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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01. 2021

즐겁지만 어정쩡한 입단식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데스틴크리튼2021

*스포일러 포함


 어린 시절 아버지이자 ‘텐 링즈’의 수장 웬우(양조위)에 의해 살인병기로 키워진 샹치(시무 리우)는 집에서 도망쳐 살아가고 있다. 샌 프란시스코에서 친구 케이트(아콰피나)와 함께 평범한 시간을 보내던 중, 웬우가 보낸 텐 링즈 일당에 의해 습격을 받는다. 그는 웬우가 자신의 여동생 샤링(장멍)을 노리고 있다 판단하고 그를 도우러 가지만, 결국 텐 링즈의 소굴로 붙잡혀 가게 된다. 웬우는 세상을 떠난 아내가 중국 어딘가에 숨겨진 마법의 마을 ‘탈로’에 갇혀 있다 생각하고 그곳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자신의 두 자녀가 필요했었던 것. 하지만 샹치와 샤링은 이에 반발하고, 탈로의 리더인 이모 난(양자경)과 힘을 합쳐 웬우에 대항한다. MCU의 첫 동양인 히어로인 샹치의 오리진 스토리를 담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아이언맨> 시리즈를 통해 세계관의 영원한 떡밥으로 느껴지던 텐 링즈의 실체를 공개하는 작품이다. <숏텀 12>, <저스트 머시> 등을 연출한 데스틴 크리튼이 연출을 맡았으며, 양조위의 첫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출연작이기도 하다.

 <뮬란> 실사영화의 처참한 실패를 반면교사 삼은 것처럼, <샹치>는 동양, 정확히는 중국 문화의 껍데기만을 끌어오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웬우와 리(진법랍)의 우아한 대결은 여러 걸작 무협영화 속 움직임을 매끄럽게 가져오고, 샌 프란시스코의 굴절버스에서 벌어지는 샹치의 첫 액션은 전성기 성룡의 스타일을 살짝 흉내 낸다. ‘신비로운 동양의 마법’과 같은 오리엔탈리즘적인 설정이 당연하게 등장하지만, 그것은 중화권에서 생산해내는 여러 창작물에 비해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샹치>는 <블랙팬서>처럼 미국에서 살아가는 비백인 인종의 정치사회적인 면모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중국계 이민자의 디아스포라가 등장하는 것은 영화 초반부의 짧은 대사들뿐이다. <샹치>는 영화적 공간의 대부분을 텐 링즈의 본거지와 마법의 마을 ‘탈로’로 설정해 동양풍 판타지를 선보인다. <아이언맨3>에 등장했던 가짜 만다린 트레버(벤 킹슬리)와 짝을 이루는 모리스를 비롯해 구미호와 기린 등 다양한 동양풍 크리처가 등장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동양풍 용이 서양풍 (크툴루가 결합된 듯한 모습의) 드래곤과 결투를 벌이기도 한다. 때문에 <샹치>는 무협영화와 (성룡 느낌의) 쿵푸영화의 스타일을 빌려온 액션영화로 시작해, MCU에서는 거의 처음 선보이는 거대 크리처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영화의 장르적 면모는 확실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폭발이 난무하는 다른 MCU 영화와는 달리 빠른 몸놀림 위주의 근접격투가 액션의 중심이 되고, 샹치를 비롯한 인물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몫을 해낸다. 특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웬우다. 양조위의 첫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영화 외적인 면모 외에도, ‘텐 링즈’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무쌍 찍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액션 외에도 웬우의 이야기는 영화의 주인공 샹치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아내를 통해 탐욕을 버린 악당이 아내가 죽자 복수를 위해 다시금 악의 길로 접어든다는 이야기뿐이니까. 다만 양조위의 이미지와 MCU의 세계관 속에서 쌓여온 ‘텐 링즈’와 만다린의 입지가 웬우의 거대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샹치>를 보며 주인공 샹치의 입장에서 그의 여정을 쫓는 것보다 오랜 시간 MCU의 영화들을 보며 정체를 궁금해했던 ‘만다린’ 웬우의 감정선을 쫓는 게 더 흥미롭다.

 이는 <샹치>가 슈퍼히어로 ‘오리진’ 스토리로써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영화는 샹치가 분명 세계관에 처음 등장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미 완성된 히어로처럼 대하고 있다. 물론 <블랙팬서>의 트찰라나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피터 파커도 각각의 첫 솔로 영화 속에서 이미 완성된 히어로로 등장했으며, 두 영화는 각 캐릭터의 정체성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두 캐릭터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짧게나마 소개되었던 인물이다. 샹치는 그렇지 않다. <샹치>에서 샹치의 성장은 없다. 그는 영웅담이 으레 그렇듯 아버지를 무찔러야 한다.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익명의 발레파킹 직원이 아니라 샹치라는 이름의 슈퍼히어로가 되기 위해 그가 걷는 길은 탈선의 우려가 없는 롤러코스터의 경로와 같다. 그가 아버지를 꺾고 ‘텐 링즈’를 얻어 진정한 슈퍼히어로가 되는 이야기라고 <샹치>를 요약한다면, 샹치가 목표로 향하는 길에서 새롭게 얻어낸 힘은 없다. 다시 말해 <샹치>는 <아이언맨>, <토르: 천둥의 신>, <퍼스트 어벤저>와 같은 ‘오리진 스토리’라기보단 이미 히어로로 존재하는 이에게 명칭을 부여하는 <원펀맨> 같은 이야기에 가깝다. 블록버스터로서의 즐거움과 MCU 세계관의 퍼즐을 맞추는 재미는 있을지언정 이야기의 재미는 없다. <블랙위도우>가 너무 늦게 도착한 후일담이었기에 (포스트-미투 시대의 텍스트를 세련되게 선보임에도) 세계관 내에서 동력을 잃은 채 헐거운 이야기를 선보였다면, <샹치>는 ‘텐 링즈’로 대표되는 MCU의 해묵은 떡밥을 빠르게 처리하고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너무 빠르게 도착한 속편이다. 샹치는 슈퍼히어로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캐릭터의 매력을 선보이기도 전에 MCU의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샹치와 케이트가 웡(베네딕트 웡)의 부름을 받고 생텀으로 향하는 모습이다. 본편이 끝난 뒤 첫 쿠키영상(쿠키영상은 2개가 나온다)에서 샹치는 홀로그램으로 등장한 캡틴 마블(브리 라슨),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브루스(마크 러팔로)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가 끝나자 웡은 샹치의 앞길이 고난의 연속일 것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그가 어벤져스의 새로운 멤버임을 통지한다. 샹치는 웬우를 꺾음으로써 슈퍼히어로로 자신을 정체화한 것이 아니다. 그는 MCU 내에서 슈퍼히어로로 활약하기 기존 어벤져스 멤버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슈퍼히어로 등록제에 반대하기 위해 벌어진 ‘시빌 워’는 어벤져스의 인정을 통해 슈퍼히어로라는 정체성을 얻게 되는 <샹치>의 쿠키영상에서 완전히 부정되는 꼴이다. MCU는 더 이상 한편의 영화에 담길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진 것처럼 <샹치>를 만들었다. 샹치는 세계관의 다음 발걸음을 위해 등장해야 했으며, <샹치>는 오로지 세계관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만 캐릭터를 등/퇴장시킨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시절부터 나온 이야기 아니냐고? 물론 그렇지만 지금만큼 이야기에 관심 없지는 않았다. <샹치>는 이런저런 즐길거리들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로키>와 함께 페이즈 4의 불길한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아 참, 할리우드 좀생이들은 ‘전쟁’이랍시고 100명도 안 되는 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텐 링즈가 그렇게 작은 조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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