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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29. 2021

2021-01-29

1. 1월에도 영화는 많이 보지 않았다. 개봉작도 별로 없고, 넷플릭스 등에 공개되는 신작들도 땡기는 게 많지 않고... <블랙미러>의 찰리 브루커가 제작한 <가버려라, 2020년>은 너무나도 평이해서 2020년의 온라인 밈들을 뒤적이는 게 더 재밌는 수준이었다. 한참을 미뤄뒀던 <닥터 후> 시즌10과 스페셜 에피소드로 피터 카팔디를 보내주고 조디 휘태커의 <닥터 후>를 조금씩 보는 중인데, 각본이 뉴시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최악을 달리는 중이라 그만 볼까 생각하는 중이다. 가령 로자 파크스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반 고흐를 21세기 유럽 미술관에 데려다 놓는 뻘짓보다 게으르다. <익스플레인> 시리즈나 <하이스코어>와 같은 20~30분 가량의 짧은 러닝타임으로 제작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정보 프로그램들을 종종 챙겨보는데, 니콜라스 케이지가 MC를 맡은 <욕의 품격>은 즐겁게 보았다. Fuck, Shit, Bitch, Dick, Pussy, Damn 등 6가지 영어 욕설의 기원과 역사를 여러 심리학자, 역사학자, 언어학자, 사전 편집자 등과 함께 탐구하며, (아마도) 미국에서 공적으로 가장 욕설을 자주 사용하는 직군일 코미디언들의 이야기를 곁들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욕설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대중매체인 힙합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서 등장해 나름 즐거움을 주고, 욕설의 불분명한 어원을 쫓아가는 과정을 통해 욕설의 의미가 2020년의 시점에서 어떻게 재전유되어가는지 보여주는 과정은 다소 뻔하지만 꽤나 흥미롭다. <도시인처럼>은 보고 나서 아무 생각이 없다. 드디어 한국 넷플릭스에 공개된 <브루클린 나인-나인> 시즌6은 재밌었다. 다만 2020년 BLM 운동 이후 경찰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에 있어 제작진 전체가 고민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시즌8이 제작된다면 어떤 모습을 담을지 궁금하다. 찾아보니 제작 중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가을에서 2021년 방영으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시즌7은 언제 올라올까...


2. 나름 흥미롭게 보던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이 끝났다. 이 영화의 엔딩이 구린 것이 작가진 교체로 인한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런 식의 엔딩 - 마지막회에 기존보다 긴 러닝타임을 부여하고서도 큰 줄기의 이야기는 빠르게 매듭지은 채 못 다한 캐릭터들의 전사나 후일담을 PPL을 곁들여 길게 늘어 놓는 - 은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다만 <경이로운 소문>의 경우 정도가 지나치다고 느껴지는데, 듀나가 '의무방어전'이란 표현으로 여러차례 말해왔던 이야기의 정리와 속편 암시의 수준을 넘어서 16개의 에피소드 내내 짧게 언급만 되었던 것들(캐릭터의 사연, 후일담, PPL 등)을 이야기 이후에 얼른 처리해버리듯이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국내 5대 재벌인 최장물이 카운터들에게 간식이랍시고 '명랑 핫도그'를 사온다던가, "자신이 아끼는 애마"라는 대사 다음에 "역시 국산차!"라는 대사가 따라오고 기아 자동차가 등장한다던가, 카운터들에게 새 옷을 맞춰준다면서 파크랜드 양복을 맞춰주는 식의 장면들. 이들 장면은 그간 카운터를 후원하는 캐릭터였던 재벌 최장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 더불어 소문, 하나, 모탁, 매옥의 과거사를 하나씩 보여주는 것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보여주었어야 할 것을 이제서야 길게 늘여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의무방어전보단 사후처리에 가까운 엔딩이랄까.


3.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울>을 봤을 땐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관례상 틀어주는 단편영화가 붙어있지 않았다. 저번주 정식개봉 이후 재관람했을 땐 본편 앞에 붙어 나오는 단편 애니메이션 <버로우>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소울>보다 재밌다. <소울>이 지난 5년 동안의 픽사 영화들만큼 구리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로 시작해 '나'로 귀환하는 <소울>의 이야기보다 '우리'의 발견으로 끝나는 <버로우>가 조금 더 흥미로웠다. 


4. 1월엔 영화보다 전시를 더 많이 보러 다녔다. 한번 나갔을 때 최대한 많이 보고 돌아오려다보니 10개의 전시를 관람했다. 아래는 관람한 전시들에 대한 단평. 몇몇은 시간이 가능하다면 조금 길게 써보고 싶다. 


N/A 갤러리 [머리 없는 몸과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들]

 2018년 결성되어 여성에게 붙여지는 '~년'이라는 단어를 비틀고 나아가 여성에 부여된 의미와 관념 비틀기를 시도하는 그룹이 '히스테리안'이 기획한 전시. 히스테리안은 독서모임, 세미나, 계간지 발행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이번 전시는'십할년'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들의 네 번째 계간지와 함께 기획된 전시다. 전시는 망원동 So, One 갤러리에서 진행된 프리뷰와 을지로 N/A 갤러리에서 진행된 본 전시로 구성되어있는데, 아쉽게도 프리뷰는 관람하지 못했다. 바위, 이끼, 목재 등으로 원래 하나였던 대륙의 쪼개짐을, 그리고 그러한 쪼개짐이 단순히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화하는 것이 인간 종의 진화에 따라 여성/남성, 인간/자연, 객체/주체, 신체/이성 등의 이분법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접근하는 안민환의 작업과, 연줄에 연결된 단두대를 설치해 둔 조말의 작업은 흥미로웠다. 애초에 프리뷰와 본 전시로 쪼개진 이번 전시의 형태와 가장 강렬하게 연결되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전시의 제목 중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은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 소설에서 따온 것일텐데, 그 앞에 '머리 없는 몸'을 붙여 "원초적인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는 상징성이 문화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잠식되고 있는지, 찢겨진 몸의 조각, 묻힌 유해를 발굴하고자 한다"(전시서문)의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에 대한 신화적 서사를 찢긴 이미지와 텍스트로 구성된 콜라주로 선보이는 것이 에른스트의 작업이라면, 히스테리안의 전시는 그러한 작업들로 인해 선험적으로 찢긴 상태에 있는 객체(여성, 신체, 자연) 등에 부여된 이분법을 마름질함으로써 다시금 의미화하는 작업일 것이다. 안민환과 조말의 작업은 찢김 자체를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예정된 것(단두대)로 보여줌으로써 흥미로운 시도를 벌인다. 다만 갤러리 3층에 위치한,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개념을 고스란히 가져온 남하나의 회화는 다소 진부하게 다가왔다. 정혜진의 영상작업 <동굴-환영-목소리>는... 2주 전에 관람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ㅠㅠ


을지로 OF [P에 대한 혐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의 전시팀 C.A.S에서 기획한 전시. 제목의 P는 "복수(plural)이자 개인(person), 또 그 외 여럿, 곧 익명"이다. 이들은 혐오를 인간사 최초의 시간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간주하고, 감각, 타자, 사회, 개인의 네 가지 층위로 나눠 7명(팀)의 작품을 분배해두고 있다. 첫 테마인 감각에선 매일같이 소비되고 도살되는 닭에 대한 퍼포먼스 기록영상과 콘돔, 스타킹, 쓰레기(같아 보이는 조형물), 내장기관을 모방한 조형물 등이 있었다. 즉 즉각적으로 혐오를 감각하게 하는 것들을 보고 만지며 혐오라는 감정 혹은 감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드러낸다. 타자 섹션엔 김머쉬룸의 애니메이션과 임리하-박주영의 영화 작업이 있었다.전자는 혐오가 전이되는 대상으로써의 타자를 변형되는 얼굴과 아기의 모습으로 담아냈고, 후자는 데이빗 린치를 영상시키는 톤의 흑백 영화로 미지이기에 혐오스러운 것을 드러낸다.(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사회 섹션에선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담은 교림의 작업과, 메이크업 비디오 및 실바니안 피규어를 활용한  치명타의 영상작업이 전시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개인 섹션엔 라텍스로 제작된 얼굴가죽 조형물을 전시해둔 진지원의 작업이 있었다. 이들 작업은 네 가지 테마로 구분된 혐오에 대한 논평으로 기능한다. 전시 서문(https://www.hatredagainstp.com/intro)에도 써 있듯이, 이 전시는 혐오를 규명하는 대신 자연스레 존재하는 혐오에 대한 지표로 기능하는 작업들을 선보인다. 감염병의 시대를 살아가는 와중에 명시적으로 들어나는 혐오들에 대한 논평이라는 지점에서 흥미로웠던 전시. 


소쇼 [TAP UNTAP]

 김솔이와 김혜원의 2인전으로, 소셜미디어를 주제로 삼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30대로 진입하는 지금의 시기에서, 예술의 중심은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미디어로 확장된 지 오래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 혹은 작업과정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고, 그것은 다시금 전시장의 물리적인 작업으로 되돌아온다. 사실 한가람 미술관 등에서 제공하는 작품해설 오디오의 형태가 작은 단말기를 대여해주는 것에서 QR코드를 통해 앱을 설치하고 온라인에 업로드된 오디오를 듣는 것으로 변형된 지 오래인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새삼스럽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예술활동이 증대되면서 예술의 결과물은 점점 특정한 형태를 벗어난다. 앨범이 개별 트랙으로, 싱글로 분열되고 누군가의 믹스셋이나 플레이리스트로 재조립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작업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다매체의 결과물로 파편화되는 듯 하지만 그것들은 작가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통합된다. 때문에 [TAP UNTAP]에 전시된 작업들은 김혜원의 니트 드로잉 작업이나 아크릴 덩어리처럼 보이는 형태가 불분명한 조형물, 김솔이의 '하이퍼 팝' 계열의 음악과 그것을 물질화하는 스피커에 매달린 스프링, 그리고 서사 없는 영상 이미지의 병렬적 나열 등으로 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확실한 형태를 지닌 아이돌의 얼굴 조형물이나 벽에 그려진 책장, 혹은 생일에 따라 이름을 부여하는 형식의 밈을 패러디한 현수막 작업 등 비교적 명확한 형상을 지닌 작업들 또한 소셜미디어에서 공유되던 형태를 벗어나 물질적으로 전시되며 새로운 맥락을 얻는다. 즉, 이들의 작업은 이들이 시네마 4D에서 작업했을 3D 모델링이나 사운드클라우드 혹은 인스트그램 피드에 업데이트 되었을 것들을 물질화하여 전시장에 펼쳐놓은 것에 가깝다. 전시장의 몇몇 전시품은 물리적인 형태로 전시장에 놓여 있지만, 리타/이연숙의 [탭언탭을 위한 네 개의 메모]나 위지영의 [TAP UNTAP 2021: UNFICTIONABLE] 등은 QR코드를 통해 구글드라이브 문서나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서 읽고 들을 수 있다. 이 전시는 그러한 교환에 대한 것이다.


원앤제이 갤러리 [재현의 방법]

 이 전시는 10명의 회화 작가가 참여한 그룹전이다. 전시 서문은 "보는 행위는 거리를 둔 소유이며, 보는 것은 의지가 아닌 사건"이라는 메를로 퐁티의 말을 인용한다. 이는 우리가 시지각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렇기에 회화는 단순히 이미지의 모방이나 물감 덩어리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임이라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전시는 이러한 바탕에서 출발하여, 확대된 신체 이미지를 아무런 맥락 없이 제시하는 강석호, 빛에 의해 잠시 생성되는 순간을 연필과 종이로 포착하는 박정인, 환영을 통해 시지각을 교란함과 동시에 그것이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을 드러내는 정용국, 실제로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을 연출해 촬영한 사진을 다시금 회화로 옮기는 최모민 등의 작업을 선보인다. 


국제갤러리 [제니 홀저 개인전: 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 [장-미셸 오토니엘 개인전: NEW WORKS]

 제니 홀저 개인전은 딱히 할 말이 없다... 국제갤러리의 2, 3관에서 진행되었는데, 작품 촬영으로 인해 2관은 아예 관람하지 못했다. 3관의 작품들은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되었던 것 및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었다. 장-미셸 오토니엘 개인전에서 흥미로운 것은 <Precious Stonewall> 연작이었다. 6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자 술집에 대한 경찰의 과잉 단속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스톤월 항쟁의 주요한 무기 중 하나는 벽돌이었다. 장-미셸 오토니엘의 작품은 유리 벽돌로 제작되었다. 벽돌을 던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깨부수는 행위지만, 유리 벽돌은 단단함이라는 벽돌의 성질을 무력화시킨다. 인류가 오랜 시간 사용해온 건축자재이자 무기인 벽돌을 반대의 성질을 지닌 유리로 제작함으로써, 오토니엘의 연작은 찰나와 같은 투쟁과 그 이후에 남게 될 유리가 깨져 생길 수많은 파편들을 깨지기 이전의 상태로 제시한다. 


라흰 갤러리 [밤의 속성]

 연남동에 위치한 라흰 갤러리에서 친구들이 기획한 전시. 전시 서문은 어떤 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 명확해져야 하는지 흐릿하게 두어야 하는지를 질문하며, "불빛 아래 드러나고 분명해져서 경계가 생기기 전, 어둠 속에서 한정 없이 흐르는 것들이 있다"며 그것이 밤의 속성이라 정의한다. 이 전시에 참여한 여섯 작가의 회화, 설치, 영상, 애니메이션, 만화 작업은 경계가 발생하기 전의 모습을, 혹은 스스로 가상의 경계를 세우고 그것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갤러리 안에 흐른다. 가령 모닥불을 연상시키는 목재들과 공중에 매달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울리는 카우벨로 구성된 이해동의 [아름다운 도피처]는 작가 스스로 상정한 목가적인 풍경의 '아름다운 도피처'의 가상적 형태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실제 '아름다운 도피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도피처'는 작가 및 관객이 상상한 것과 조형물로 구현된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종종 울리는 카우벨 소리가 그 사이의 경계를 파고들며 흐를 뿐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순간들을 담은 사진을 오려 만든 콜라주와 그것을 다시 목탄 드로잉 및 페인팅으로 그려낸 변진의 [해동게스트하우스] 연작은 작가가 기억하는 기억, 조각조각 잘려 재구성된 사진에 담긴 기억, 그리고 그것이 그림으로 변화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개의 경계들을 설정하고, 그 경계들을 넘나들며 떠오르는 어떤 기억의 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기억의 상은 전시장 벽면에 늘어선 사진 콜라주와 그림 사이를 오가는 관객의 시선을 매개로 흐르며 발생한다. 자신의 만화, 그림, 조형물 등을 아카이브처럼 펼쳐 놓은 평화의 작업이나, "이성을 버릴 것"을 명시적으로 주문하는 이단의 [마술 극장], 흐릿한 인과관계들을 쫓아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엄윤채의 애니메이션 [새와 내가 다르고] 등의 작품들도 그러한 결을 따른다. 전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오민성의 영상작업들이었는데, [어쩌면 우리는]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세 개의 영상 작업은 CRT 모니터에 여러 예술가들의 인터뷰 영상을 상영하는 작품이다. 다만 인터뷰 전체가 아닌 인터뷰이로 나온 류이치 사카모토 등의 예술가들이 '어떤... 음... 어...'와 같은 말을 하는 순간만이 편집되어 제시된다. 무의미하면서도 의미가 가득한, 말 앞과 뒤에 어떤 이야기가 올지 모르는, 혹은 인터뷰어가 던진 질문에 따라 달라질 짧은 발화들은 영상 인터뷰라는 시간적 형식 안에서 흐름을 가로막는 것으로도, 흐름을 이어가는 것으로도 기능한다. 전시장 밖에 설치된 [천천히 또박또박]은 좌우가 반전된 올해의 작가상 2020의 전시 소개글이 흘러나오고, TV 앞에 놓인 거울을 통해 그 텍스트의 일부분을 관람하는 방식의 영상 설치 작업이다. 작가는 수많은 전시공간에 놓인 텍스트 대부분이 덩어리지거나 시선을 피해 흩어지는 것처럼 보여졌다며, 그것이 잘 읽히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갖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좌우 반전된 텍스트는 거울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지지만, 거울은 TV의 일부분만을 보여주기에 텍스트 전체를 읽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전시공간에서 빈번히 그러한 곤란함과 마주한다. 뒤집히고 다시 뒤집힌 채 흘러가는 텍스트를 그저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면서 절달하는 데 실패한다. 그것을 보는 순간이 전시 서문에서 정의내린 '밤의 속성'과 가장 알맞은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아웃사이트 [친애하는 공포에게] 

 허니듀의 개인전 [친애하는 공포에게]는 게이 남성의 BDSM 플레이를 다루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공간을 양분하고 있는 철창이 보인다. 철창엔 아크릴로 제작된 성기 모양의 조형물과, 조형물에 채워진 정조대들이 눈에 들어온다. 철창 옆에서 상영되는 영상설치작업 [진정한 포스트휴먼이 되는 방법]은 남성의 쾌락의 주체를 자지가 아니라 쾌락의 객체로 여겨지는 '구멍'인 항문으로 전환해야 함을 주장하며, 그것을 (폭력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철창 너머에 설치된 [오브젝트]는 일정 시간마다 진공청소기가 작동하여 검은 라텍스 속에 가려진 신체 모양의 조형몰을 드러내는데, 그 조형물은 엎드린 사람이 자신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하는 암실에는 음성으로 구성된 작업 [세레모니]가 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꺼지며 시작되는 [세레모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실 속에서 작가가 경험한 (물론 사실 여부는 알지 못하는) BDSM 플레이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다. 작가가 미국에서 경험한 플레이는 그것이 섹스 플레이인지 실제 납치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상황인데, 작가의 음성은 그것을 분간할 수 없다는 공포 속에서 더욱 흥분을 느꼈다 말한다. [친애하는 공포에게]에서 선보인 허니듀의 작업은 예쁘고 아름답게 꾸며진, 혹은 슬픔과 체념을 강조하는, 더 나아가 아브젝션으로 점철되어 단순히 혐오의 감각을 몰아붙이는 기존의 퀴어미술을 거부하고 공포감 자체에서 쾌락을 느끼는 경험을 풀어낸다. 그러한 감각은 공포에서 오는 쾌락을 대리해온 각종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의 생산물들(최근의 예시로 <가짜 사나이>를 꼽을 수 있겠다)과 성기와 쾌락에 대한 예찬(전시에서 제공된 임진호의 텍스트는 카디 비의 'WAP' 뮤직비디오를 예시로 꼽는다)이 만나는 지평으로 존재한다. 즉 위반하는 것으로부터의 쾌락은 허니듀의 작업에서 공포를 위반하는 것으로부터의 쾌락으로, 공포를 곁에 둠으로써 깨어나는 감각으로 전환된다. 안전함, 아름다움, 비극을 넘어, 허니듀의 작업은 전시장에서만 짧게 현시될 수 있는 포르노토피아를 보여준다.


대안공간 루프 [노영미 개인전: 지붕 위의 도로시]

 노영미의 작업은 2018년 네마프에서 처음 접했다. <하녀들>이라는 짧은 영상작업은 인터넷에 떠도는 저작권이 소멸된 이미지들을 모아 제작되었다. 그의 다른 작업 <파슬리 소녀> 또한 저작권이 자유로운 이미지들을 모아 이탈리아의 어느 설화를 재구성한다. 노영미의 이번 개인전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다만 기존의 작업들이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을 직접 끌어왔다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을 점으로 열화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전시는 러닝타임 33분의 애니메이션 <1021>을 중심으로, 퍼블릭 도메인인 회화 작품들을 점(이라고는 하지만 움직이는 지렁이의 모습이나 개구리 페페와 같은 이미지들)으로 변환한 그래픽 회화 작업이나 관객의 모습을 점으로 변환하는 인터랙티브 작업, 어슐러 르 귄의 시를 번역기를 통해 어족이 다른 9개의 언어를 거쳐 한국어로 번역한 것 등이 펄쳐져 있다. <1021> 또한 지난 100년 동안 10월 21에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들을 뉴스 아카이브, SNS, 위키피디아 등에서 찾아내 옥토버와 하이마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이며, 애니메이션의 이미지 대부분은 뉴스 푸티지,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이미지 등을 점묘화처럼 변형한 것이다. 그렇게 명확한 형태를 지닌 온라인을 떠돌던 이미지들은 작가에 의해 특정한 서사로 재구성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열화과정은 점묘화의 형식을 통해 표현된다. 열화되는 것은 이미지가 점점 불명확한 상태로, 궁극적으로는 소멸로 수렴됨을 의미한다. 관객의 모습을 점으로 변환하는 인터랙티브 작업은 관객이 카메라에 다가설수록 점에 크기는 작아지고 멀어질수록 점의 크기는 커진다. 때문에 일정 거리 이상으로 카메라에서 멀어지면 관객의 이미지는 소멸한 것과 다름 없어진다. 화면에는 거대한 점 몇개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으로의 열화는 영화가 지닌 운동성 자체를 열화시킨다 <1021>에서 걸어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자. 점으로 구성된 움직임은 화면을 빼곡히 매운 점들의 색이 변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영미의 기존 작업들이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을 재구성함으로써 무의미한 이미지들의 픽션을 구성했다면, <1021>로 대표되는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그러한 이미지들이 현실의 사건들에서 왔음을 지시함과 동시에 소멸해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전시는 역시 보고 바로 뭔가 써둬야 한다... 나중에 쓰려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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