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3. 2021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2020

 전력회사 직원 정은(유다인)은 권고사직을 거부하자 지방의 하청업체로 파견된다. 갑작스레 파견된 정은의 존재에 정은 자신은 물론 하청업체의 소장(김상규)과 세 직원들도 당황스러워한다. 그곳에서 사무직인 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정은 자신을 해고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하청업체로 보낸 원청에 맞서 현장 일을 배우려 한다. 하지만 송전탑을 기어올라 정비하는 목숨을 건 작업에 갑자기 뛰어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하청업체의 막내 직원 충식(오정세)에게 현장 일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D라는 낮은 성적의 근무평가 결과다. 정은은 자신을 해고하려는 원청에 맞서기 위해 노동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태겸의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부당하게 파견근무를 하게 된 어느 중년 사무직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이야기다.      

 영화는 정은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바닷가를 낀 시골의 풍경, 내륙과 섬을 잇는 거대한 송전탑, 그 송전탑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는 정은의 심리, 파견 근무지에서 맞닥뜨린 고난과 원청에서의 유리천장이 뒤섞인 스트레스로 인해 발현되는 고소공포증 등이 정은 얼굴을 통해 전달된다. 영화는 부당해고를 막기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들의 존재가 무색하게 부당해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한국의 상황을 보여준다. 정은이 찾아간 근로감독관은 진정 결과가 나오는 데 3~5년이 걸린다 말하고, 파견된 정은의 인건비를 떠맡아야 하는 하청업체 소장은 예산이 부족해 실적이 떨어지는 한 사람을 해고해야 한다고 예고한다. 원청은 하청업체에 무엇도 지원해주지 않는다. 예산은커녕 백만 원을 훌쩍 넘기는 작업복조차 직원들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비로 구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원청이 하청에 제공하는 것은 효율성을 명목으로 그들을 압박하는 실적평가뿐이다.      

 유다인이 연기하는 정은의 얼굴과 충식을 비롯한 직원들의 노동하는 신체는 목숨을 담보로 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이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둘째 치고, 자신의 목숨과 고용상태에 대한 안정성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을 충실하게 담아낸다. 송전탑을 올려다보는 정은의 시점숏이나, 밧줄에 의지해 송전탑에 오르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촬영은 노동의 숭고함 같은 표현으로 환원하기엔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을 불러온다. 정은이 권고사직을 제안받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것도 부당해고엔 이유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영화의 어떤 순간과 배우들의 노동(이는 극 중 캐릭터들의 노동과 배우들이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송전탑을 오르는 훈련을 받고 실제로 송전탑에 오르는 배우의 노동과정을 포괄한다)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충만함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장면들이 보여주는 정서적인 측면 외의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가령 하청업체 직원이자 래퍼를 꿈꾸던 승우(박지홍)는 대사 대부분을 랩처럼 발화하는데,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영화의 톤과 전혀 맞지 않는 캐릭터 설정은 어색하기만 하다. 조직폭력배조차 못 되는 양아치 집단처럼 그려지는 원청 직원들의 모습도 어색하다. 등장할 때마다 눈을 부라리며 정은을 밀치고 폭언을 일삼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가 비판하려던 것의 핵심을 빗겨나간 채 그들을 단순히 악마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당황스럽다. 권고사직, 파견, 해고, 원청과 하청 등 노동자들을 갈라놓는 개념들을 영화에 잔뜩 제시한 후에, 영화가 택하는 것은 그것들을 넘어 파편화된 노동자 개인이 아닌 ‘우리’로 나아가려는 정은의 모습이다. 여기서 정은은 무엇을 통과하고 넘어서는가? 유리천장, 부당해고, 위험한 노동과 노동자의 죽음, 그러한 것을 떠안고 기상악화로 인한 위험함을 무릅쓴 채 송전탑을 오르는 정은의 모습은 다소 당황스럽다. 이런저런 역경을 뚫고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송전탑을 오르는 정은의 동기는 분명 우리를 향하고 있지만, 정작 송전탑에 올라 다시금 전기가 들어오는 섬을 바라보는 정은의 모습은 다시금 정은 개인을 향할 뿐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영화가 보여준 노동의 정서와는 별개로 작동한다. 이 장면은 영화가 착실히 묘사해온 노동의 제스처, 가령 “우리는 빛, 우리는 생명”을 읊는 세 하청업체 직원의 모습, 송전탑에 오르기 전에 신발 바닥을 터는 모습과 같은 제스처들이 소거되고, 저항하는 방법으로서 노동을 수행하는 정은의 모습만 남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북스마트> 올리비아 와일드 20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