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세컨드> 장이머우 2020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시기의 중국, 황량한 사막을 걷는 장주성(장역)은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그가 보려던 영화는 이미 상영을 끝내고 다음 마을로 필름을 배송할 준비 중이다. 이를 지켜보던 장주성,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소녀 류가녀(류 하오춘)이 필름 한 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를 잡은 장주성, 하지만 류가녀는 다시 필름 통을 들고 2농장 마을로 달아난다. 장주성은 국수가게에서 류가녀를 다시 붙잡고, 마침 자리에 있던 영화상영원 판 기사(범위)에게 필름을 넘긴다. 하지만 나머지 필름 중 중국 공산당을 홍보하는 뉴스릴 ‘중국뉴스’가 담긴 필름 한 통이 배송사고가 나며 영화가 상영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장주성은 자신의 어린 딸이 담긴 중국뉴스 22호를 보기 위해 판 기사를 돕고, 다른 이유로 필름이 필요한 류가녀는 계속 필름을 훔치려 한다.
그간 여러 차례 문화대혁명 기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연출했던 장이머우의 신작 <원 세컨드>는 자신의 딸이 담긴, 10분의 뉴스릴 중 단 1초를 보기 위해 탈옥한 사람의 이야기다. 중국뉴스 22호와 함께 상영되는 영화는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의 활약을 담은 1964년작 <영웅아녀>로, 당시 중국 공산당의 프로파간다 영화다. <원 세컨드>는 다소 억울하게 옥살이 중인 장주성과 인민들에게 혹독한 삶을 살게끔 한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인 류가녀의 삶을 담아낸다. 극 중 마을사람들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상영되는 영화를 손꼽아 기다린다. 영화 상영은 고된 노동을 잠시나마 잊게 해줌과 동시에, “국가를 위한 노동”이라는 이념을 심어주는 이벤트다. 때문에 이 이벤트를 주관하는 영화상영원 판 기사는 상당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 권력이라 해봤자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영화 상영을 위해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 정도지만.
하지만 <원 세컨드>에서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긴 어렵다. 문화대혁명은 영화의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영화는 장주성이 어쩌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의 딸은 왜 14살의 나이에 고되게 일하고 있는지, 류가녀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있는지, 2농장의 주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의 전사는 사라진 채, 딸이 담긴 1초의 필름을 목격하려는 장주성과 동생을 위해 필름 전등갓을 만들어주려는 류가녀의 이야기만이 남는다. 장이머우는 칸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서 보여준,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어느 시골에서 벌어지는 야외상영을 담은 단편을 조금 더 이야기를 갖추어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인민을 노동력, 생산력으로 치환한 셈법을 선보이던 당대적 상황은 이 이야기에서 낄 자리를 잃는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굳이 문화대혁명 시기의 이야기일 필요가 없다. 필름으로 영화가 상영되던 60년대 한국의 한적한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도, 비슷한 시기의 유럽의 어느 시골이어도, 인도나 미국이어도 상관없다. 단순히 필름이 지닌 사진적 기록의 성격, 물질적 성격을 추억하기 위한 영화라기엔, <원 세컨드>보다 훌륭한 영화는 차고 넘친다.
물론 <원 세컨드>가 베를린 영화제 상영 일주일 전에 갑작스레 상영 취소 통보를 하고, 이후 재편집 및 재촬영되어 개봉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중국 당국의 검열이 가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하긴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혹스러울 정도로 뻔뻔한 영화의 에필로그는 추가촬영을 통해 추가된 장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나온 결과물로서의 영화는 필름이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 외엔 무엇도 하지 못한다. 장주성이 칼로 판 기사를 협박해 자신이 딸이 나온 1초를 끝없이 돌려보는 순간, <원 세컨드>라는 제목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만 같다. 시간은 단 1초일지라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가 디지털 파일의 형태를 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원 세컨드>는 그 허망함을 강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영화감독이라면 으레 뽐내곤 하는, 영화(더 정확히는 필름)에 대한 애정고백과 익숙한 신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