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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3. 2022

구시대적 이야기로 동시대를 말하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스티븐 스필버그 2021

*스포일러 포함


 1957년, 뉴욕 슬럼가를 철거하고 링컨센터를 짓는 계획이 실행된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살아갈 곳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리프(마이크 파이스트)가 이끄는 백인 빈민들의 갱 ‘제트파’와 권투선수 베르나르도(데이비드 알바즈)가 이끄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갱 ‘샤크파’가 곧 철거되어 사라질 구역을 두고 연일 경쟁을 벌인다. 상대 갱을 죽일 뻔한 혐의로 1년 간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토니(안셀 엘고트)는 더 이상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연히 찾은 무도회에서 만난 베르나르도의 동생 마리아(레이첼 지글러)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백인인 토니가 푸에르토리코 사람인 마리아를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베르나르도와, 결판을 낼 타이밍을 찾고 있던 리프가 결전을 벌이기로 한다. 약속된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토니는 마리아와 자신을 위해 그들을 말리려 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모티프를 그대로 따온 동명의 뮤지컬과 1961년도 영화의 리메이크다. 1971년 <대결>로 데뷔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50년 만에 처음으로 연출한 뮤지컬 영화이기도 하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이야기는 낡았다. 구시대적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반에 둔, 1957년에 첫 선을 보인 뮤지컬의 이야기를 거의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몇 구시대적인 장면에 수정을 가하고, 스코어의 순서를 바꾸긴 했지만, 큰 틀에서 이야기가 변화하지 않았다. 새로이 ‘업데이트’된 장면에도 현재의 관객들은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극 후반부 아니타(아리아나 데보스)가 토니를 찾아 발렌티나(리타 모레노)의 가게를 찾는 장면을 보자. 샤크파와의 싸움으로 리프를 잃은 제트파의 마초들은 그들과 함께 있던 백인 여성들을 가게 밖으로 쫓아내고 아니타를 강간하려 한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내려온 발렌티나가 그들을 말리고, “자라서 강간범이 되었구나”라고 면박을 주자 그들은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1961년도 영화에서 이 장면은 강간을 은유하는 댄스 시퀀스로 진행되었다. 스필버그는 이 장면을 뮤지컬로 처리하는 대신 제트파의 행위를 강간이라 명시하고, 그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방식을 택했다. 격렬한, 꽤나 마초적인 운동성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이러한 연출은 분명 강간을 은유로 은폐하는 것에 비해 나은 선택이지만, 분명 이 장면의 폭력성이 불쾌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작품 자체를 현대적 혹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수정하는 대신, 가능한 그대로 옮겨오는 것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가깝다. 이러한 순간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어진다. 물론 폭력적인 불쾌함이 계속된다는 것은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닳고 닳은 모티프를 각색이나 변형 없이 고스란히 가져온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가깝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단점이 아니다. 이 영화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전은 구시대적인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해 선보인다던가, 구시대적인 구김살을 매끈하고 세련되게 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형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미지의 힘을 극대화하여 그것이 현대에도 통용되는 이야기임을 증명하는 것이 스필버그가 스스로 설정한 이 영화의 과업으로 다가온다. 국가-자본은 백인 빈민과 유색인 이민자 모두를 몰아내려 하고, 경찰은 백인의 손을 들어주는 것만 같지만 은연중에 두 집단의 공멸을 유도한다. 구역 없는 갱들이 쫓겨난 자리에 세워질 건물은 부르주아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와 발레가 상연되는 링컨센터다. 도시 빈민을 짓밟고 예술의 전당이 건립된다는 아이러니를, 스필버그는 폐허가 된 슬럼의 밑바닥에서 링컨센터가 건설 중이라는 표지판으로 상승한 뒤 버드-아이 뷰로 폐허와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공간을 조망하고 다시금 땅으로 내려와 지하로 통한 문을 박차고 나오는 청년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마치 전쟁영화에서 폐허가 된 무인지대와 그 끝의 참호를 보여주는 것처럼 촬영된 영화의 오프닝 숏은, 비록 1957년을 배경으로 한 1957년도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끌어오고 있음에도, 그것이 현재에도 통용되며 반복되는 이야기임을 납득하게끔 한다. 

 스필버그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진 켈리나 빈센트 미넬리의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처럼 보이도록 찍었다. 스필버그와 야누스 카민스키는 코닥 35mm 필름을 사용했고, 테크니컬러에 DI를 맡겼다. 1950~60년대 테크니컬러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던 무수한 렌즈 플레어는 이 영화의 빈티지한 룩이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님을 명시하는 장치처럼 사용된다. 동시에 이 영화 속 뮤지컬 시퀀스는 통상적인 뮤지컬 시퀀스처럼 촬영되지 않았다. 롱테이크로 인물의 동선을 쫓아가는 <라라랜드>나 <위대한 쇼맨> 같은 최근의 뮤지컬 영화와도, 고정된 카메라 혹은 트래킹을 통해 춤을 담아내는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와도 촬영과 편집에 있어 같은 방법을 공유하지 않는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촬영과 편집은 차라리 <워호스>와 <레디 플레이어 원>의 전투, <더 포스트>의 유려한 다자대화 장면, <우주전쟁>이 파괴되는 도시와 피난 가는 사람들을 담아내며 공포를 조성하던 방식 등과 더욱 닮아 있다. 다시 말해, 스필버그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뮤지컬 영화처럼 찍지 않았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그가 수많은 전작에서 스펙터클 – 그것이 거대한 전투이건 긴박한 대화의 몽타주이건 – 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 속 군무 장면을 ‘뻘짓’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영화의 후원의 밤 무도화 장면을 보자. 카민스키의 카메라는 롱숏으로 군무의 전체와 동선을 보여주지만 춤의 세부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라라랜드>의 고속도로 군무 장면에서 활용된 롱테이크가 각 댄서들의 동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운동성을 드러낸다면, 이 장면에서 전체와 세부를 쉼 없이 오가고 섞임과 나뉨을 반복하는 동선 속에서 각 캐릭터들이 수행하는 안무 동작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색/검은색 계열과 황색/갈색 계열의 옷으로 구분되는 두 집단의 움직임만이 카메라에 담길 뿐이다. 그 움직임은 단순히 제트파와 샤크파,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 자체로서, 인종갈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재의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들의 강렬한 운동 사이에서 정지상태로 존재하는 토니와 마리아, 그리고 동작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안무와 입맞춤은 사랑과 죽음에 대한 강렬한 충동으로,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이번 영화까지의 이야기와 주제를 관통하는, 이야기 너머의 충동으로서 제시된다. 이 장면 이후의 전개는 원작 뮤지컬이나 61년도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프를 안다면 쉬이 알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무도회 장면 이후의 모든 장면은 무도회 장면에서 예견된다. 어떻게 보면 무도회 장면에서 예견된 토니와 마리아, 리프와 베르나르도, 제트파와 샤크파의 운명을 담아내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앞서 수차례 말한 것처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이야기는 구시대적이며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기 때문이다. 스필버그는 그 익숙하고 낡은 이야기를, 강력한 직구로 관객에게 던진다. 유려하다 못해 완벽한 이 영화의 숏들은 어차피 사라질 자신의 구역을 두고 경쟁하는 마초들과 자신의 오빠를 죽인 남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마리아의 순애보를 어떻게든 지금의 관객 앞에 위치시킨다. 복잡한 안무와 이동을 더욱 복잡한 방식으로 명쾌하게 전달하는 카메라 무빙과 편집 사이에 완벽한 몇 프레임이 계속 등장한다. 무도회장의 정신없는 군무 사이에서 서로 으르렁 거리는 리프와 베르나르도의 얼굴 사이에 토니의 얼굴이 놓이는 순간, 토니와 마리아가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구)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아니타와 푸에르토리코 여성들이 거리를 달리며 춤추는 순간, 총을 들고 샤크파와의 결전에 나서려는 리프를 말려던 토니가 다투다가 두 사람이 맞잡게 되는 리볼버의 모습, 삶과 사랑에 관해 대화하던 마리아와 아니타의 얼굴이 각기 두 개의 거울에 완벽히 들어가는 순간, 제트파와 샤크파가 소금창고에서 결전을 벌이기 위해 입장하는 장면에서 그림자를 보여주는 부감 숏, 모든 것이 끝난 뒤 반쯤 무너진 건물의 비상계단 뒤에서 남은 이들을 담아내며 상승하는 카메라… 이 영화의 완벽한 이미지는 그것을 일일이 언급하기엔 영화의 모든 숏을 묘사해야 할 지경이다. 물론 안셀 엘고트의 연기는 – 영화 외적인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  이 영화의 가장 큰 흠이지만.

 스필버그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변형하는 수정주의적 접근 대신 텍스트 자체의 동시대성을 믿고 그것을 극대화한다. 스필버그는 “슬프게도 어떤 의미에서는 (영토의 분할만이 아닌) 인종적 분할에 대한 이야기가 1957년 보다 오늘날의 관객들과 더 관련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분열은 봉합되는 대신 확대되었다. 스필버그가 1957년의 낡은 이야기를 다시금 끄집어낸 것은, 둘로 갈린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분열이 더욱 복잡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영화 속 분열 또한 단순히 제트파와 샤크파 둘 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토니는 ‘킹 이집션파’라는 다른 갱과 싸우다 감옥에 갔다. 개발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아니타 같은 사람,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는 베르나르도처럼 한 집단 안에서도 각기 다른 입장이 공존한다. 뉴욕의 히스패닉 이민자를 다룬, 뮤지컬은 모르겠으나 영화로서는 정말 별로인, 존 추와 란 미누엘 미란다의 <인 더 하이츠>를 떠올려보자. 갈등의 복잡함은 늘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압축되고 단순해졌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갈등의 복잡함을 진단한다. 갈등의 원인은 이제 <우주전쟁>의 외계인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더 포스트>에서처럼 진실을 보도하는 것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도,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처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토니의 죽음 이후 제트파와 샤크파가 그의 시신을 함께 옮기는 것은 화합의 증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과 사랑으로 잠시 봉합된 순간일 뿐이며, 토니를 쏜 치노(조쉬 안드레스 리베라)는 1년 전의 토니처럼 감옥에 갔다. 치노가 감옥에 다녀오는 사이 웨스트 사이드는 다시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구역을 놓고 싸우는 이들이 들어찰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두 가문의 화해와 화합으로 끝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비극은 사랑을 통해 죽은 이들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체포되는 모습을 비상계단 너머로 지켜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비극은 비극 자체로 마무리된다. 스필버그는 그 비극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진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60여 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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