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로드, 크리스 밀러 콤비의 레고 애니메이션 <레고 무비>
*스포일러 주의
그 동안 레고가 등장한 애니메이션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당장 IMdb에 ‘Lego’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십수 편의 영화와 TV시리즈가 등장하고, 유투브에는 아마추어들이 만든 브릭필름들이 가득하다.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바이오니클>시리즈처럼 비디오 시장에서 성공한 작품도 있다.(<바이오니클: 빛의 가면>이 공식적인 첫 레고 장편영화이다. <레고 무비>는 7번째) 그럼에도 워너 브라더스가 <레고 무비>의 제작을 발표했을 때 반응은 시원치 않았는데, 당시 장난감을 원작으로 만든 <지.아이.조>, <배틀쉽>등의 영화가 흥행과 비평을 모두 놓쳤기 때문이다.(갈수록 추락하는 <트랜스포머>시리즈까지, 죄다 하스브로 장난감에 유니버셜 제작이다) <레고 무비>역시 기획 초반에 엎어질 위기를 겪었지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21 점프 스트리트>를 슬리퍼 히트시킨 크리스 밀러와 필 로드 감독, 그리고 <레고 무비>의 공동 연출을 맡은 크리스 맥케이의 설득과 노력 덕분에 제작될 수 있었다. 경영진을 설득시키기 위해 크리스 맥케이는 영화의 주인공 에밋(크리스 프랫)이 <레고 무비>의 오디션을 보는 장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레고 무비>의 세계는 프레지던트 비즈니스(윌 퍼렐)가 만들어낸 설명서대로 작동한다. 그가 만든 설명서대로 건물과 탈 것들이 지어지고, 대도시부터 서부의 황야, 중세시대, 바다의 해적선, 우주의 모습까지 그의 생각대로 지어진다. 예언자 비트루비우스(모건 프리먼)는 언젠가 선택받은 자가 나타나 전설의 피스를 손에 넣고 프레지던트 비즈니스이자 레고월드를 멸망시키려는 로드 비즈니스의 계략을 막을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몇 년 뒤, 대도시의 평범한 건설 노동자 에밋이 우연히 전설의 피스를 얻게 된다. 에밋은 와일드스타일(엘리자베스 뱅크스)의 도움을 받아 그를 막으려는 로드 비즈니스의 수하 나쁜 경찰(리암 니슨)에게 도망치지만, 결국 그는 스페셜한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음이 밝혀지는데….
기존의 레고 영화들은 이미 출시된 제품의 세계관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거나, 기존의 영화/TV쇼/코믹스를 바탕으로 출시된 제품을 영화화한 영화들이었다. 전자의 예로는 <바이오니클> 시리즈(이번 영화에도 짧게 등장한다), 후자의 예로는 <레고 배트맨: 더 무비 – DC 히어로즈 유나이티드>등의 작품이 있다. 하지만 <레고 무비>는 제품으로 출시된 세계관도, 다른 작품에서 차용해온 세계관도 아니다. 단순한 대도시나 서부시대의 배경부터 배트맨, 슈퍼맨 같은 DC코믹스의 히어로들, 간달프, 덤블도어, 셰익스피어, 해적 등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무려 제작사가 달라 저작권상 출연이 불가능할 <스타워즈>의 한 솔로와 츄이, C-3PO까지 등장한다.(C-3PO의 목소리도 심지어 원작과 같은 배우) 결국 <레고 무비>는 다양한 대중문화의 요소들을 한데 뒤섞어 빚어낸 영화다.
이는 레고라는 장난감의 본질에 충실한 결과다. 우리가 레고를 사면 설명서가 들어 있긴 하다. 포장지 겉면에 있는 제작예시대로 만들 수 있는 설명서이다. 하지만 레고의 진짜 재미는 다양한 블록들을 모아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레고들 통한다면 DC와 마블의 히어로를 대결시킬 수 있고, 중세시대에 우주선을 가져다 놓을 수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블록과 상상력만 있다면 만들어낼 수 있다. <레고 무비>는 이런 레고의 특성을 마스터 빌더라는 설정을 통해 구현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은 마스터 빌더라고 불리며, 설명서대로 살아가는 에밋과는 다르게 레고월드의 블록들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기에 각 캐릭터의 특성을 부각시켜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마스터 빌더들과 설명서대로 만들려 하는 로드 비즈니스의 대립이 레고의 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영화의 결말부에 다다르면 에밋이 살던 레고월드는 어떤 남자(윌 퍼렐)의 레고 컬렉션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로드 비즈니스와 마스터 빌더들의 대립은 남자의 아들이 아빠의 레고 컬렉션을 가지고 자유롭게 놀던 결과이다. 아들은 레고 컬렉션을 아들이 망치지 못하도록 강력접착제를 통해 붙여버리려 했고, 아들은 그런 아빠를 로드 비즈니스라는 캐릭터로 만들어 하나의 스토리를 창작해냈다. 덕분에 <레고 무비>는 설명서대로 만들었을 때의 멋진 모습과 자유로운 창의력으로 레고를 가지고 놀 때의 즐거움을 동시에 잡았다. 아들의 마음을 이해한 남자가 아들과 함께 레고를 가지고 노는 마지막 장면은 <토이 스토리3>의 엔딩을 보는 듯한 감정까지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레고 무비>가 성인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이유가 있다.
또한 <레고 무비>는 뛰어난 코미디 작품이기도 하다. 크리스 밀러와 필 로드 감독의 첫 작품이 <21 점프 스트리트>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지점은 아니다. 다만 <21 점프 스트리트>보다 더 밀도가 높고 깨알 같은 개그가 많아졌다. 영화의 배경에서 단역 레고들이 보이는 행동들을 주목하면 더욱 많이 웃을 수 있다. 또한 <21 점프 스트리트>의 채닝 테이텀과 조나 힐이 각각 슈퍼맨과 그린랜턴으로 등장해 끝내주는 애드립을 선사하기도 하고, <데드풀>의 경우처럼 <스타워즈>, DC코믹스 히어로, <해리포터> 등 여러 대중문화의 작품들을 알면 알수록 더 재밌는 영화이다.
2014년 국내 개봉당시 배급사와 극장간 사이의 부율 문제로 CGV와 롯데시네마에서 개봉하지 못해 흥행에 실패했었다. 허나 북미 등 다른 국가에서의 흥행과 비평적 성공에 힘입어 어린이날 재개봉하게 되었다. 2017년 개봉할 스핀오프 <레고 배트맨>과 2018년 예정된 <레고 무비2>의 안정적인 개봉을 위해 극장으로 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