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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Oct 25. 2020

알바 장인

냉정한 밥벌이의 세계


누구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 하나쯤은 있다. 나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는 '면접에 붙는 능력'이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 딴에는 상당히 자부심이 있는 능력이다. 꼭 붙고 싶은 알바 자리에는 지원을 하면 늘 붙었고, 그중 열에 아홉은 늘 '인상'에 관한 호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 정도면 표면적으로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인상이라는 혼자만의 확신이 생겼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알바를 시작했다. 처음 느껴본 자유의 공기는 나를 너무나 들뜨게 했고, 그 속엔 자유롭게 돈을 쓰는 기쁨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모님께 받는 용돈은 스무살의 행복을 사기에는 조금 부족한 액수였다. 처음엔 용돈을 조금씩 더 달라고 하려다가 성인이 된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직접 돈을 벌기로 했다.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건 편의점과 카페 알바였다. 가장 구하기 쉽고 공고가 많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편의점에서는 돈 계산을 하기가 걱정됐고 카페에서는 커피를 만들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학원 강사였다. 학원 일은 일하는 시간에 비해 보수가 꽤 좋은 편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나의 씀씀이에 비해 많이 버는 편이었다. 돈을 버는 것도, 쓰는 것도 너무 즐거운 날들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학원 일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동네의 작은 학원에서만 일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과목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나로 인해 아이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과 행동도 절로 조심하게 되었다. 동네 학원의 특성상 몇 년 일하다 보면 아이들이 줄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월급이 밀리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또다른 동네 학원으로 옮겨갔다.


지원하는 과외와 학원마다 나를 불러주니 몇몇 친구들이 학원 알바를 구하는 방법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도 운 좋게 모든 알바 자리에 합격한 것은 아니었다. 매일 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과외와 학원 강사를 구하는 사이트를 뒤지고 다녔고, 하룻밤에 넣는 이력서의 수만 열 통이 넘었다. 하루에 열 통씩 매일 원서를 넣다 보면 어느 순간 한꺼번에 연락이 오는 식이었다.


전공인 국어를 가르치고 싶어도 국어 과외를 받으려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방향을 틀기로 했다. 국어보다는 영어가 확실히 경쟁력이 있었다. 다행히도 스무 살이었던 나는 수능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중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는 가르칠 자신이 있었다. 아이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아직 머리가 굳지 않은 데다가 토익도 공부하고 있던 시기여서 잠을 조금 덜 자더라도 미리 공부해 가면 아이들을 충분히 가르칠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나가는 과외로 신나게 용돈벌이를 했고, 점점 자신감이 붙어서 전공인 국어까지 본격적으로 강의를 하고 싶어졌다.


자신감 하나로 버티던 나는 전공이 국어 교육임을 어필하면서 학원 국어 강사 자리까지 따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다행히 원장님께서 나를 믿어주신 덕분에 일 년이 넘게 한 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했다. 과외와 학원을 병행하려니 체력 소모가 심했고, 일 년이 조금 안 된 시점에 영어 과외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학원 강의에 더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사실상 국어 강의를 일주일에 이틀 이상 한다는 건 의미가 없었고, 내가 선택한 것은 논술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논술 학원을 다닌 경험을 살려 예비 중등부(초등학교 6학년)의 논술 수업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수업이었지만 열심히 수업 자료를 만들었고, 덕분에 통장은 두둑해졌다. 그렇게 시작한 학원 일은 점점 자신있는 과목이 여러개로 늘어나면서 영어, 국어, 논술, 사회를 골고루 가르쳤다. 학원을 옮길 때마다 그곳의 사정에 맞게 두 과목 정도씩 동시에 담당했고, 동네의 작은 학원들만 다녀서인지 전임강사 같은 시간강사로 꽤 오랬동안 일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강의료가 중요하지 않았다. 학원을 옮길 때마다 월급이 오르는 것은 당연히 좋았지만, 그것보다도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좋았고,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학원에서 한 반에 스무 명도 안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하는 것도 이렇게 즐거운데, 학교 선생님이 되면 얼마나 더 좋을까. 아이들의 진로를 같이 고민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강의를 하는 재미에 취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려면 가장 큰 산인 '국가에서 인정하는 시험'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학원에서 강의를 했지만, 그로 인해 '나'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학교 선생님이 될 수 없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들여 '가르치는 방법'과 '학생의 심리'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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