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여름 Jul 11. 2022

나, 머리 쓰는 거 좋아했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탈출할 거야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수학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문제를 푸는 게 싫지도 않고, 그렇다고 재미를 느끼지도 않는 수준의 애정이었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나는 머리 쓰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 때는 제일 잘 나온 모의고사 점수가 80점대 후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려운 문제가 나왔을 때 적어도 포기하거나 찍지는 않았고 어떻게든 '푸는 척'이라도 했다. 머리 쓰는 데엔 영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요즘은 머리를 쓰고 싶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심지어 처음 방탈출을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방탈출 카페가 조금씩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몇 번 해 보았지만 딱히 재미있지도 않았고 탈출한 후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렇게 방탈출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갈 때쯤이었다. 21년 새해를 맞아 동기들을 만났다가 '꼬레아우라' 테마를 접하게 되었다. 그 날이 이 모든 난리의 시작이라고 확신한다. 가슴 벅찬 스토리와 잘 짜여진 문제, 실감 나는 인테리어, 그리고 완벽한 서사까지. 오랜만에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 하루가 저물 때까지만 해도 그날 한 것이 내 인생 방탈출 테마가 될 줄은 몰랐다.


 좋아하는 것이 생긴다고 삶에 활력이 도는 것은 아니다. 방탈출을 하지 않는 날들의 나는 그저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려고 애쓰는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일주일 스케줄은 오로지 방탈출에만 맞춰져 있다. 그 하루를 위해 컨디션을 조절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며, 날짜를 센다.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시간과 자금이 한정적이라는 게 이렇게 통탄스러울 때가 없었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이런 심정일까.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애정을 쏟는 대상에게 기꺼기 모든 자본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 말이다. 원래도 쇼핑을 엄청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씩 갖고 싶은 것에는 큰돈을 써 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이거 몇 잔이면 방탈 몇 번을 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뿐이다.


 아무래도 비용이 꽤 드는 취미라서, 같이 하는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하고 회비까지 걷기로 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잘 버텼다. 미리 날짜를 정하고 가고 싶은 테마를 예약하고 나면 몇 주 동안 즐거웠다. 만나기 전까지 이런저런 정보도 공유하며 설렘의 수치가 높아졌다.

 문제는 우리가 가야 할 방탈출 테마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서는 도저히 그 많은 테마를 다 경험할 수가 없다. 우리가 여든 살까지 산다고 해도, 40년이 넘게 한 달에 한 번 방탈출을 했을 때 가고 싶은 테마의 절반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테마가 만들어지고 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너무 늦게 좋아하게 돼서 이제 시간이 없다. 대학 때만 시작했어도 10년이 넘게 시간을 아낄  있었는데. ,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은 어쩔  없지만 적어도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아껴 써야  않을까. 그래서 뒤늦은 출발을 만회하기 위해 우리는 하루하루를 쥐어짜고 있다.

함께하는 네 명 중 나를 포함한 셋은 꽤 자주 만난다. 스스로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트레스의 수치가 방탈 횟수에 비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한 번 만나면 평균 4개 정도를 하는데, 모종의 이유로 그보다 적게 하는 날에는 마음이 허할 정도다.


 늦게 시작한 취미에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있다.  지나가다 조금만 틀린 글자를 봐도 퀴즈 같고, 번호키를 보면 숫자 조합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물건이 놓인 위치부터 누군가 써 놓은 메모까지도 전부 힌트로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탈출 시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거대했다. 정보를 조금 얻으려고 들어간 곳에서는 모르는 용어가 판을 쳤다. 이미 고인물도 차고 넘쳐서 이제 막 방탈출에 입문한 나는 어디 가서 취미가 방탈출이라고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고이다 못한 몇몇은 아예 방탈출 기획자가 되기도 했다.


 한 가지를 몰입해서 좋아하다 보니 새로운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방탈출 테마에도 취향과 트렌드가 있고, 문제 유형도 점점 진화한다. 기획자들은 고객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시장의 질을 점점 발전시킨다. 나도 이런저런 테마를 경험하면서 점점 취향이 확고해지고 있다. 그래서 자꾸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할지 고민하고, 나름대로 스토리를 짜 보기도 한다.


결국 오늘은 내내 참다가 0.25 방탈만큼의 밀크티를 한 잔 마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안을 껴안고 살면 편안해질 줄 알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