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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27. 2022

전략적인 혹은 자학적인

<킹메이커> 변성현 2021

*스포일러 포함


 인제에서 약방을 하던 서창대(이선균)는 우연히 신민당 김운범(설경구)의 선거유세 현장을 마주친다. 창대는 김운범과 뜻을 함께하고자 그의 선거사무소에 찾아가고, 그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뒤에서 돕는다. 목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그림자’라는 별명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거 승리를 이끌어내는 선거전략가가 된다. 그리고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 신민당 경선에서, 당의 비주류인 김운범을 대선후보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이후 다시 한번 설경구와 손을 잡은 변성현 감독의 신작 <킹메이커>는 한국 정치사의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김운범은 김대중이고, 서창대는 1961년부터 김대중의 선거캠프에서 일한 선거전략가 엄창록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킹메이커>는 그간 주요 선거 시즌마다 등장했던 정치영화, 가령 한재림의 <더 킹>, 우민호의 <내부자들>, 혹은 사극을 경유한 추창민의 <광해, 왕이 된 남자> 등과는 조금은 다른 노선을 가져간다. 한국 정치사의 여러 국면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등장하고,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유권자를 계몽시키고 투표를 독려하거나 이상적인 대통령 상을 제시하는 등의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가령 김대중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 김운범의 됨됨이를 치켜세운다거나,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올바름을 설파한다던가 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첫 만남에서 “빨갱이 세 글자로 선거를 이기려 드는 여당에 맞서려면 좋은 정책만으로는 안 된다”는 서창대의 말에, 김운범은 “정의가 바로 사회의 질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받아치고, 서창대는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의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라는 말로 되받아친다. 이 장면은 <킹메이커>의 성격을 드러내 준다. <킹메이커>는 정치와 선거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일반적인 정당정치에 관하여) 정치적인 발언, 주장, 계몽이 영화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의 정치판, 선거판과 어떤 변절자들에게 메시지메 보내려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는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라고 김운범을 설득했던 서창대가 수단만 남아버린 인물로 변화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서창대의 모티프가 된 엄창록이라는 인물은 10여 년 간 김대중과 함께 일했으나 1970년 신민당 경선 이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으로 이적했으며, 1971년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엄창록은 ‘네거티브 전략’의 귀재이자 ‘지역갈등의 최초 설계자’로 한국 정치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킹메이커>의 전개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변성현 감독이 전작 <불한당>에서 뽐낸 소년만화스러운 연출은 이번 영화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서창대의 활약은 강한 명암대비를 만들어내는 조명으로 표현되고, 적당한 유머, 당시 뉴스릴을 묘사한 화면, TV와 극장 스크린 등 당대 중요한 영상매체를 넘나드는 방식 등을 통해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풀어 나간다. 이 과정은 ‘그림자’라는 별명을 지닌 서창대가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던 상황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해낸다. 다시 말해, 서창대라는 인물이 ‘정당한 목적’을 잃고 선거에서 승리하는 전략이라는 ‘수단’만을 갖게 되는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킹메이커>는 서창대를 악마화하지 않는다. 김운범과 함께 하면 “세상이 바뀌는 꼬라지”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던 이북 출신의 선거 전략가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일을 자신을 필요로 하던 곳에 가서 수행한 인물이다. 극 중 서창대는 자신에게도 대의가 있으며 김운범의 대의가 자신의 것과 공명한다고, 중앙정보부 이 실장(조우진)과 일하면서도 말하지만, 그는 수단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자 그 스스로가 선거판의 수단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처음부터 수단일 뿐이었다. 서창대가 자신의 약방을 찾아온 동네 주민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오프닝을 떠올려보자. 김운범에게 보낼 편지를 쓰면서 동네 주민에게 고민 해결 수단을 알려주는 서창대에 모습에서, 서창대가 지닌 방향성은 ‘이기는 방법’에 치중되어 있다. 그가 폭발물 자작극을 벌이는 것도, 선거판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활동하는 것도, 71년 대선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도, 여기선 어떤 대의도 찾을 수 없다. 즉 서창대라는 인물은 경쟁사회 속에서 승자의 방식이 공정에 가까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공정은 아니지만.

 영화는 서창대와 김운범을 대비되는 인물로서 다루지 않는다. 변성현 감독은 전작들에서처럼 인물들을 지극히 기능적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기능적이라는 말은 딱히 부정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한당>에서 현수와 태호 사이의 감정을 강조하는 방식이 기능적이고 기계적이었다고, 그것이 부정확한 감정을 표현한다거나 어떤 깊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니까. <킹메이커>에서 김운범은 서창대라는 인물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적인 인물로서 사용된다. 즉, 김운범은 올바르고 정의로운, 대의를 놓치지 않는 참된 정치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킹메이커>에서 김운범이 상대하는 이들이 독재자와 그의 끄나풀들이기에, 김운범과 신민당의 정치인들은 ‘상대적으로’ 상식적인 정치인으로 다뤄질 뿐이다. 물론 김대중, 김영삼, 박정희 등의 실명을 사용하는 대신 당명과 역사적 상황만을 끌어와, 진영 간의 대비를 통해 김운범 진영의 ‘상대적인’ 괜찮음을 조성하고 있는 것도 있다. 여하튼 두 진영 모두, 서창대라는 인물의 궤적이 가능하게끔 하는 장치에 가깝게만 다뤄지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중심은 서창대의 ‘이기는 정치’라는 전략이니까. 

 변성현 감독은 <킹메이커>를 통해 현실정치에 말을 얹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적어도 영화에 드러난 바는 그렇다. <내부자들>이나 <더 킹>처럼 더러운 정치판을 더럽게 묘사하는 것도, <광해, 왕이 된 남자>처럼 대통령상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극 중 악인에 의해 투표하지 않는 국민을 ‘개돼지’라 부르며 투표를 독려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서창대라는 인물을 통해 ‘이기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이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되어버린 지금을 슬쩍 짚고 있을 뿐이다. 정치 소재의 영화가 꼭 현실정치에 대해 발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인물과 사건을 가져온 것에 비해 아무런 발언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이 정말 많은 발언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잡설에 가까운 것들로 채우고, 그럼으로써 많은 냉소를 쏟아내지만 거기에 그치고 마는 것처럼, <킹메이커>는 냉소 대신 서창대라는 인물이 진영을 넘나드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자학을 보여주고만 있을 뿐이다. 에필로그에서 1988년의 서창대는 언론을 통해서만 접한 김운범을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한다. 이것은 스스로 수단이 되어버린 서창대의 마지막 자학이다.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말에서 ‘정당한’을 잃어버린, 아니 처음부터 그런 것을 찾지 못했던 것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할 때의 자학. <킹메이커>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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