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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Sep 16. 2021

쥐, 그 쎄함에 대하여

냉정한 밥벌이의 세계

헉 하는 느낌에 잠에서 깬다. 알람도 울리기 전인 새벽의 어둠 속에서 나는 에프킬라를 뒤집어 쓴 그리마처럼 버둥거린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자다가 왼쪽 다리에 쥐가 난다. 그런 날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양손으로 이불을 꽉 쥐고 이를 악물며 쥐가 나지 않은 반대쪽 다리에 힘을 주다가 남은 다리마저 쥐가 올라오려는 느낌에 바로 온몸에 힘을 풀어버린다.

쥐가 난 다리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힘겹게 왼손을 뻗어 폰 화면을 톡톡 두드린다. 시간, 시간 봐야 해. '나가라 일터로' 알람은 이미 울린 지 오래. '이거 놓치면 족된다' 알람이 울리기 직전. 고작 10분 사이에 영겁의 시간을 헤매다 알람 소리와 함께 겨우 쥐에서 풀려난다.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고 외출 준비를 한다.     

새벽에 쥐가 난 날은 하루 종일 한쪽 다리에 쥐가 나기 직전인 상태로 살아간다. 종아리에 살짝만 힘을 주면 백 퍼센트 확률로 쥐가 날 것 같은 쎄한 기분. 게다가 이런 날은 중요한 약속도 있다.

요즘 꽤나 애정을 쏟고 있는 모임이 있다. 집에 와서 구글 미트를 켜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창 떠들고 있는데 또다시 예고 없이 다리에 쥐가 났다. 이번엔 오른쪽이다. 살인범에게 붙잡혀 인터뷰를 하며 억지로 엄마 나 살아있어. 걱정하지 마, 를 외치는 인질이 된 기분이다. 경련이 나도록 입가에 힘을 준다. 동시에 두 손은 바닥을 쥐어짠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바닥엔 러그 한 장 깔려 있지 않아서 두 손은 그저 맨바닥을 힘없이 긁어댈 뿐이다.

이번에도 무사히 쥐에서 풀려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처리했다는 안도감에 종아리를 열심히 주무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쥐가 나기 전날 밤, 자기 전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돌이켜본다. 특별히 평소랑 다른 행동을 한 기억은 없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다리가 놀랐나? 그럴 리 없잖아. 놀라려면 온몸이 놀라야지 왜 한쪽 다리만 과민반응을 하냐고.

쥐가 날 때마다 원인을 곱씹어 보지만 늘 그렇듯 명확한 이유는 찾지 못하고 서서히 놀란 기억을 잊어간다. 그렇게 쥐는 한동안 두 다리에 자리 잡고 여차하면 온몸을 잠식할 태세로 나를 위협한다. 그런 상태를 외면하며 아무 문제없는 척 출근을 하고 운동을 한다. 대신 혼자인 시간에 두 손으로 종아리를 꾹꾹 누른다. 사라져, 제발 방 좀 빼. 왜 하필 지금이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그래 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애초에 이유를 알아내는 건 포기했다.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자니 이쪽도 너무 억울해서 한마디 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씩 이렇게 강렬한 경험을 하고 나면 한동안 촉이 날카로워진다. 관계에도 종종 이렇게 쥐가 난다. 그 때마다 절로 주먹이 쥐어지고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거슬리는 이 문제를 억지로 눌러서 진정시킬 도리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그저 상황이 끝나기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열두 번, 스무 번쯤 데이면서 생각한다. 왜 나야, 왜 지금이야.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번보다 경험이 풍부해진 내가 있을 뿐이다. 오전 8시 13분. 메시지를 보내고 5분이 지나도 대답이 없다. 그래 전에도 쥐가 나기 전에 이랬지. 심호흡을 하고 메시지 창을 끈다. 좋아하는 사람의 답장도 이렇게까지 기다려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당신은 알까. 그래도 그간의 경험 덕에 오 분이면 플랜 비를 세우기에 충분하다. 쥐가 나면 한 뼘 성장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우리에게 또 쥐가 나기 전에 살짝 엉겨 붙은 기운을 걷어내고 싶어진다. 빨리 이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란 생각으로 미리 우리의 마지막을 가늠해 보고 상대는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물어본다. 우리는 당연히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는 방식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서로의 노선을 유지하며 누가 먼저 날을 세우는지 예의주시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근육의 긴장을 한번 풀고 나서도 계속 쥐가 날 것 같은 상태로 날을 세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우리가 뒤탈 없이 헤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모임 중에 쥐가 나던 순간을 떠올린다. 잠깐 표정 관리를 못 하다가 주먹을 꽉 쥐고 참으면 서서히 근육이 이완되던 순간을. 몸에 힘을 풀고 조금만 더 버티면 더는 이 관계에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되겠지. 그 쎄한 기분을 견디며 오늘도 아침부터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 몇 시까지 작업물 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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