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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13. 2022

다른 세계로 달려가기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2021

*스포일러 포함


  1973년의 LA, 15살의 아역배우인 개리(쿠퍼 호프만)는 학교 졸업사진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알라나(알라나 하임)에게 반하게 된다. 알라나는 개리의 관심을 무시하려 하지만, 바쁜 개리의 부모님을 대신해 뉴욕에 있는 TV쇼에 매니저 대행으로 함께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관계는, 개리가 물침대 사업을 시작하며 다방면으로 얽히게 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얼핏 <부기 나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쇼 비즈니스에 투신한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원로 배우인 잭 홀든(숀 팬)이 <원한의 도곡리 다리> 속 한 장면을 재현하는 장면처럼, 극 중엔 70년대 할리우드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이 즐비하다. 동시에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리코리쉬 피자>의 표면적인 설정은 197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로맨틱 코미디의 형식 안에 담아내려는 것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도리어 1970년대하면 떠오르는 요소들을 영화에서 배격한다. 부분적으로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삼지만 젊은 시절의 그가 탐닉하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이미지 대신 싸구려 TV쇼와 프로파간다 전쟁영화를 추억하는 늙은 배우가 등장할 뿐이다. 대마초와 LSD 등의 약물, 베트남전, 각종 인권운동 등 70년대하면 바로 떠오르는 히피 문화의 구심점이 되는 요소들 또한 언급은 되지만 개리와 알라나의 이야기로 스며들지 못한다.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사건 중 그들의 이야기에 크게 연관되는 것은 석유파동 정도다. 개리의 물침대 사업이 그로 인해 망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또한 개리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장치 정도로만 등장할 뿐 그의 물침대 사업이 망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가 주목하는 것은 1970년대 미국의 노스탤지어를 구성하는 익숙한 요소들, 즉 당대에는 주류가 아니었을지라도 현재 시점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에 속하지 못했던 비주류 인생을 담아내려는 것도 아니다. 주류 문화와 마이너리티 양자 어느 쪽에도 위치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대화 장면의 숏-리버스 숏 구도 중 청자의 신체 일부(주로 뒤통수와 어깨 부근)가 카메라에 잡힌 상태로 등장하는 숏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드러낸다. 이 숏들은 카메라보단 프레임에 포커스 아웃된 채로 잡혀 있는 신체를 시선의 주체로 상정한다. 육화된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숏들에서 시선의 주인은 대부분 알라나와 개리다. 두 사람은 주류와 마이너 양자의 시선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 이후 중동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까지를 포괄하는) 전쟁, 석유,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남성적 주류 문화와, 마약, (남성중심적) 성해방과 자유 등으로 표상되는 역시나 남성화된 마이너 문화 양쪽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개리는 주류로의 편입을 원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15살의 나이인 그는 연기와 사업을 통해 상징/자본 권력을 얻고자 계속 노력한다. 영화 후반부, 시장선거에 출마한 시의원 조엘(베니 샤프디)의 선거캠프에서 일하게 된 알라나를 돕던 개리는 핀볼 금지법이 폐지될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바로 핀볼 사업을 계획한다. 항상 알라나가 운전하던 차를 타던 개리가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장면은 알라나와의 관계에 앞서 주류적 남성성의 획득을 우선시하는 개리의 선택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알라나의 주변 남성들은 주류적 남성에 편입되지 못한 인물이다. 실패를 거듭하는 개리는 물론, 개리의 동료 배우인 랜스(스카일러 거손도)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이기에 알라나의 유대인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클로짓 게이인 시의원 조엘은 자신의 “비(非) 남성적인 사생활”을 감추려 한다. 한편 당시 할리우드의 ‘하드 보디’를 대리하는 듯한 배우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의 과장된 마초적인 면모와 전쟁영웅을 연기했던 왕년의 스타 잭 홀든의 역시나 마초적인 면모는 주류 남성성의 유해한(toxic) 면모를 드러낼 뿐이다. 주류적 남성성과 마이너적 남성성으로 양분된 남성적인 세계, 고쳐 말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부기 나이트>의 포르노 업계,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개척시대 석유 업계, <마스터>의 사이비 종교 등을 통해 탐구해온, 남성성을 통해 기술된 미국이라는 세계가 알라나를 둘러싸고 있다. 알라나의 삶과 얽혀버린 개리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아직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 사람이다.

 영화 속 육화된 시선이 두 사람에게 주로 허락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만이 남성적으로 기술된 미국이라는 세계를 반성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출현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 전작 <팬텀 스레드>에서 우드콕의 관음증적 시선이 알마의 독버섯 요리를 통한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로 인해 거두어지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던 것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리코리쉬 피자>은 시선의 주체를 개리에 한정 짓는 대신, 두 주인공을 동일한 시선의 주체로 상정하고 노스탤지어를 구성하는 기존의 시선-운동과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게 함으로써 반성적 시선-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후진 장면이다. 석유파동으로 자동차들이 멈추던 시기, 트럭을 타고 존 피터스의 집에 물침대를 배달하러 갔던 알라나와 개리 일행은 어느 언덕에서 연료가 떨어져 버린다. 운전대를 잡은 알라나는 언덕의 경사를 이용해 후진으로 주유소가 있는 곳까지 운전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남성적 문화의 실패로 인한 정지상태를 후진으로 벗어나는, 정면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대신 백미러를 경유한 시야를 통해 바깥으로 되돌아나가는 다른 방향으로의 운동이다. 3분가량 이어지는 이 후진 장면은, 영화 속 전쟁영웅을 재현하는 잭 홀든의 오토바이에서 튕겨져 나왔던 알라나가 후진을 통해 남성적으로 기술된 기존의 세계를 폐기하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 장면 이후 철딱서니 없는 인물들처럼 기름통을 들고 자위하는 듯한 행위를 하는 개리와 친구들, 그리고 상점의 유리창을 깨부수다가도 지나가던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존 피터스가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알라나의 시선에 들어온다. 이 장면에서 알라나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시장 후보 조엘의 광고를 보고 선거캠프에 합류해야겠다는 충동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리코리쉬 피자>는 로맨틱 코미디다. 이상하게도 알라나와 개리는 두 사람의 파트너쉽이 연애라는 것과 무관한 것처럼 행동한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두 사람 모두 일치하는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알라나의 마음이 기울었을 땐 개리는 사업에 빠져 있고, 개리의 마음이 기울었을 땐 알라나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개리가 경찰의 오인으로 긴급체포 되었을 때, 잭 홀든의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알라나가 오토바이에서 떨어졌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간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들이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 그리고 그들이 함께 달려 나가는 모습이다. 이들은 어디로 달려가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곳이 수영복 차림의 여성들로 가득한 할리우드 스타의 파티장도, 전쟁과도 같은 사업가들의 영역도, 오컬티즘에 가까운 정치적 집회가 벌어지는 길거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들 앞에 그들이 보낸 1973년의 세계와는 다른 무엇이 있을 거란 바람만이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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