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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1. 2020

2020-12-20

1. 열심히 영화들을 몰아보고 있다... 돈 헤르츠펠트의 <월드 오브 투모로우> 시리즈는 그의 전작 <좋은 날>의 시간여행 버전 확장판처럼 느껴진다. <좋은 날>에서 단기기억상실증을 앓는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들을 떠올릴 때 그것이 현재라는 프레임의 평면에 펼쳐진 구멍처럼 묘사되는 것처럼, <월드 오브 투모로우>의 (과거-현재-미래의) 기억들 또한 에밀리 프라임(혹은 데이빗 프라임)의 현재라는 평면 위에 펼쳐진다. 얼핏 토니 스콧의 <데쟈뷰>가 그려낸 4일 전의 과거를 볼 수 있는 기술 같은 것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 헤르츠펠트가 현재 위에 구멍을 뚫어 보여주는 기억들은 시간여행 장르의 대표적 딜레마인 '할아버지 역설'을 재해석하며 끝없이 갱신되는 현재 자체에 인물과 관객을 붙들어 둔다. 즉, '할아버지 역설'에 따라 시간여행이 가능한 세계를 여러 개의 평행우주로 제시하는 대신 하나의 단일한 세계로 고정한 뒤, 그 세계의 중심에 머물러 있는 에밀리의 주변을 맴도는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그 중심축(에밀리)를 강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 결과 에밀리 주변에 놓인 과거~미래의 요소들은 에밀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구축된 태양계의 꼴을 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에피소드 1의 후반부에서 에밀리 3호와 함께 시간여행을 마친 에밀리 프라임이 너무 먼 과거로 돌아가버린다거나, 에피소드 3에서 세계의 타임라인을 영화의 필름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 뒤 프레임 사이로 들어가 작업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의 엇나감이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의 세계가 에밀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혹은 에밀리라는 중심으로 고이는 형태의 것이라면, 이러한 엇나감은 마치 태양계 밖에서 들어와 태양계를 순회하고 돌아가는 혜성이나 UFO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돈 헤르츠펠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에밀리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내일의 세계'가 곧 에밀리의 지금임을 보여준다. 


2. 히치코키언으로 유명한 브라이언 드 팔마 답게, 그의 최근작 <도미노> 또한 히치콕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그의 애정 외에는 딱히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채드윅 보스먼의 유작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에서 그의 연기는 놀라웠다. 아무래도 극본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보니 영화 자체도 채드윅이 연기한 레비와 동료들의 연습실 및 마 레이니의 녹음실을 배경으로 삼은 연극에 가깝게 느껴졌는데, 때문에 채드윅 보스먼의 짐승같은(?) 연기가 더욱 돋보였다. <Da 5 Blood>의 베트남전 참전군인에 이어 다시 한 번 미국의 역사에서 지워진 흑인을 연기한 그의 마지막 행보는 참으로 아이콘 다운 것이었다. 멜리나 맷소카츠의 <퀸 앤 슬림> 또한 넷플릭스에 있어서 관람했는데, 그가 왜 <캔디맨>의 리메이크(인지 속편인지 모르겠지만)의 감독으로 낙점되었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북미에선 작년 말에 개봉한 이 영화는 올해의 BLM 운동의 전개 양상과 매우 닮아있는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극 중에서도 언급되듯이 <보니 앤 클라이드>와 같은 전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전혀 다른 주제와 맥락의 작품을 매끈하게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보았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경찰을 죽인 뒤 도주하는 두 주인공이 마주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간단명료한 이 영화의 텍스트를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멜리나가 연출할 <캔디맨>이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원작은 백인 부르주아 지식인 여성이 우연한 계기로 흑인 공동체 내의 민담 속 살인마를 추적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1992년의 <캔디맨>이 당대의 흑인 공동체/사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을 제공했기에, 레메이크되는 <캔디맨> 또한 유사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본가가 누군지 찾아보니 국내엔 <레디 플레이어 원>의 H역으로 알려진 배우 겸 각본가 겸 연출가 레나 화이트였다. 


3.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스위트 홈>은 정말 더럽게 재미 없었다. 우선 음악 선곡이 정말 끔찍했고, 엔딩곡으로나 사용되었어야 할 비와이의 OST가 중요한 장면마다 흘러나오는 걸 듣고 있으면 어처구니가 없어지는데, 더 나아가 이매진 드래곤스의 '워리어'가 주요 액션 시퀀스마다 나오는 것은 작품의 나쁘지 않은 크리처 디자인 및 나름의 개성을 갖춘 캐릭터들을 모두 엿먹이는 것이었다. 원작 웹툰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드라마의 오리지널 캐릭터인 이경(이시영)의 캐릭터 정도만 인상적이었다. 사실 캐릭터보단 예고편 공개 때부터 화제가 된 이시영의 등근육(...)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였는데, 저정도의 코어근육이면 허리를 다칠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허리디스크 환자인 나는 그저 부럽기만 했다. 열심히 운동해야지... 어쨌거나 <스위트 홈>은 일종의 변종 좀비물/크리처물로 분류할 수 있을텐데, 좀비물처럼 전염되는 것이 아닌 괴물로 변하는 일종의 질병이 발현되는 방식을 택한다는 점 정도가 흥미로웠다. 물론 발현되는 계기나 시점이 너무 제각각이라 재미 없었지만... 예고편만 보면 한국판 <레지던트 이블>에 가까웠는데, 막상 까보니 크리처물 버전의 <타인은 지옥이다>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대로, 올해의 한국영화/드라마들이 보여준 폐허의 형상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급할 수 있는 작품군의 수를 늘려줬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할 지경이다. <사냥의 시간>부터 <반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사라진 시간>, <#살아있다>, <콜> 등으로 이어지는, 더 나아가 <킹덤>의 조선시대, <보건교사 안은영> 마지막화의 무너진 학교, <써치>의 비무장지대 등등... 


4. 개인적으로 올해는 처음으로 '지면'이라 부를만한 곳들에 글을 실었던 해였다. 여러모로 최악의 해였지만, 그것으로 인해 뭐라도 말을 얹고 싶은 사람과 지면들이 늘어나고 (나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 생각함) 그 덕에 몇몇 곳에 글을 실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튼 올해 글을 실었던 곳들을 정리해보자면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

기억의 시차를 넘어서기 위한 투쟁 -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올바르면서도 재밌을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 - <닷페이스> 디자이너 김헵시바 인터뷰 (녹취 및 정리로 참여)

여성 문화의 판을 바꾼다 - 소셜아트크루 <Eldorado> 인터뷰 (녹취 및 정리로 참여)

영화에서 발견한 ‘내일’ – 제 17회 EBS국제다큐영화제

공동체상영을 기획한다는 것 – '씨네미루' 첫 상영회

멀티플렉스의 영화 없는 영화관 활용법


[크리틱-칼]

‘퀴어한 신체’의 불완전한 계보┃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영화와 게임의 스침: 영화적 체험과 게임적 체험의 교환 가능성

세계를 응시하는 복수의 눈,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마테리알 3호]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독립영화잡지 Index 2호]

근원으로서의 데뷔작 



5. 대충 올해 재밌게 들은 앨범 100장 뽑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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