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1. 2021

영리하지만 충분하지 못한 설정

<인질> 필감성 2021

 스타 영화배우 황정민(황정민)은 제작발표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귀가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납치된다. 인질범 일당은 리더 최기완(김재범)과 2인자 염동훈(류경수)을 비롯해 5명(정재원, 이규원, 이호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이미 세간의 화제인 ‘카페사장 납치사건’의 범인이기도 하며, 다른 인질인 소연(이유미)을 붙잡고 있다. 이들은 황정민에게 돈을 요구하며, 돈을 주면 풀어주겠다고 말한다. 홍콩영화 <세이빙 미스터 우>를 원작으로 삼는 <인질>은 독특하게도 황정민 배우가 본인으로 출연한다. 이는 원작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원작은 영화배우가 납치되었던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지만 주연인 유덕화가 본인을 직접 연기하지는 않았다. <인질>은 황정민이 청룡영화상에서 처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의 수상소감 영상으로 시작한다. “저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과 함께 <신세계>, <베테랑>, <부당거래>, <히말라야>, <국제시장> 등 그가 출연한 히트작들의 영상과 포스터가 등장한다. 때문에 <인질>은 황정민(과 함께 극 중 영화에 출연한 박성웅)을 제외한 모든 배우를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로 꾸렸다. 이는 인질범뿐 아니라 황정민의 매니저나 사건을 쫓는 경찰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설정 때문에 <인질>의 리얼리티는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최근 10여 년 간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은 스타가 주인공이기에 영화의 많은 부분은 황정민의 실제 모습에서 따왔다. 극 중 그의 말투는 영화 속 캐릭터라기보단 그가 이번 영화의 홍보를 위해 출연한 여러 인터뷰 속 말투에 가깝기도 하다. <인질>은 이를 바탕으로 영화가 누릴 수 있는 장점들을 끌어오려 한다. 인질범 중 한 명이 황정민 배우의 팬이어서 그에게 <신세계> 속 “드루와~ 드루와~” 대사를 하도록 시킨다던가, 황정민이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베테랑>의 서도철이나 <부당거래>의 최철기처럼 자신이 연기했던 경찰 캐릭터의 이름을 말하는 등의 상황이 그러하다. 영화는 이러한 포인트들을 관객에게 친절히 설명해주는 것까지 잊지 않는다. 서도철과 최철기라는 이름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박성웅에게 황정민의 매니저는 그것이 황정민의 극 중 이름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지점은 단순히 황정민의 기존 출연작 속 요소를 극에 끌어오는 것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인질>은 황정민이라는 한국 영화계의 거대한 존재감을 바탕으로 최근 20년 간의 한국 상업영화를 패러디/오마주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황정민과 최완기의 폭우 속 결투는 자연스럽게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포스터를 떠올리게 하며, 경찰이 체포된 인질범을 취조하는 장면은 수많은 한국 범죄영화와 동일한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인질>을 보며 황정민의 출연작뿐 아니라 <추격자>, <공공의 적>, <독전>, <악마를 보았다>, <내가 살인범이다> 등을 떠올리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인질>은 황정민이라는 형상을 통해 한국형 누아르를 되짚어보는 기획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질>은 그러한 길을 가지 못한다. 영화는 배우로서 경찰, 변호사, 검사를 다 연기해보고 무술 훈련과 캐릭터 연구 등을 수행했던 황정민이 그것들을 활용해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는 것에 집중한다. 물론 이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다. 

 문제는 황정민을 제외한 캐릭터들이 한국 범죄영화 속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의 전형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배우들을 대거 기용하며 이들의 연기력을 선보이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캐릭터는 치밀한 연기 대신 고성과 폭력, 욕설을 반복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 한국 범죄영화 속 범죄자들의 열화된 버전이다. 하정우, 김윤석, 최민식, 조진웅, 유아인, 정재영, 김남길, 조우진, 그리고 황정민 등이 연기했던 영화 속 범죄자들은 이들의 직계 조상이며, 납치된 황정민이 묶여 있는 인질범 일당의 아지트는 김지운, 나홍진, 강우석, 류승완 등이 만들어낸 공간을 물려받는다. 황정민이 황정민을 연기한다는 개성을 내세웠지만, 아쉽게도 <인질>은 거기서 멈추고 만다. 적당히 영리한 선택을 했지만, 충분하진 못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화를 성립하게 하는 반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