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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1. 2021

<카오스 워킹> 더그 라이만 2021

 23세기,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인간들은 외계 개척지를 찾아 나서고, ‘뉴 월드’라 불리는 행성에 1차 정착민들을 보낸다. 하지만 뉴 월드에는 이들이 알지 못했던 ‘노이즈’라는 바이러스가 있다. 이것에 감염되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남들에게 들리고 보이게 된다. 이곳에서 태어난 토드(톰 홀랜드)는 프렌티스 시장(매즈 미켈슨)이 이끄는 마을에서 살아간다. 그곳은 여성이 없이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프렌티스의 설명에 따르면 뉴 월드의 토착민 스패클의 공격을 받아 여성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차 정착민 정찰대의 우주선이 토드의 마을 인근에 추락하고, 우주선의 유일한 생존자 바이올라(데이지 리들리)는 마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프렌티스의 표적이 된다. 이에 토드는 바이올라와 함께 프렌티스에게서 도망치고, 추격전이 벌어진다. <카오스 워킹>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나 <아메리칸 메이드> 등의 영화로 알려진 더그 라이만의 신작으로, 페트릭 네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의 설정은 나름 흥미롭다. 생각이 남에게 들릴 뿐 아니라 가시적인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은 영화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는 그것을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가령 토드가 프렌티스의 아들 데이비(닉 조나스)를 놀려주기 위해 뱀을 생각해 뱀의 형상을 나타낸다거나, 프렌티스가 자신의 생각을 환영처럼 부리는 것, 토드가 생에 처음 본 여성 바이올라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등의 장면은 나름의 유머와 흥미로움을 끌어내는 장면이다. 문제는 말로 이루어진 생각들이 표현되는 방식이다. 그것들은 모두 배우의 음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때문에 영화엔 끝없이 배우들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더군다나 영어권 국가가 아니기에, 말로 구성된 이들의 생각은 모두 자막으로 등장한다. 끔찍하게 산만한 화면이 영화 내내 이어지고, 몇몇 장면은 인물의 입으로 발화된 대사와 생각한 것 사이의 분간이 어려운 수준이다.      

 이러한 ‘노이즈’의 설정엔 한 가지가 더 있다. 여성은 노이즈에 감염되지 않지만, 남성은 감염된다는 점이다. 토드를 주인공 삼아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여성은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성은 자기 생각을 감추기 위해 끝없이 강해져야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토드는 끝없이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며 생각을 노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빈번히 실패로 돌아가는 그의 노력은 이 영화의 주요 테마인 ‘유해한 남성성 비판’의 중심축을 이룬다. 다만 영화가 묘사하려는 설정 자체의 산만함 속에서 영화의 주제는 제대로 구체화되기도 전에 자잘한 유머로 흩어진다. 구현하기 쉽지 않은 방식이었겠지만, 인물들의 생각을 말로 듣게 하는 대신 보이는 이미지들로만 표현하는 방향으로 ‘노이즈’라는 설정을 활용했다면 조금 더 깔끔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데이비, 목사(데이빗 오예로워), 뉴 월드의 다른 마을인 파브랜치의 시장 힐디(신시아 에리보) 등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배경처럼 쓰이고 퇴장하거나 어느 순간 극에서 사라지는 것의 문제점도 있다. 이들 캐릭터는 영화 내에서 아무런 쓸모도 얻지 못한 채 러닝타임만 낭비하고 있다. 지금의 결과물은 <카오스 워킹>이라는 독자적인 작품이라기보단, 도리어 톰 홀랜드가 차기작 <언차티드>를 위해 이런저런 예행연습을 해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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