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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Mar 20. 2021

부지런한 게으름뱅이

게으름 피울 시간이 필요해

한창 야근에 찌들어 있던 어느 날, 출근하던 직원이 나를 보고 어제 회사에서 잤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미쳤다고 회사에서 살겠어? 펄쩍 뛰며 부정했지만, 사실 나도 내가 퇴근을 진짜 했던 건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하도 야근을 하고 출근까지 일찍 하다 보니, 회사 동료들은 종종 나를 npc쯤으로 생각한다. 몇 시에 출근하건 내가 마치 어제 퇴근 전에 본 마지막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으니, 따지고 보면 그들의 의심이 이해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정해진 시간이나 일정에 맞춰 행동하지 않으면 조급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버스도 꼭 타야만 하는 시간이 있고, 회사에도 꼭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만 보는 메모도 꼭 정해진 방식으로 정리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강박증에 가까운 습관이 쌓이면서 나는 마치 npc처럼 회사에 상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 중 가장 고민되는 시간.

매일 아침, 오늘 하루를 좌우할 고민을 시작한다.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할 것인가. 어차피 선택지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고심해서 전날과 겹치지 않는 스타일로 입으려고 한다. 아침의 나에게 제대로 시동을 걸어야 갑자기 야근을 하더라도 버틸 수 있다.

옷을 입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고민과 준비가 꼭 필요하다. 기계로 치면 나는 어떤 일을 하건 로딩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준비가 오래 걸리고 행동이 굼뜬 건 스스로도 너무 답답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나아가려면 이 긴 준비를 남들보다 먼저 끝내야 한다.


이렇게 산 덕분에 주변 사람들은 종종 내가 부지런하다고 오해하곤 한다. 그렇다고 이런 기분 좋은 오해를 딱히 부정할 마음이 없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이렇게 부지런을 떠는 이유는 단 하나. 게으름을 피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출근 준비를 할 때, 아주 가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옷을 빨리 고르는 날이 있다. 이런 날에도 역시나 버스를 타고 싶은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주 잠깐 짬이 난다. 그럴 때면 외출 준비를 끝낸 그대로 앉아 폰을 들여다본다. 그 잠깐의 10분, 15분 사이에 오늘의 날씨, 이미 며칠 전에 본 웃긴 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얼핏 본 것 같은 뉴스를 다시 확인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 잠깐의 게으름으로 나름의 행복을 충전하고 출근한다.


행동은 굼뜨지만, 성격이 급해서 무엇이든 남들보다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다. 약속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출근을 할 때도 남들보다 한 시간쯤 먼저 도착해야 마음이 편하다. 덕분에 아침마다 이르면 5시 반, 늦으면 6시 사이에는 눈을 뜬다. 집을 나서는 시간까지도 정해 놓고 움직이는데, 밥을 먹지 않아도 씻고 옷을 고르다 보면 한 시간이 금방 간다. 내가 원하는 것에 더 천천히 공을 들이고 싶은 욕심이 이런 패턴으로 이어졌다.



시작은 게으르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일이 더 잘 되는 것 같다. 차분히 앉아서 오늘 할 일을 엑셀에 정리하고, 자잘하게 시간을 잡아먹을 일들을 미리 처리하다 보면 금세 8시 반이 된다. 여유롭게 카페까지 다녀오면 9시부터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에 흠뻑 취할 수 있다. 동료들은 항상 나보고 너무 일찍 출근한다며 회사에 그렇게까지 열심히 다닐 필요가 없다고 한소리를 한다. 나는 회사가 좋아서 일찍 오는 게 아닌데. 단지 9시 정각에 헐레벌떡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을 시작하고 싶지 않을 뿐인데. 게다가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사무실에서 여유를 부리는 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나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해하지 못할 이 게으름 피우는 시간의 소중함을 좀 더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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