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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11. 2021

‘자동 로그인’된 영화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과 <내언니전지현과 나>

※ 본 글은 2020년 10월 씨네미루 주최의 상영회 [게임, 가상, 영화: 처음 보는 영화들]에서 배포된 글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 제3회 독립영화비평상 문서비평 부문 당선작(장평)


 영화와 게임은 모두 허구적 세계를 다루는 영상매체다. 때문에 두 매체에서 다루는 세계는 곧 가상이다. 그중 영화의 경우 대부분은 실제 세계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가령 <기생충>(2019)과 같은 영화가 얼마나 실제 세계를 잘 묘사했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가 얼마나 실제 세계에서 멀어졌건 간에, 그것은 영화를 제작하고 관람하는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실제 세계에 기반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면서 일종의 지리학적 게임을 벌인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에 나온 서울과 의왕시의 곳곳이 실제 지리와 얼마나 다르게 표현되었는가를 짜 맞춘다거나, <기생충>의 촬영지를 관광지로 지정한다던가 하는 등의 놀이, 혹은 그것을 빙자한 뻘짓. 반면 게임이 그리는 세상은 대부분 새롭게 그려낸 곳이다. 거대한 오픈월드 게임이더라도 그 세계는 ‘평평한 지구’ 마냥 더 나아갈 수 없는 끝이 존재한다. 로스앤젤레스나 샌 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등을 모델로 삼은 [GTA 샌안드레아스](2004)는 나름의 유기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 세계는 결국 북미 대륙이 아닌 세 개의 거대한 섬으로 표현된다. 이는 두 편의 후속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레드 데드 리뎀션 2](2018)나 [호라이즌 제로 던](2017)처럼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할 정도로 광활한 세계를 구현한 게임들 또한 산과 바다로 막힌 한계가 등장한다. 영화에선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의 끝 너머를 상상해볼 수 있지만, 게임에서는 [마인크래프트](2009)처럼 거의 무한한 크기의 샌드박스 게임이 아니라면 그 끝 너머를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다. 게임의 지리학에서 지도 밖은 없는 공간이다. 그곳은 게임이 구현하지 못한 무(無)의 공간이며, 그렇기에 게임은 실제 세계를 모방한 허구적 세계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이나 비디오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쥬만지: 새로운 세계>(2017), 디즈니의 <트론>(1982)처럼 게임의 허구적 세계를 영화에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영화들은 여럿 존재해왔다. 이들 영화는 게임의 세계를 현실과 명확히 분리된 것으로 다루며 현실을 돌아가야 할 곳, 어찌되었든 우리의 신체가 존재하는 본래세계로 다룬다. <명탐정 피카츄>(2019)처럼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은 게임이 묘사한 허구적 세계 자체를 영화의 허구적 세계와 동일선상에 둠으로써 시작된다. 다만 이런 작업은 대부분 자본력이 뒷받침되고 할리우드, 미디어믹스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일본 영화계, 혹은 게임을 예술로 다룰 수 있는 제도적, 인식적 기반이 마련된 이들 등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은 게임이 묘사하는 가상세계와 현실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설정한 뒤 “가상이 아닌 현실을 살라!”는 보수적인 입장을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영화 중엔 이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장선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나 박광현의 <조작된 도시>(2017)과 같은 사례들이 드물게 있을 뿐이다. 다만 전자는 온라인 게임의 형식을 감독 자신의 전작 <나쁜 영화>(1997)에 이식한 수준의 범작이며, 후자는 온라인게임 내 클랜의 전략을 게임 밖에서 이어간다는 점에서 게임의 요소를 어느 정도 끌어오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 세계에서의 활동을 위한 동력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잠시 미술로 눈을 돌려보자면, 김희천의 <썰매>(2016)나 강정석의 <GAME I: Speedrun Any % PB>(2016), 송민정의 <AKSARA MAYA>(2019) 등이 눈에 띈다. 각 작업에서 김희천은 레이싱 게임 [그란투리스모4](2004)에 등장하는 맵으로 서울을 소급하며, 강정석은 자체제작한 게임을 실시간 스트리밍의 화면처럼 보여주며 그것의 속도감을 강조하고 관람하는 것으로써의 게임을 드러내며, 송민정은 유저들의 언어가 채집 및 재조합되며 허구적 세계를 구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는 하룬 파로키의 <평행 I-IV>(2012~2014)처럼 게임의 요소들을 뜯어보며 게임이 담아내는 허구적 세계의 구성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 작업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은 게임의 물리엔진과 그래픽이 묘사하는 포토 리얼리즘적 허구의 세계와 그것의 요소들을 탐구한다. 이들과 비교했을 때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자신이 연출한 영화 속 세계가 게임의 세계와 같은 지위의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영화들은 영화 속 실제 세계와 게임의 가상 세계 사이의 위계를 생성하고, 두 세계는 별도로 움직이는 이질적인 공간으로 다룬다. 정리하자면, 영화와 영화 속 게임의 세계 양쪽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오는 상황만을 다루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가?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기 있다"라는 보드리야르의 유명한 지적처럼, 우리가 아는 세계는 대상의 복제된 기호로 뒤덮여 있다. 즉 디즈니랜드와 같은 가상은 실제 세계가 가상임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상이며, 우리의 세계는 대상의 복제의 복제만이 남은 세계, 고도로 기호화된 세계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닌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 그것을 은폐하는 가상을 본다. 이 관점에서 영화의 ‘촬영된 현실 세계’는 게임의 ‘가상 세계’와 유사한 위치에 놓인다.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이하 <그라이아이>)은 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이태원 해방촌에 사는 감독이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고](2017)를 플레이하다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용산 미군기지 내에 포켓스탑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를 돌아다니며 포켓몬들을 잡는다는 설정의 이 게임은 증강현실을 통해 실제 세계 위에 가상을 중첩시킨다. 게임 내에는 아이템을 보급받을 수 있는 포켓스탑이 존재하는데, 이는 실제 세계의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기념비 등을 기반으로 위치 지어지며, 다수의 플레이어가 선택한 장소가 포켓스탑으로 지정된다. 때문에 용산 미군기자 안에 포켓스탑이 존재한다는 것은, 미군기지 내의 미군들이 [포켓몬고]를 플레이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표다. 카카오맵 등 국내 포털사이트 지도에는 녹지로 표시되는 용산 미군기지의 내부를 포켓몬고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그 내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이 발견한 기지 내부의 기념비는 대부분 전쟁, 제국주의, 그리고 미국과 관련된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무엇이 대한민국 용산에 위치한 기지를 미국으로 만드는가? <그라이아이>에는 촬영 크레딧이 없다.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포켓몬고]를 플레이하는 스마트폰의 녹화 화면, 선전영화, 용산 기지 및 평택의 캠프 험프리를 다룬 뉴스나 인터뷰, 전쟁을 묘사하는 루니툰 애니메이션, 카카오맵부터 구글어스까지의 다양한 지도 서비스 등의 이미지다. 그 중에는 기지 내부를 직접 보여주는 인터뷰나, 미군 병사들이 자신의 생활을 직접 설명하는 이미지도 섞여 있다. TV 리포터는 직접 기지 내부로 들어가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았지만 미군기지에는 존재하는 미국의 프랜차이즈 식당을 체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지 속을 보여준다고 그것이 기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지 인근의 도로에서 기지를 촬영한 이미지 또한 기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3D 모델링으로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될 기지의 조감도를 보여주는 이미지가 하나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기지의 미군들이 향수병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기지를 미국과 똑같이 만들어 두었다고 설명한다. 기지 안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텍사스 로드하우스의 직원은 이곳에서 식사하는 미군은 텍사스 로드하우스 미국지점에 있는 가족과 화상통화를 하며 저녁을 먹을 수 있고, 함께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미군은 미국과 다른 지형 및 토질을 지닌 한국의 땅을 개간해 미국에 있는 것과 유사한 골프장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수많은 영상을 통해, 혹은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두 눈을 통해 미군 기지를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한국에 위치한 미군기지라기보단 미국을 모방한 가상적 공간에 가깝다. 그곳에 놓인 기념비가 가상으로 뒤덮여 사라진 그 땅의 역사와 지금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기념비들은 [포켓몬고]를 통해 구현된, 현실의 지리학 위에 중첩된 게임의 공간 속 기념비(포켓스탑)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아닌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용산 미군기지와 <그라이아이>가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해 밝혀낸 미군기지라는 가상의 공간, 그리고 [포켓몬고]를 통해 현실 위에 중첩된 가상의 공간은 같은 위상에 놓인다. 1944년에 촬영된 선전영화의 한 장면부터 2019년에 녹화된 스마트폰의 게임 화면까지, 모든 이미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라도 무엇인가를 덮어쓴 허구적 세계의 이미지들이며, 그것들의 집합인 <그라이아이>는 세계가 가상임을 은폐하는 가상을 폭로한다. 이 영화는 용산 미군기지를 둘러싼 진실이라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혹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정책에 대한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비평에는 관심이 없다. 정여름 감독이 직접 쓰고 녹음한 내레이션은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불꽃놀이 소리를 듣고 용산 미군기지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고 말한다. 미군기지라는 이름으로 용산에 자리 잡은 가상의 미국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미군들이 타국에서 향수병을 느끼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진 가상인 것처럼, 가상은 자신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자신이 감추려는 것의 기호만을 내세운 채 비가시적인 자신의 존재를 감각하도록 한다. <그라이아이>는 그 감각에서 이물감을 느낀 감독이 가상의 영역 – 게임과 인터넷 – 에서 수집한 이미지들로 가상이라는 존재를 가시적 영역에 끌고 오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그라이아이>는 그리스 신화 속 ‘그라이아이’라는 존재를 빌어 비가시적인 가상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이미지)에 대한 픽션이다.


 물론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그라이아이>라는 작업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로 [포켓몬고]가 허구적 세계를 그려내는 대신 실제 세계의 지리학 위에 가상을 덮어씌우는 증강현실 게임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포켓몬고]의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의 위치와 크기는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박윤진의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는 그러한 지적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영화는 게임 대기업 넥슨이 세 번째로 출시한, 한국 게임의 ‘고전’ 중 하나인 [일랜시아](2018)를 다룬다. [일랜시아]는 [바람의 나라](1996)나 [메이플스토리](2003) 등 넥슨의 다른 흥행작과 같은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장르의 게임이다. [포켓몬고]가 게임의 세계를 실제 세계 위에 고스란히 중첩시키는 증강현실이라면, [일랜시아]는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때문에 게임 안에서 유저들은 많은 자유도를 부여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일랜시아]는 버려진다. 2008년을 마지막으로 신규 콘텐츠 업데이트가 멈추었고, 단순 패치마저 2014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쉽게 말해 넥슨은 [일랜시아]를 버렸고, 게임에 남은 것은 매크로와 버그, 그리고 극소수의 유저뿐이다. 박윤진 감독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게임에 남은 극소수의 유저 중 한 사람이다. 16년 동안 [일랜시아]를 플레이한 그는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하는 것일까?”라며 모두에게 질문을 던졌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유저들의 답을 담는다. 


 여러 인터뷰에서 박윤진 감독은 게임 속 캐릭터의 이름인 ‘내언니전지현’이 자신의 ‘본캐’이고, ‘나(박윤진)’이 ‘부캐’라고 말했다. 그와 그의 길드원들은 관성적으로 게임에 접속한다. 매크로를 돌리기 때문에 굳이 무언가를 ‘플레이’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게임에 접속해 있다. 이들의 인터뷰는 게임 밖에서도 진행되지만, 게임 내 채팅을 통해 진행되기도 한다. 심지어 넥슨의 다른 게임 [아스가르드](2003)의 유저를 인터뷰하기 위해 해당 게임에 접속하는 장면 또한 등장한다. [일랜시아]는 [마인크래프트]나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오아시스’처럼 무한한 확정성을 지닌 게임이 아니다. 업데이트를 멈춘 [일랜시아]는 12년 전의 모습 그대로 고정된 세계다. ‘내언니전지현’을 비롯한 길드원들은 ‘일랜시아’ 안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할 수 없다. 매크로가 난립하며 플레이어들은 정해진 루트에 따라 캐릭터를 육성하고, 일랜시아 세계관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혹은 게임 내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시간을 투자한다. 박윤진 감독은 [일랜시아]의 상황을 [일랜시아] 밖의 현실과 엮는다. 입시, 졸업, 취업 등의 정해진 루트가 있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한 루트를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 [일랜시아]라는 멈춘 세계는 일종의 도피처로 볼 수 있지만, 그보단 현실의 대응물에 가깝다. 지구에 떨어진 카오스를 피해 떠난 고대인들이 영력을 하나로 모아 일랜시아를 만들었다는 게임의 설정은, IMF 외환위기와 연관된 뉴스 화면을 보여주며 시작되는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대응물이다.


 ‘내언니전지현’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부차적인 존재로 두는 박윤진 감독의 인터뷰는 단순히 두 존재 사이의 역전된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 존재를 잇는 ‘과’라는 접속사는 어느 한쪽의 세계에서 다른 한쪽의 세계로 흘러나오는, 혹은 침범하는 상황들을 지시한다. ‘나’는 ‘내언니전지현’으로 접속하는 존재이며 ‘내언니전지현’은 ‘나’의 접속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시험준비를 위해 잠시 게임을 떠난 길드원 ‘로렐’이 로그아웃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접속을 끊는다는 것은 [일랜시아]의 세계에서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박윤진 감독이 인터뷰한 길드원과 유저 중에는 시험이나 노동 등의 이유로 잠시 게임을 떠났던 이들이 많다. ‘나’가 존재하는 실제 세계의 상황은 ‘내언니전지현’의 존재를 위협한다. 어떤 악성 유저는 자신의 캐릭터가 만난 다른 캐릭터들의 접속을 끊어버리는 ‘팅버그’를 통해 유저들의 게임을 종료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게임의 상황은 ‘나’가 [일랜시아]로부터 튕겨져 나오도록 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공존은 끊겨버린다. 이 상황을 해결한 운영진은 게임을 떠난 지 오래다. ‘나’는 행동에 나선다. 넥슨 본사를 찾아가고 넥슨의 노동조합인 ‘스타팅포인트’를 만나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나’의 시도는 성공하고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공존은 다시 시작된다. 두 세계는 서로의 상황을 주고받는다. 


 게임의 가상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접속이라는 절차, 현실과 다른 시야, 실제 사물과 다른 질감의 사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 배경음악과 효과음을 비롯한 장치들, 현실의 물리학과 지리학을 따르지 않는 가상세계의 규칙들. 그리고 이 요소들은 게임의 세계를 실제 세계와 다른 것으로 분리한다. 박윤진 감독을 비롯한 유저들이 [일랜시아]를 그리워하고, 그것에 향수를 갖는 것은 그것의 가상성 때문이다. 이들은 이 게임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다른 게임에 정착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한 유저의 말처럼 [일랜시아]의 도트 그래픽이 아름답기 때문일수도 있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일 수도 있다. 더 본질적으로는 [일랜시아]가 12년 간 변화하지 않는 세계, 그렇기에 유저들이 매크로 등의 방식을 동원하여 새로운 규칙을 세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많은 SNS 유저가 지금은 서비스를 중단한 싸이월드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일랜시아]는 새로운 집단적 향수의 공간이다. 해외로 파병된 미군 병사의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가상의 미국이 된 용산 미군기지처럼, [일랜시아]의 멈춰버린 세계는 유저들의 향수병을 달래 줄 가상의 세계를 구성한다. 영화는 [일랜시아] 안에서 ‘내언니전지현’의 길드 단체사진과 현실의 길드원들이 함께 한 MT 기념사진을 중첩시킨다. 이는 가상 세계 속의 운동을 실제 세계에서 구현하려는 욕망이자 놀이이다. 이들이 MT를 떠난 펜션 직원이 과거의 [일랜시아]를 즐겼던 사실을 이야기하자 길드원들은 맞장구를 치며 열광한다. 가상 세계에 대한, 그리고 그 세계로 하여금 충족되는 향수는 그 세계를 넘어 실제 세계에 당도한다. 게임 내 문제 해결을 위해 박윤진 감독이 넥슨 본사를 찾아간 것처럼, ‘나’와 인터뷰이의 인터뷰가 ‘내언니전지현’과 게임 내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진행되는 것처럼, 두 세계는 양쪽으로 흐르며 중첩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에 두 상영본이 있다. 하나는 2020년 인디다큐페스티발을 통해 처음 공개된 71분 버전, 다른 하나는 극장 개봉을 통해 공개된 86분의 버전이다.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이 공개 이후 재편집을 거쳐 개봉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고, 수많은 영화가 감독판, 확장판, 완전판 등의 이름을 달고 재개봉하거나 2차판권 시장에 공개되는 상황이기에 <내언니전지현과 나> 또한 그런 과정을 거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의 재편집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86분 버전의 <내언니전지현과 나>에는 71분 버전의 영화제 상영 이후의 사건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2차매체에 부가영상으로 공개되었을 법한 영상들이 <내언니전지현과 나>에는 하나의 영화로 묶여져 담겨 있다. 71분 버전의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수행하고 있는 것이 게임의 세계와 현실 사이의 위계를 지우고 두 세계가 서로의 상황을 주고받는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라면, 86분 버전에 추가된 장면들은 영화제에서 공개된 <내언니전지현과 나>라는 영화가 현실과 서로의 상황을 부고 받는 모습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서 파생된 여러 콘텐츠는 단순한 GV나 감독 인터뷰를 넘어 [일랜시아] 가이드 영상과 같은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1] 물론 오랜 시간 [일랜시아]에 머물러 있는 유저들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초기의 기획이 “16년차 고인물이 망겜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라는 홍보문구처럼 변했다는 지점에서, 유운성 평론가의 “편집이 바뀌는 과정에서 자기민속지적 친밀함은 다소 뻔한 저널리즘적 무용담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는데 이는 크게 아쉬움이 남는 부분”[2]이라는 지적 또한 유효하다. 하지만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86분 버전이 보여주는 ‘무용담’은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를 초과한 상황을 다시 영화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영화 내적으로 수행되는 게임의 세계와 현실 사이의 중첩은 다시 영화와 현실 사이의 중첩으로 이어진다.


 <그라이아이>와 <내언니전지현과 나> 두 영화는 게임의 허구적 세계, 가상세계를 현실의 열화된 버전이나 단순한 도피처로 다루지 않는다. 두 영화가 다루는 게임의 세계는 기호로 뒤덮여 이미 가상의 공간과 다름없는 현실을 드러내거나, 그것을 이미 자연화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 영화가 다루는 게임의 세계는 녹화되고 다른 영상들과 결합되어 영화의 허구적 세계를 구성한다. <그라이아이>는 현실의 지리학을 모방한 [포켓몬 고]의 세계를,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일랜시아]의 고정된 세계를 현실이라는 평면 위에 놓인 여러 대상들과 같은 층위에 놓는다. 이를 게임이 보여주는 세계를 굳이 현실의 세계와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PC의 보급화가 이미 진행된 상태에서 태어나 스마트폰을 일상적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 오프라인에서의 관계가 버디버디나 싸이월드 같은 초기 소셜미디어를 통해 단번에 온라인으로 확장되고, 온라인 게임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아가던 사람들. 때문에 [포켓몬고]의 지도는 현실의 지리학이 반영된 지도와 동일한 것으로써 감춰진 미군기지의 기념비들을 드러내며, ‘내언니전지현’의 인터뷰는 [일랜시아]에서도, 현실의 카메라 앞에서도 가능하다. 게임이 보여주는 가상 세계와 두 감독이 발붙이고 있는 현실 세계는 구분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로 기능하는 각종 디지털 디바이스들이 구성한 환경을 통해 이미 중첩되고 뒤섞여 있는 세계로 다가온다. 때문에 두 영화가 다루는 게임의 세계와 현실 사이엔 위계나 구분이 없다. 이는 두 영화가 게임을 다룬 여러 영화들이 현실에서 게임의 세계로 접속하는 과정을 중요한 스펙터클 중 하나로 다뤄왔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여러 인터뷰에서 박윤진 감독은 PC 카카오톡 자동로그인처럼 컴퓨터를 켜면 [일랜시아]에 접속한다고 언급했다. [일랜시아]에 자동로그인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박윤진 감독을 비롯한 길드원들의 모습은 [일랜시아]에 항상 자동로그인 하는 것과 같다. <그라이아이>에 등장하는 [포켓몬고] 또한 마찬가지다. 증강현실 게임이라는 특징 때문에, [포켓몬고]는 직접 걸어다니며 플레이해아 하는 게임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도보로 어딘가를 이동할 때 [포켓몬고]가 켜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정여름 감독이 용산 미군기지 내 포켓스탑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포켓몬고]가 실행중인 스마트폰을 대부분의 경우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게임의 유저들은 그곳에 항상 로그인 해 있다. 이들에게 접속이라는 과정은 <디지몬 어드벤처>(1999)나 <레디 플레이어 원>이 묘사하는 것처럼 화려한 스펙터클로 가득한 과정이나 그러한 스펙터클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접속이란 그들을 둘러싼 디지털 환경이 이미 또 하나의 자연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끝없이 재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라이아이>와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게임의 녹화화면과 촬영된 현실 사이의 위계가 없는 것처럼 이미지들을 다룬다 할 때, 이를 통해 디지털 환경에 자동 로그인된 이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재)발견하는지 드러난다. 때문에 두 영화는 게임(을 비롯한 현실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세계들)과 현실 모두에 ‘자동 로그인’된 이들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이며, 영화와 게임을 비롯한 온갖 이미지 기반 매체들에 항상 접속해 있는 경험의 기록이다.


          

[1]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배급사 호우주의보와 박윤진 감독의 유튜브 채널에는 영화의 홍보영상을 비롯해 “일랜시아 가이드 스페셜 영상 with 이길보라 감독” 등이 꾸준히 업데이트되고 있다. 또한 홍보영상 중엔 [일랜시아] 내에서 ‘내언니전지현’이 등장하는 새롭게 촬영된 영상들 또한 업데이트되고 있다. 


[2]

유운성. "유토피아의 기념사진". 「보스토크」. 42호. 2020, pp.22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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