들로 여성국극의 불완전한 아카이브를 꾸렸다.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은 그러한 아카이브를 지속시키기 위한 불완전한 계보학이다. 큐레이터이자 연구자인 미유는 불안정성과 취향석을 인식하고 완화하는 일로서의 돌봄이 퀴어적인 사회적 형태들 중 하나이며, 여성국극 견습생들이 구음전수를 통해 ‘성별을 습득하는 일’, 그리고 여성국극 배우들과 정은영 작품의 네 퍼포머 사이의 암묵적인 세대 간 연대에 대한 특별한 주목이 돌봄행위가 돌봄의 급진적 네트워크로 변하며 집단적 변환과 지속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평가한다.[8] 여성국극이 에로-그로한 신체의 한시적 헤테로토피아들로 존재했다면, 정은영의 작업은 퀴어한 신체들의 한시적 헤테로토피아이며, 그 장소는 섬광과, 잔상과, 속도와, 소음에 의해 불완전하게 이어지는 계보의 아카이브이다.



[1] "여성국극(女性國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년 5월 27일 접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368.

[2] 정은영, “여성국극과 성별의 정치학”, 정은영 편, 윤수련 외 역, 전환극장, 포럼에이, 2016. 40-50p.

[3] 박차민정, 조선의 퀴어, 현실문화, 2018. 25p.

[4] 김정아, "INTERVIEW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미술세계 2019년 6월호 (2019): 84-88p.

[5] FM 트랜스미터로 전송되는 음악을 헤드폰을 통해 들으면서 춤을 추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스피커를 통해 크게 울려퍼지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일반 파티와는 달리, 참가자들은 착용한 무선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즐긴다.

[6]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역, 문학과지성사, 2014. 13p.

[7] 본래 저택 등에서 대형 파티나 연회가 열리는 공간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LGBT 커뮤니티가 댄스, 립싱크, 모델링 등을 혼합한 드랙쇼를 진행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볼룸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 및 대회, 이를 통해 구성되는 공동체 등을 통틀어 볼컬처(Ball Culture)라 부른다.

[8] 미유, “퀴어-페미니스트의 욕망과 돌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터틀북스, 2020. 97-98p.


참고문헌

단행본

김현진 외 9인,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터틀북스, 2020

박차민정, 조선의 퀴어, 현실문화, 2018

정은영 외 6인, 전환극장, 윤수련 외 4인 역, 포럼에이, 2016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역, 문학과지성사, 2014


정기간행물

김정아. "INTERVIEW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미술세계 2019년 6월호 (2019): 84-88.


웹페이지

"여성국극(女性國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년 5월 27일 접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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