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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14. 2021

2021-09-14

1.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본 충펑의 <스트라툼 2>는 (그 방대한 러닝타임 때문에라도) 자꾸 생각하게 되는 영화다. 영화제 티켓 카탈로그에 수록된 프로그램 노트에서 김병규 평론가는 "끝없이 부서지는 벽과 기둥의 이미지. 이 파괴의 행진이 끝날 즈음에 우리는 스크린이라는 또 다른 벽과 기둥의 역량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오늘날의 영화가 과연 스크린에 잔존하고 있는지 되묻는 <스트라툼 2>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노 홈 무비’다."라고 썼다. 영화엔 끝없이 파괴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건물들은 철거되고, 지진에 붕괴되고, 산사태와 홍수에 휩쓸려가고, 전쟁과 테러에 의해 파괴된다. 영화에서 벽과 기둥이 끝없이 파괴될 때, 그것이 상영되는 극장의 벽과 기둥은 건재하다. 아니, 벽과 기둥이 건재해야만 스크린은 존재할 수 있다. 영사기는 벽을 요구한다. 여기서 몇 편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A. 영화의 주인공은 영사기사다. 그는 자신이 영사한 영화 속으로 뛰어들어 몽타주되는 화면 속 이미지에 따라 움직인다. 

B. 용병 팀의 한 멤버는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있다. 병동에선 3D 영화를 상영중이고, 환자들은 스크린 저 멀리서 다가오는 험비를 보고 있다. 험비가 스크린 표면에 가장 가까이 나타나는 순간, 팀원을 구하러 온 용병들의 험비가 벽과 스크린을 뚫고 병동 안에 나타난다. 3D 안경을 낀 관객들은 환호하고, 용병은 그곳을 떠난다.

C. 어느 극장, 스크린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상영중이다. 주인공은 스크린 뒤에서 적과 싸우고 있다. 스크린 전면에 영사되는 영화는 스크린의 후면에서도 볼 수 있다. 격투를 벌이던 이들의 손에 쥐어진 칼은 스크린을 찢고, 그들의 몸은 스크린을 뚫고 관객 앞에 나타난다. 총성, 피, 싸움을 목격한 관객들은 극장 밖으로 빠져나간다.

D. 가족의 복수를 준비하는 극장노동자는 원수가 참석하는 상영회를 준비중이다. 그는 '개자식들'과 힘을 합쳐 상영회가 진행되는 극장 문을 걸어 잠근다. 영화가 끊기자 그의 얼굴이 스크린에 등장하고, 스크린 뒤에 쌓인 필름더미에 불이 붙는다. 웃음소리와 총성이 뒤섞인 채 스크린은 타오른다. 스크린을 앞지른 연기 위에 그의 얼굴이 계속 영사된다.


 A를 제외한 스크린을 침범하는 운동들은 스크린이라는 벽의 해체를 전제한다. A는 스크린 속의 운동과 동화되려는 시도라면, B, C, D는 스크린을 파괴함으로써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환호, 공포, 죽음. 이 세 사례에서 스크린의 역량은 그것에 상영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을 뚫고 나오는 신체 이미지로 전도된다. <스트라툼 2>는 뻔뻔하게도 새로 준공될 대형쇼핑몰 속 영화관의 3D 모델링 이미지를 가져온다. 물리적으로 무너트릴 수 없는 그 스크린에선 <아바타>, <써커펀치>, <트랜스포머>, <어벤져스>가 흘러나온다. 영화에 끝없이 흘러나오는 파괴의 이미지는 가상의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파괴로 전도된다. 여기서 전용되는 것은 스크린 자체라기보단 김병규 평론가가 언급한 스크린의 역량이다. 충펑은 가장 뻔뻔한 방식으로 유쿠를 비롯한 동영상 플랫폼과 영화들에서 도굴해온 파괴의 스펙터클을 (벤야민적 의미에서) 전시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인용되는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 속 문구 "대중은 스크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대중은 자신의 무너진 집과 일터를 무너지지 않는 스크린에서 볼 것을 요구할 수 있다"로 뻔뻔하게 수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E. 다큐멘터리 속 극장은 영화관임과 동시에 방공호다.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시민들은 상영관으로 대피한다. 영화가 상영 중일 때 시작된 테러 위협에 맞서 극장노동자들은 관객들이 위험한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극장 문을 걸어 잠근다. 


 E에서 극장은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아야 극장은 테러로부터 관객들을 지키는 방공호가 될 수 있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극장-방공호의 가장 중요한 역량이다. 그곳에서 무엇이 상영되는지는 상관 없다. 스크린은 무너지지 않음으로써 관객을 보호한다. B, C, D에서처럼 스크린이 붕괴한다면 그것은 테러의 여파 때문일 것이며, 관객 앞에 현시할 수 있는 파괴의 스펙터클로부터 관객을 보호하는 가상의 스펙터클이다. 충펑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희적 동일시'가 발생할 수 없으며, 빈곤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스펙터클은 역사의 난민들을 만들어낸다고 영화에서 보여준다. E는 그것을 반박하는 사례로서, 난민화를 막아서기 위해 가상의 스펙터클이 영사되는 공간으로서의 스크린이 등장한다. E의 사례 속에서 스크린은 너무 많은 파괴의 스펙터클이 전시되는 공간이 아니라 스펙터클이 관객 앞에 현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그곳을 촬영하는 E의 카메라, 극장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는 관객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스트라툼 2>에서 폐허가 된 유적을 촬영하는 관광객들이 느끼는 시선의 자유와 안전함에 가깝다. <스트라툼 2>가 스크린의 역량을 도굴하고 전용한다면, E는 그저 굳건이 서 있는 것만으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는 스크린을 보여준다.


3. <스트라툼 2>에서 스마트폰의 지위는 역설적이다. 스마트폰, 액션캠 등의 개인화된, 개인의 몸과 동기화되는 촬영기기들은 충펑이 말하는 "신체 영화"의 조건이다. 충펑은 "카메라를 든 사람이 물리적으로 충격을 받을 때 흔들리는 모습에서 나오는 미장센"이라고 신체 영화를 정의한다. 흥미로운 것은 <스트라툼 2>가 극장 뿐 아니라 온라인 상영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통해 온라인상영되는 이 영화가 전용하는 것은 스마트폰과 랩탑의 스크린이 아니라 벽과 기둥을 지닌 극장의 스크린이다. 스마트폰은 파괴되는 벽과 기둥의 이미지에 맞서 서 있는 <스트라툼 2> 상영관의 스크린을 대체할 수 없다. 벽도 기둥도 객석도 필요치 않는 스마트폰의 스크린, 스마트폰은 신체 영화라는 미장센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스크린이라는 건축적 존재를 다루는 것에 곤란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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