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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4. 2022

2022-01-04

1. 새해 첫 영화로 <드라이브 마이 카>를 봤다. 작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본 뒤 한 달 만의 재관람인데, 이번에도 컨디션이 썩 좋지 못해 조금 졸았다... 어쨌든 다시금 영화를 보며 인상적인 것은 영화에 담긴 자동차의 견고함이다. 영화속 붉은 사브 900 자동차의 자체는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허락 없이는 다른 인물의 출입을 엄격하게 막아서도 있는 것만 같다. 그와 동시에 자동차가 가후쿠를 보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자동차 사고 장면을 떠올려보자. <아사코>의 오토바이 사고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부감 숏으로 담긴 붉은 사브 900과 파란 자동차의 충돌 이후는 어떤 충격에도 가후쿠를 보호하는 자동차의 견고함을 자랑하는 것만 같다. 가후쿠의 허락으로 그의 드라이버가 된 미사키(미우라 토코)의 운전에 관해, 가후쿠는 "감속과 가속이 부드러워 중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고 말한다. 순간적으로 <기생충> 속 기택(송강호)와 박사장(이선균)의 대화가 떠올라 헛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그 영화에서 자동차는 은밀한 계략과 함께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의 선을 강조하는 공간이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의 사브 900은 외적인 위협을 막아선 채 가후쿠가 온전히 내적 갈등을 펼쳐낼 수 있도록 하는 (운전 내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가 녹음한 희곡을 듣는다는 점에서도) 공간이 된다. 가후쿠가 알지 못하는 오토의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를 타카츠키(오카다 마사키)가 이어가는 장면, 타카츠키를 내려준 뒤 가후쿠와 미사키가 선루프를 열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의 기묘한 안정감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 영화의 자동차는 영화의 데드타임이라 불리는 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운송수단이 단순히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공간을 소거한다는 질주학의 테제를 넘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드라이브 마이 카>가 그것을 처음 한 것은 아니겠지만. 하마구치 류스케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준비하던 와중에 제작된 <우연과 상상>의 첫 에피소드 절반 가량이 자동차에서의 대화로 구성된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좁은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를 투숏이 아닌 숏-리버스숏의 구도로 촬영한다는 것은, 그것이 여러 차례 나뉘어 촬영되었음을 실토하는 것에 다름 없다. 두 인물의 투숏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연과 상상>의 첫 에피소드와 달리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타카츠키가 사브 900에서 나누는 대화는 두 사람(종종 등장하는 운전자 미사키까지 세 사람)의 숏-리버스숏 구도로 촬영되었다. 대화 이후 조수석에 앉아 미사키와 대화를 나누는 가후쿠의 모습과 비교하면, 가후쿠와 다카츠키의 대화는 서로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쏟아내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기묘함은, 가후쿠의 말대로 탑승여부를 종종 잊어버릴만큼 안정감 있는 자동차의 존재로 인해, 하나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2. <드라이브 마이 카>와 정반대로 자동차를 사용하는 최신작 두 편이 있다. 하나는 레오 까락스의 <아네트>고, 다른 하나는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다. <아네트>에서 안(마리옹 꼬띠아르)가 탑승하는 리무진 자동차는끝임없이 침입하는 외부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안은 그곳에서 불타는 캘리포니아의 뉴스를 보고, 남편 헨리(아담 드라이버)의 성착취 폭로에 관한 꿈을 꾼다. 리무진 드라이버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익명의 드라이버가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안은 꿈(헨리의 성착취 폭로)과 영화 바깥(산불 뉴스)의 악몽에 시달린다. 이는 완전히 개방된 오토바이를 주로 타고 다니는 헨리가 역설적으로 외부의 공격(시위대)로부터 보호받는 공간이 그가 경찰 호송차라는 점과 대비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달리 대부분의 자동차/오토바이 장면에서 스크린 프로세스를 적극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는 더욱 극단적이다. 유명 저널리스트인 프랑스(레아 세이두)의 자동차는 종종 차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프랑스가 낸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은 이주노동자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그의 자동차는 천장이 없는 오픈카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프랑스 옆에 있는 자동차는 오픈카가 아니며, 천장이 열리는 종류의 자동차도 아니다. 심지어 자동차를 운전하는 프랑랑스의 모습 뒤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차량이 등장하다. 이는 프랑스의 불륜 상대이자 그에게 기삿거리를 얻어내기 위해 접근한 기자가, 영화 후반부에서 차 문을 열지도 않은 채 도로에서 신호 대기 중에던 프랑스의 자동차에 탑승하는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프랑스의 자동차는 그를 보호해주지도, 그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스마트폰과 블랙박스를 비롯한 카메라들로 가득한 그의 자동차는 도리어 프랑스를 위협하는 공간이자 존재다. 프랑스의 남편과 아이가 탄 자동차가 절벽에서 추락하는 장면의 스펙터클을 떠올려보자. <프랑스>의 자동차는 미디어스케이프의 스펙터클 속에서 추락하는 이에게 얼마든지 자신의 견고한 차체를 개방해 더 아래로 떨어지도록 도와주는 공간이다.


3. 넷플릭스로 공개된 마이크 플래너건의 <어둠 속의 미사>를 이제야 다 봤다. 호러팬들에게 아리 애스터와 종종 (정반대의 사례로서) 비교되기도 하는 그의 이번 신작은, 여전히 인류애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스티븐 킹의 [살렘스 롯]을 바탕으로 여러 뱀파이어/좀비 영화에서 따온 이미지로 세부를 채운 이 작품은 얼핏 <미드소마>의 반대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미스소마>가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서 지속되는 컬트 공동체를 다룬다면, <어둠 속의 미사>는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믿음은 종교나 컬트가 아님을,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보여준다. 그리고 해체된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함께 햇빛을 받으며 최후를 맞이하는 7화 마지막 장면은, 그들이 공동체를 파괴한 주범이라 낙인찍으며 일종의 형벌을 가하는 대신 회개에 가까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스티븐 킹의 소설이나 <미스트> 같은 작품이 보여준, 외부의 위협을 통해 공동체가 내적으로 이미 분열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분열된 공동체가 최후의 순간에라도 복원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이크 플래너건이 이미 <힐하우스의 유령>이나 <닥터 슬립> 등을 통해 보여준 이러한 전개가 언제까지 흥미로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전히 재밌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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