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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12. 2021

정여름 개인전 <Happy Time Is Good>

 합정지구에서 진행 중인 정여름의 개인전은 용산과 원주의 미군기지를 다룬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전시장 1층에는 작년 여러 영화제를 통해 상영되었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 그것을 보완물인 <외딴 여행객 안내>, <Kill The Virus, Protect The Force>(부제 생략) 전시 중이다. 지하에서는 신작 < 복도> 상영된다. <그라이아이> 대해서는 작년에 글을   있다(critic-al.org/?p=6197). <그라이아이>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 통해 용산 미군기지를 우회적으로 들여다보는 방식이었다면, < 복도> 정반대의 방식을 취한다. 작품은 작가가 2020 미군기지 캠프 롱이 원주시로 69 만에 반환된 것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여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라이아이> 실제로는 진입할  없는 용산 미군기지를 현실의 지리학에 기반한 [포켓몬 ] 증강현실, 소셜미디어, 뉴스, 선전영화  온라인 가상공간에 퍼트려진 이미지들을 통해 ‘보지 않고서 보기 방법을 취한다면, < > 정여름 작가가 개인적 대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존나-보기 방식을 취한다.      


 <긴 복도>는 원주 캠프 롱의 내부를 담은 롱테이크로 시작된다. 캠프 내부엔 미군들이 붉은 페인트를 핏자국마냥 칠해둔 흔적들과 모든 집기가 빠져나간 뒤 남은 폐허와 같은 모습이 남겨져 있다. 언뜻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와 같은 포스트-아포칼립스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빛과 어둠은 화면에 등·퇴장을 반복하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폐허뿐이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폐허 어딘가에 적이 숨어 있을 것 같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그라이아이>가 증강현실을 통한 ‘보지 않고 보기’였다면, <긴 복도>의 첫 장면은 적진으로 돌격해야만 적들을 무찌를 수 있는 FPS 게임의 ‘존나-보기’의 방식이다. 작품엔 미군을 주인공 삼은 대표적인 FPS 게임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무전기 대화 사운드가 삽입되기도 했다.      


 첫 장면 이후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AI탐정이 다른 AI동료와 나누는 대화다. AI탐정은 아무것도 표기되지 않은 캠프 롱의 구글맵에 단 하나 표기되어 있는 장소에 주목한다. 그곳의 이름은 ‘Camp Long ATM’이다. 이어 등장하는 것은 괌, 일본, 키르기스스탄 등에 위치한 미군기지 내의 ATM, 은행, 환전소들이다. 미군기지는 단순히 군사적 첨병이 아니다. <그라이아이>가 미군기지가 세워진 공간이 본래 지닌 지리적 조건, 역사, 사용 방식 등을 초기화하고, 그렇게 생성된 텅 빈 영토에 가상의 미국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면, <긴 복도>는 그렇게 성립된 미군기지가 (실제로는 사라졌음에도) 가상공간에 남긴 흔적을 추적해 나가는 작업이다.      

 공교롭게도 캠프 롱은 작가의 조부모가 일했던 곳이다. 작품 속에는 이들이 남긴 메모, 이들이 살던 곳의 현재, 과거의 사진, 캠프 롱의 PX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 등이 등장한다. ‘이시도라’와 ‘페도라’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이들은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 미군은 기지를 세우기 위해 이들이 살던 집을 불태워버렸지만, 동시에 이들은 미군기지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의 터전을 불태워버린 것은 미국의 군사적 전략의 최전선에 놓인 캠프 롱이며, 동시에 이들에게 새로운 터전이자 ‘Happy Time’을 제공한 것은 ‘Camp Long ATM’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네트워크다. 실재가 사라진 뒤에도 남겨진 네트워크는 엉성한 글씨로 쓰인 일기 속 ‘Happy Time’을 생성한다. 군사적 침략에 뒤이은 자본주의 네트워크의 진출, 두 가지 상황은 이시도라와 페도라가 거주하던 곳의 시공간을 백지화한 다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기입한다.     


 전시장 1층에 놓여있는 소책자 <탐정으로서의 소견>에는 <긴 복도>에 미쳐 담기지 않은 이시도라와 페도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소책자에는 ‘도시 마더’라 불리는 것이 이시도라와 페도라에게 어떻게 병도 주고 약도 주었는지, 그럼으로써 이시도라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 군사적,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시공간적 좌표를 잊어버린 채 붕 떠 있는지 마치 소설처럼 서술되어 있다. 실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구글맵이라는 가상의 좌표에 영속적으로 남아있는 ‘Camp Long ATM’이라는 기표는 이시도라가 ‘행복’이라 여기는 공허에 다름없다. 미군기지는 폐허로 반환되었고, 이시도라와 페도라는 원주를 떠났으며, 그곳에 남은 것은 숲뿐이다. <긴 복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래픽 이미지, 모자이크 처리된 듯한 위성사진, 폐허를 지시하는 이미지들. <긴 복도>의 첫 장면은 그 폐허로 달려가 ‘존나-보기’를 실행에 옮기지만,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무엇인가 존재했다 사라졌다는 증거로서의 폐허뿐이다.     


 ‘Happy Time Is Good’이라는 이시도라의 일기 속 문장은 문자 그대로의 행복한 시간을 지시하지 못한다. 이시도라의 동어반복적이고 맹목적인 문장은 미군기지라는 거대한 군사적, 자본주의적 가상이 만들어낸 동질적인 시간에 대한 것에 가깝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긴 복도>는 그곳으로 달려갔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되돌아 나온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엇도 볼 수 없다는 사실뿐이며, 우리에게 끝까지 남아있는 이미지는 이시도라의 엉성한 글씨체가 보여주는 좌표를 잃어버린 행복한 시간이란 수수께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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