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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8. 2020

2020-12-28

1. 씨네미루의 두 번째 상영회 [사라지지 않을 것들에 대하여]가 끝났다. 원래 오프라인으로 진행하려 했으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온라인 상영회로 전환하여 진행되었다. 조민재, 이나연의 <실>, 김율희의 <우리가 꽃들이라면>, 나선혜의 <8mm>, 조혜영의 <이별유예>를 상영했다. 사실 상영회를 1월로 연기하고 싶었는데, 지원사업을 통해 진행하는 상영회라 기한 내에 예산을 써야해서... 온라인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지원금을 받는다 해도 왓챠나 웨이브 같은 기존 OTT 플랫폼을 쓸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때문에 비메오를 통해 제한적 상영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상영회를 진행했다. 150여분의 관객이 신청해주었고, 26일 정오부터 27일 자정까지 36시간 정도 상영이 진행되었다. 27일에는 ZOOM을 통해 GV를 가졌다. 확실이 오프라인 GV의 모더레이터를 맡는 것보다 더 긴장되고 어려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ZOOM 화면창의 관객들은 얼굴 대신 이름(혹은 닉네임)만을 띄우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도 알 수 없고, 감독님들에게도 어떻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 혹은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회의를 진행하는 것과는 다르게, 마치 라디오 생방송처럼 여백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GV를 진행해서 그런지 GV를 마치고 문자 그대로 뻗었다.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집에서 영화를 송출하고 이벤트를 진행한다는 것 사이에는 정말 큰 간극이 있구나...를 새삼 느낀다. 다만 지난 상영회에는 20여명 정도의 제한된 인원만 상영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7배 이상의 관객이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아무래도 온라인 상영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지난 상영회는 서울에서 서울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관객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면, 이번 온라인 상영회의 관객 중에는 수도권은 물론 부산이나 미국에 거주하는 분들도 계셨다. 물론 한 장소에서 영화를 보고 비슷한 경험공간 내에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은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영화 자체는 더 멀리 전달될 수 있었다. 씨네미루는 계속 상영회를 기획하긴 하겠지만, 코로나19가 잠잠해져 적어도 거리두기가 완화되기 전까지는 쉬기로 했다...


2. 상영회를 진행하면서 한창욱 평론가가 기획해 진행중인 [비평의 편지] 12월호의 글들이 떠올랐다. 이광호 필자와 김혜림 필자가 "집에서 본 영화, 영화관에서 본 영화"라는 주제로 나눈 편지였다. 두 필자의 편지들을 읽으며 마테리알 3호에 기고했던 글의 첫머리를 떠올렸다. 거기서 나는 여러 매체들을 통한 영화 관람 경험을 타임라인처럼 적어두었다. 영화를 보는 경험은 아무래도 파편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영화관람 경험의 독점적 지위를 가진다는 아이디어의 붕괴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 김혜림 필자는 편지의 시작을 아버지가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영화들을 관람한 경험으로 시작한다. 굳이 OTT 서비스의 부흥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영화관람 경험이 극장에 묶여있지 않은 역사는 짧지 않다. 더 확장해보자면, 처음 영화를 관람한 경험이 극장이 아니게 된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TV, 비디오, DVD, 블루레이, AVI/MP4/MKV파일 등등. 아예 처음 본 영상이 영화가 아닌 경우는 더욱 많다. 영화보다 유튜브를 먼저 접하는 시대니까. 떠올려보면 뉴스, 스포츠 중계, 연속극, 지금의 브이로그와 같은 일상의 기록 등은 원래 극장이 점유하고 있던 것이다. 때문에 TV부터 유튜브에 이르는 매체들로 영화가 분화되었다고 보는 게 조금 더 정확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89년의 로도윅은 파졸리니의 영화들이 비디오테이프로 출시된 것을 보며 영화의 종말을 느꼈다고 썼다. 반대로 말하면 비디오나 DVD, 혹은 유튜브나 OTT로 처음 영화를 관람한 이들은 영화의 시체나 폐허를 영화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영화들은 생명없는 시체였는가? 비디오, DVD, 온라인을 떠도는 파일들로 정전을 섭렵한 90년대~00년대 시네필들은 시체애호가가 되는건가? 물론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나도 새벽에 넷플릭스를 틀어두고 스마트폰으로는 게임과 트위터를 하곤 하니까. 하지만 극장에서의 영화관람이 꼭 영화에 대한 집중과 몰입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비평의 편지]의 두 필자가 적은 것처럼, 극장의 냉난방(김혜림 필자의 "극장 속 날씨"라는 표현이 재미있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거나 코를 고는 다른 관객(얼마 전 <원더우먼 1984>를 보는 내내 아이맥스관 A열에 앉아 스크린을 촬영하는 관객을 목격했다...), 팝콘이나 버터구이 오징어의 냄새 등을 떠올렸을 때 극장은 어떤 동일한 관람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단지 관람을 방해할 요소들이 비교적 통제되고 있는 공간일 뿐이다. 여기에 상영관마다 다른 상영환경(스크린 크기, 좌석의 배치와 편안함, 사운드 환경, 마스킹 여부 등)은 애초에 극장관람이라는 경험이 동질적인 것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때문에 김혜림 필자가 영사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편지를 마치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 또한 "내가 영화관에 있구나", "내가 영화제에 왔구나", "내가 필름으로 영화를 보고 있구나"를 가장 강력하게 느꼈던 순간은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사무라이 픽션> 관람 도중 필름이 녹아 끊어졌던 영사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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