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도깨비 깃발> 김정훈 2020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며 망국의 기운이 가득하던 고려 말, 한 장수가 왕실의 보물을 훔쳐 먼바다에 숨겨둔다.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의 무신이었던 무치(강하늘) 일당은 바다를 표류하던 중 해적 해랑(한효주) 일당에게 구조된다. 티격태격하며 바다에서 살아가던 그들은 우연히 고려 왕실의 보물이 숨겨진 지도를 입수한다. 보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해랑과 무치 일당, 그리고 탐라의 왕이 되기 위해 보물을 탐내는 부흥수(권상우) 일당의 싸움이 벌어진다. 2014년 개봉했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속편을 표방하는 <해적: 도깨비 깃발>은 전편과 이어지는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두 작품 사이의 연관성은 고래가 등장한다는 것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뿐이다. <도깨비 깃발>의 연출은 <쩨쩨한 로맨스>, <탐정: 더 비기닝> 등을 연출한 김정훈 감독이 맡았다.
<도깨비 깃발>은 아무런 야심이 없어 보인다. 전작 <바다로 간 산적>이 테마파크적인 영화를 표방하며 다양한 VFX를 토대로 액션과 유머를 선보인 것과 같은 방향을 택하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러한 욕심마저 보이지 않는다. 무치와 해랑, 악역인 부흥수를 비롯한 주연은 물론 막이(이광수), 한궁(오세훈), 해금(채수빈) 등 모든 캐릭터의 이야기는 전체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손쉽게 희생되거나, 웃음을 유발하지 못하는 옛된 유머감각을 선보이는 것에 허비된다. 게다가 캐릭터의 동기나 동선과 상관없이 붙어있는 장면들에선 이 영화가 보물을 찾아 떠난 해적의 이야기라는 전체적인 틀조차 제대로 운용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려제일검’이라는 무치가 처음 액션을 선보이는 장면에서 부분적인 슬로모션을 남발하는 원테이크 촬영은 끔찍할 정도로 무성의하고, 현대어를 구사하는 무치와 사극 말투를 구사하는 해랑 사이의 갭은 영화 내내 기묘한 청각적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아예 후시녹음 과정에서 녹음이 잘못된 것인가 싶을 정도로 종종 울리는 대사들, 특히 막이와 부흥수의 대사에서 종종 등장하는 잘못 녹음된 듯한 사운드는 대사 톤을 잘못 잡은 것을 넘어 이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를 의심케 한다. 더군다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나 <라이프 오브 파이> 등 레퍼런스로 삼았을 법한 영화들이 연상되는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앞선 영화들과의 즉각적인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교의 승자는 당연히 레퍼런스의 대상이 된 영화들이다. 물론 전작 또한 <캐리비안의 해적>을 상당 부분 레퍼런스로 삼고 있으나,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시대적 상황이나 유해진이 연기한 철봉과 같은 개성 있는 캐릭터를 통해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냈었다.
<도깨비 깃발>에는 그러한 돌파구가 없다. 아니, 그러한 돌파구를 마련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김성오가 연기한 캐릭터 강섭이 홀로 고군분투하지만, 전작의 유해진처럼 영화 전체의 톤을 바꿀 잠재력을 갖진 못했다. 영화의 VFX를 맡은 덱스터 스튜디오의 최대 히트작인 <신과 함께: 인과 연>이 공룡이 등장한 장면에서 <쥬라기 공원>, <쥬라기 월드>를 레퍼런스로 삼았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며, 그것을 따라 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도깨비 깃발> 또한 그러한 레퍼런스와 올드한 유머의 향연으로 가득할 뿐이다. <신과 함께> 시리즈는 원작이 지닌 팬덤과 기본적인 서사의 뼈대, 캐릭터 설정이 존재했지만, <도깨비 깃발>에는 그것마저 없다. 어디선가 본듯한 VFX로 점철된 이미지뿐 아니라 사운드트랙 또한 그러하다. <도깨비 깃발>의 사운드트랙에서 한스 짐머와 클라우스 바델트가 만들어낸 “He’s a Pirate”의 선율이 미약하게 들려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도깨비 깃발>에는 (다른 영화는 물론 배우들의 영화 밖 이야기까지 포괄하는) 레퍼런스가 없는 부분이 없고, 그 레퍼런스가 무엇인지 스스로 노출하며 자신의 빈약함을 증명해낸다. 이 영화의 각본가, 제작자, 기획자, 감독에게 궁금하다. 이 영화를 어떤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액션도, 유머도, 로맨스도, 비주얼도, 그 무엇 하나 성공하지 못한 이 영화는 테마파크의 외연을 표방하는 영화가 어디까지 황폐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256억이라는 대자본이 투입되었음에도, 이 영화의 모든 부분은 영화의 흥행을 바라지 않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