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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04. 2021

2021-10-04

1. 2021 인디포럼 영화제 폐막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일정도 연기되고 여러 행사가 비대면으로 전환되거나 취소되는 등 아쉬움이 많았지만,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영화제에서 일하는 경험이 처음이었는데, 무사히 마무리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5일 간 영화제 방문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2. 영화제 홈페이지엔 전문이 올라오지 않은 (프로그램북에는 있는) 프로그램 노트를 올려봅니다. 제가 기획/섭외를 담당한 섹션 <애니프론트1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섹션입니다. 각자 다른 방식과 주제로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라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감독님들의 작품을 모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여섯 편 모두 여성감독의 작품이며, 그 중 세 편은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더라면 감독님들께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아래는 프로그램 노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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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바쟁은 카메라의 자동적인 창조과정이 이미지에 객관성과 신뢰성을 부여하고 시간을 방부처리한다며 영화의 사진적 존재론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주장은 필름에 담긴 이미지가 사물이 기록된 흔적이며, 그 이미지가 실존적으로 사물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카메라를 통해 창출된 이미지는 지표성을 지닌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실사 이미지와 다르게 카메라 앞에 실재했던 대상의 기록이 아닌, 애니메이터가 개입하여 만들어낸 이미지로 구성된 환영이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지표성을 지니는 대신 도상성 혹은 상징성을 지닌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창조된 이미지는 실제 사물과의 물리적 연결이 없기에 그것의 증언적, 지표적 가치는 하락한다. 때문에 디지털 이미지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제작된 실사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이미지는 모두 가상의 기호라는 점에서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 시네마의 상황에서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는 지표성이 강하게 부각되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와 지표성을 전혀 가지지 못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사이의 실험적인 결합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는 실제 대상, 사건, 인물 앞에 카메라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카메라 앞의 가시적인 대상을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는 내면이나 과거의 경험 등 비가시적인 것들의 재현에 목적을 둔다. “애니프론트: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섹션은 최근 국내에서 제작된 애니메이트 다큐멘터리들을 모아 상영한다. 이번 기획전에 포함된 작품들은 국내 여러 영화제를 통해 개별적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유사한 성격을 지닌 작품들끼리 모여 상영된 적은 없다.


김아영의 <나와 승자>, 김승희의 <호랑이와 소>, 조한나의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는 모녀관계를 다룬다. 이들의 작품은 기존에 ‘사적 다큐멘터리’로 규정되어온 국내 독립 다큐멘터리의 맥락을 확장한다. <나와 승자>는 어느덧 나이를 먹은 감독이 엄마와의 이별을 대비하며 엄마를 기록한 작품이다. 영화는 감독이 60세가 되고 엄마가 91세가 되는 16년 뒤를 상상하며 다가올 미래를 기록한다. <호랑이와 소>는 호랑이 띠 엄마와 소띠 딸의 이야기다. 감독은 지난 30여년 동안 모녀의 일상을 지배해온 불안감이 한국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이혼에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며 엄마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은 각각 호랑이와 소로 표현된 두 사람의 내면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다.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는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한 채 성인이 된 딸이 엄마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작품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대화는 애니메이션을 매개로 뒤섞이며 두 사람의 현재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김새로미의 <옐로우>, 서영주의 <미스 박 프로젝트 #1>, 강희진의 <메이•제주•데이>는 인종차별, 여성혐오, 한국 근현대사의 사건을 다룬다. <옐로우>는 서아프리카의 국가 감비아를 방문한 한국계 캐나다인 여성의 여행을 따라간다.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감독이 겪은 인종차별의 경험은 그를 단일한 정체성으로 조직하려는 공격과 같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기록해 보여주는 것이 아닌 현실을 다른 방향으로 뒤집는 수행의 방식으로서 로토스코핑 기법을 활용해 자신의 경험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낸다. <미스 박 프로젝트 #1>은 2016년 촛불정국 시기 ‘미스 박’이라는 표현이 여성혐오적 멸칭으로 사용된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단순히 여성혐오적 멸칭으로만 기호화될 수 없는 역사 속 ‘미스 박’들의 사진에 콜라주/데콜라주의 방식을 통해 움직임을 부여한다. 또한 로토스코핑 기법을 통해 막춤을 추는 노년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스 박’이라는 호명이 드러내는 왜곡된 한국의 현대사를 살아온 여성들의 몸놀림에 제의적 순간을 선사한다. 제주 4.3사건을 다루는 <메이•제주•데이>는 생존한 피해자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을 바탕으로 삼는다. 영화는 이들의 그림과 증언을 교차시키며, 과거를 그린 그림에 움직임을 부여해 피해자들의 기억이 고정된 과거가 아닌 여전히 움직이는 현재의 것임을 상기시킨다.

3. 역시 홈페이지에 영화제 홈페이지엔 전문이 올라오지 않은 (프로그램북에는 있는) 프로그램 노트를 올려봅니다. 이 섹션도 제가 기획/섭외를 담당했습니다. 실험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을 모은 <애니프론트2 경계 위의 애니메이션> 섹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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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용어는 ‘살아있는’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 이는 애니메이션이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매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무빙-이미지에 대한 최초의 사례들 중엔 마레와 머이브릿지의 연속사진처럼 실제 물체의 움직임을 기록하려는 시도와 함께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 조이트로프(Zoetrope), 플립북(Flipbook), 무토스코프(Mutoscope) 등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연속적으로 보게 하여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장치들이 등장했다.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무빙-이미지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또한 이러한 장치들이 담아낸 그림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가령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전시된 조이트로프 속 말 그림은 실제 존재하는 말을 재현한 것이지 그것을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의 본질적인 속성 두 가지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애니메이션은 움직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움직임의 환영이다. 둘째, 애니메이션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


애니메이션의 속성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애니메이션의 범위에 속하는 대상은 한없이 넓어진다. 슈퍼히어로나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CGI 캐릭터들부터 과거의 괴기영화나 모험영화 속 스톱모션 괴물들도 애니메이션의 일종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애니프론트: 경계 위의 애니메이션” 섹션은 앞서 정의한 애니메이션의 두 가지 본질적 속성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의 범주를 확장하고 그 경계에 위치한 작품들을 탐색하려 한다. 본 섹션에서 상영될 여섯 작품을 거칠게 분류하자면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움직이게 한 작품들과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실재하게 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임채린의 <메이트>, 김시헌의 <부카니마: 무술(武術)>, 김시연의 <도시리듬>은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메이트>는 동판화를 사용한 작품이다.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인 셀-애니메이션과 유사한 방식으로 여러 장의 그림을 통해 제작한 작품이다. 하지만 셀-애니메이션처럼 매끄러운 그림이 아닌, 동판화의 거친 질감과 물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며, 영화 마지막에 삽입되는 동판의 모습은 작품의 물질적 성립 과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부카니마: 무술(戊戌)>의 제목은 ‘Book’과 ‘Anima’의 합성어다. 이 작품은 이소룡 등 여러 무술인들의 목소리와 함께 절권도, 택견, 주짓수, 복싱 등 다양한 무술을 소개하는 책에 삽입된 무술의 동작을 소개하는 사진과 삽화를 이어 움직이게끔 한다. 이를 통해 근본적으로 움직임의 매체인 무술을 담은 책 속의 정지된 이미지들에, 이미 내포한 움직임의 가능성을 끌어낸다. <도시리듬>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산출된 빅데이터들을 사용한다. 지도, 그래프, 그물망 등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데이터들의 그래픽 이미지는 독특한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도시를 측량하기 위해 수집되고 제작된 데이터와 그래픽 이미지가 도리어 측량하기 어려운 불균질한 운동성을 지님을 보여준다.  


김경묵의 <폐쇄회로>와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 <폐쇄회로>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수감되었던 감독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삼는다. 게임엔진을 통해 제작된 이 작품은 버려진 감옥을 배회하는 1인칭 카메라의 시점을 취함으로써 비가시화된 기억과 내면의 경험을 가시화한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은 다공성 계곡이라는 가상의 지역에서 이주해 온 CGI 캐릭터 ‘페트라 제네트릭스’가 이주 데이터센터에서 실사 인물이 연기하는 게이트키퍼와 나눈 대화를 담아낸다. '이주'라는 소재가 내포한 모종의 간극은 CG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페트라 제네트릭스'와 실사 인물들 사이의 간극으로 표현된다. 


마지막 작품인 문소현의 <완성된 몸>은 독특하게도 슬라임을 주된 재료로 사용한다. 전작들에서 클레이와 스톱모션을 주로 사용하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액체적 성질을 지닌 슬라임을 통해 고정된 사진들의 집합인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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