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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9. 2021

<쇠사슬을 끊어라>에 대한 메모

*이 글은 금두운님이 제안한 '이만희 챌린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likeacomet/222228305746)


 이만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튀는 영화를 꼽으라면, 그가 쉼없이 작품을 생산하던 60년대가 지나 2년 가량의 휴지기를 가진 뒤 연출한 <쇠사슬을 끊어라>(1971)일 것이다. 이만희의 영화를 몇편 접하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휴일>(1968)이나 <삼포가는 길>(1975) 등의 작품을 떠올려 봤을 때 <쇠사슬을 끊어라>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는 작품이다. 정창화를 비롯한 액션영화 전문 감독들이 당시의 홍콩이나 일본 영화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영화들을 연출하던 와중에 이 영화의 액션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영화의 세 주인공이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에 뛰어들게 되는 대규모의 액션 시퀀스는 시대에 맞지 않는 총기와 지프가 등장하고 액션의 합도 어설프다. 많은 대사가 시시껄렁한 농담들로 가득하고,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1966)에서 고스란히 따온 캐릭터 설정은 상당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와 더불어 당시 쏟아지던 만주활극들이 그러했듯, 조선의 독립이라는 이미 결정된 결말을 상정한 뒤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듯한 대사(“우리에게 국적을 찾아줘서 고맙다”)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쇠사슬을 끊어라>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시류를 따라 흥행을 위해 값싸게 제작된, 남궁원, 장동휘, 허장강 세 스타가 무법자로 활약하는 모습을 조악하게 보여줄 뿐인 그저 그런 작품인가?


 할리우드에서 수정주의 서부극이 등장하며 이탈리아에선 스파게티 웨스턴이 등장했고, '만주활극' 혹은 '대륙물'이라 불리는 일련의 '만주 웨스턴' 영화들은 그 조류를 따라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들은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이 뒤섞이고, 독립군, 일본군, 마적, 러시아 백군, 야쿠자, 조선 깡패, 팔로군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하던 시공간을 다룬다. 즉, 이들 영화가 그려내는 시공간은 다국적이라기보단 초국적, 무국적의 시공간에 가까우며, 이는 <쇠사슬을 끊어라>의 세 무법자 마적 태호(장동휘), 청부업자 철수(남궁원), 일본군 밀정 달건(허장강)가 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박정희 정권 하에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애국심을 강조하는 듯한 민족 독립의 서사로 귀결된다. 하지만 <쇠사슬을 끊어라>는 만주활극 서사의 중심을 이루는 독립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다시 출발한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사는 세 사람이 모여 독립군의 명단이 숨겨져 있는 티벳 불상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를 "일본군의 연출"로 여기는 태호의 반응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철수가 호송되던 태호를 구하자, 태호는 그에게 “넌 고용된 배우지? 이런 유치한 연극은 단막으로 끝내는 게 좋아”라고 말한다. 이러한 뉘앙스의 대사와 상황은 몇 차례 반복되며, 일본군의 밀정인 달건의 등장 이후 티벳 불상을 찾기 위한 여정의 배후에 일본군 내지는 독립군이 있다는 이야기는 기정사실처럼 여겨진다. 즉, 태호의 대사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세 주인공은 일종의 역할극을 수행하고 있다. 각기 다른 방식의 무법자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티벳 불상을 사이에 둔 독립군과 일본군의 대립은 두 국적 사이에서 자신이 맡을 역할을 정해 수행해야 한다는 만주벌판의 규칙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세 무법자가 그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역할에서 탈주한다는 점이다. 신상옥의 <무숙자>처럼 그러한 대립항을 제거한 뒤 만주활극의 무국적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 또한 존재하지만, 이만희는 서로가 배신을 거듭하는 무법자들의 이야기와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대립을 동시에 진행시킨다. 이를 통해 영화의 무법자들은 두 국적의 대립 사이에서 이분법적으로 발현되는 민족주의나 집단주의에서 계속하여 탈주한다. 


 이는 영화에서 달건이 일본군의 밀정이라거나, 알고보니 철수가 애국지사라거나, 모든 것이 종료된 뒤 "국적을 찾아줘서 고맙다"고 독립군에게 말을 건네는 태호의 각성이 실은 <쇠사슬을 끊어라>를 만주활극으로 성립시키기 위한 일종의 의무방어전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계속 연극과 연기를 이야기하는 태호의 대사들처럼, 이 무법자들은 계속 무법자로 생존하기 위해 서사 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부여된 역할들은 이들이 한데 모여 만주벌판을 떠돌기 위한 구실에 가깝다. 다시 말해 <쇠사슬을 끊어라>가 독립군 서사를 통해 세 조선인 캐릭터에게 부여하는 국적성은 만주활극이라는 당대의 유행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탈주를 전제하기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태호와 달건이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둘 사이의 싸움을 갑작스레 시작한다던가, 패배한 일본군 장교가 할복에 실패하고 도망치는 것을 조롱하는 독립군의 모습 바로 다음에 "국적을 찾아줘서 고맙다"는 대사가 무색하게 철수 및 달건과 황야로 달려나가는 모습은, 무국적의 만주 땅에서 국적을 부여받은 이들이 다시 한번 무국적의 황야로 탈주하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쇠사슬을 끊어라>의 적절한 후계자는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이 아니다. 물론 <석양의 무법자>와 <쇠사슬을 끊어라>를 동시에 참조한 이 영화는 두 영화를 원작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이 끌어오고 있지만, 윤태구, 박창이, 박도원은 독립군과 일본군의 대립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 침몰하는 이들이다. 도리어 박노식의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7)를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류승완의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가 <쇠사슬을 끊어라>가 보여주는 탈주를 더욱 적절하게 계승한다. 류승완은 만주활극 속 쾌남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끌어온 다찌마와 리의 외양과 말투는 물론, 만주활극 영화들의 조악함마저 끌어오고 있다. <쇠사슬을 끊어라> 후반부의 설산 장면을 가져온 듯한 <다찌마와 리>의 스키 장면은 촬영지가 평창 용평리조트임을 감추지 않으며, 독립군 후원자들의 리스트가 담긴 황금 불상을 찾는다는 설정까지 가져오고 있다. 이런저런 설정들을 제외하면 두 영화의 가장 큰 접점은 독립군을 다루는 방식이다. <쇠사슬을 끊어라>가 의무방어전의 성격을 띤 독립군 서사를 끌어와 탈주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다찌마와 리>는 독립군 소속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단체로 애국가를 부르는 진풍경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맥거핀으로써만 활용하고 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일본군의 보물을 맥거핀 삼아 이야기를 추동시키며 세 무법자를 그 속에 침몰시켰다면, <다찌마와 리>는 독립군 서사를 일종의 맥거핀으로 기능하게 하며 그곳에서 탈주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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