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이 넘게 불면증과 싸웠다. 자려고 누우면 새카만 어둠 속에 무언가 서 있는 것 같았다. 피곤에 절어 잠이 쏟아지는 날에도 눈을 감으면 귀에다 누군가 왁-하고 소리를 지른다. 귀신을 믿지도 않고 그런 존재를 눈으로 본 적도 없지만 그런 밤이면 잠드는 게 너무 무서웠다. 이십 대 중반을 지나면서 종종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다리에 쥐가 나고, 쥐를 풀려고 몸을 비틀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목이 쉬게 소리쳐도 목소리는 입 밖으로 뱉어지기는커녕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 날은 밤새 눈을 뜨고 어둠 속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부모님은 아침에 눈물범벅이 된 나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흔들어서 공포 속에서 끄집어내 주었다.
또 어떤 날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비친 그림자가 나를 괴롭혔다. 밖에 누가 있나? 도둑이 든 건 아닐까? 저 창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나를 죽이면 어떡하지. 그림자는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베란다 밖 창문은 다 닫아놔서 집에 바람 한 점 불 수 없는데 저 그림자는 왜 흔들리지? 자세히 보니 사람 그림자 같기도 하고, 곁눈질로 볼 땐 끊임없이 흔들리다가 몸을 일으켜 창문을 바라보면 그림자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런 날은 더 잘 수 없어서 일어나 벽을 보고 앉는다.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서 명상을 해 본다. 명상이 도움이 되고 말고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그저 무기력하게 누워서 나를 짓누르는 천장을 견딜 수 없을 뿐이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물으신다.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꾼 거냐고. 혹은 누구랑 통화라도 한 거냐고. 어느 날부턴가 자다가 혼잣말을 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잠꼬대가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웠다. 몽유병처럼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이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했다. 아주 가끔 그렇게 혼잣말을 하다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 깰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가족들에게 ‘이제 자려고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적어도 내가 이런 증상을 자각하고 있을 때는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의사인 J는 이런저런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나에게 조현병이 의심된다고 했다. 제대로 진찰해 본 것은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으니 하루빨리 병원에 가서 제대로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 말을 들은 날부터 전보다 더 불안이 심해졌다. 길을 걸어도 뒤에 누가 있는 것 같고, 처음 보는 사람도 괜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조현병일까. 나는 그냥 미친놈인 걸까. 병원에 갔다가 내가 미친 걸 모두가 알면 어쩌지. 혹시라도 준비하던 시험에 붙으면 정신병력이 결격 사유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의 늪에 빠져 점점 더 숙면하는 삶에서 멀어졌다.
상담을 받았다는 건 차마 부모님께 말할 수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 부모님이 얼마나 무너져내릴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성격도 점점 날카로워졌다.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비슷한 패턴으로 상처를 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피했다. 피하지 못하면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섰다. 상대는 작은 일에도 날을 세우는 나를 더욱 못마땅해했다. 누구에게도 이런 공포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얼마나 큰 공포가 밀려오는지 도저히 설명할 재간이 없다. 운 좋게 잘 설명해서 누군가 이해해 주더라도 ‘그래도 푹 자야지’ 하는 대답을 듣는 게 전부였다. 나라고 그러고 싶지 않은 게 아닌데.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노력해 보겠다’는 말로 상황을 벗어나 본다.
얼마 전, 헤르만 헤세의 <밤의 사색>을 추천받았다. 밤마다 내가 떠올리던 온갖 생각, 망상, 후회를 헤세는 ‘사색’이라는 말로 묶어두었다. 독일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만행을 보며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시를 받아야 했고, 무력한 자신을 탓하며 그의 내면은 곪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자연으로의 도피는 헤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더불어 밤은 거친 삶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랑, 인생, 기억을 이야기하며 헤세는 지나간 날을 추억하고 현재를 살아내며 드는 생각, 미래에 대한 고민 등을 글로 옮겼다. 결은 다르지만 밤마다 내 머리속을 두드리는 생각과 비슷한 점도 있었다.
헤르만 헤세는 ‘행복’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은 덧없고 잔인하고 어리석지만 그럼에도 화려하다. 인생은 인간과 인간의 정신을 비웃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은 인간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행복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많은 이유를 떠올리며 삶이 온통 불행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행복이 뭔지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법륜스님이 강의하는 행복학교에도 다녔다. 몇 년 동안 행복학교를 다녔지만 여전히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고, 오히려 불행은 잊을 만하면 장대비처럼 삶을 적셔왔다.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행복에 대한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뻔한 소리를 들으려고 이런 강의를 찾아본 게 아닌데, 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행복은 그 뻔한 말속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악몽을 꾸고 하루에 세 시간도 푹 자지 못한다. 꿈에서 내내 쫓기고, 도망 다니고, 울고, 소리를 지른다. 길게 자 보려고 열한 시에 누우면 12시 반, 3시, 4시 반에 꼭 눈이 떠진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는 동시에 늘 누군가가 있다. 하지만 밤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불면증은 온밤 내내 그저 나를 훑고 지나갈 뿐이다. 헤르만 헤세처럼, 밤마다 계속되는 사색의 조각을 모아 머리맡에 놓고 잠을 청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