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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Mar 01. 2021

견디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냉정한 밥벌이의 세계

편집자에 내 이름이 적힌 첫 책을 낸 후 상사에게 퇴사 권유를 받았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일 년도 다니지 않은 회사에서 퇴사하고 싶지 않았다. 불쾌했지만 나를 가르치는 게 힘들었을 상사에게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퇴사하라고까지 말했을까 싶기도 하고. 상사의 심정을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회식 이후로 상사는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티를 냈다. 실수를 하면 전보다 더 크게 화를 냈고, 그럴수록 더 주눅이 든 나는 오히려 안 하던 실수까지 하기도 했다. 직원이 많지 않은 회사였기에 사내에서 상사와 나의 관계가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진로를 틀었으니 물러설 곳도 없었다.


이후로 같은 주제의 책을 한 권 더 맡아서 편집했다. 비슷한 내용의 책을 몇 번 편집하다보니 처음보다는 할만했다. 그런 것도 잠시, 이번에는 책 내용을 검수하며 편집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초보자를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안내서였기에, '진짜 초보자'인 내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내용으로 구성해야 했다. 취지도 이해했고, 방법도 감이 잡혔다. 다만 나는 그 프로그램을 까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 까는 게 뭐가 그리 어렵나 싶겠지만, 정말로 그 프로그램은 설치를 할 때마다 오류가 떴다. 울고 싶었다. 이미 나에게 잔뜩 화가 나 있는 상사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서 끙끙거렸다. 퇴근까지 반납하고 이틀 정도를 프로그램 설치로 씨름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참다참다 상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미간을 잔뜩 찌푸린 상사는 내 자리에 와서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진작 말하지 않은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웬걸. 모든 일에 만능일 것 같았던 상사도 내 컴퓨터에 그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못했다. 계속 오류가 났다. OS를 새로 설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것 봐. 내가 진짜 안 된다고 했잖아.


화가 나면서도 통쾌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며 '퇴사를 종용'했던 그에게 한 방 먹인 기분이었다. 결국 프로그램이 설치되지 않은 이유는 한참을 인터넷을 뒤져서야 알게 되었고,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며 상사의 도움 없이 꾸역꾸역 해결했다. 혼자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무너진 자존감을 조금 회복했다. 그리고 상사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해피엔딩이라면 좋았겠지만, 전혀 아니다. 내려오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하루하루 상사와 나의 관계는 나빠졌다. 서로 하나라도 더 미워할 일이 없나 신경전을 펼치는 기분이었다. 상사는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세 번째로 같은 주제의 책을 편집하게 되었을 때에서야 조금씩 일의 흐름이 보였다. 일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이미 무례한 태도와 악으로 무장한 나는 상사와 최대한 접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화를 할 때도 상사는 내 뒤통수를 보고,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내가 가서 보고를 할 때도 나는 상사의 뒤통수를 보고, 상사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이 회사에서 일 년을 채우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책이 나오자 사장님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셨다. 이제야 감을 좀 잡은 것 같다는 칭찬도 들었다. 내가 전담하는 분야 말고도 몇 권의 책을 더 편집했다.


책을 만드는 건 솔직히 재미있었다. 내용을 편집하는 것만이 아니라 표지를 어떻게 디자인할지, 책 제목은 뭘로 할지 아이디어를 내고, 뒷표지에 들어갈 책소개 문구를 기획하고, 서점 사이트에 게시할 책소개, 상세 이미지, 트레일러 영상을 기획하는 그 모든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마음을 나누는 직원도 몇 명 있어서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일정 부분 해소되기도 했다.

별 기대없이 사장님이 나에게 맡겼던 블로그 관리 업무도 꽤 성과가 있었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책을 소개하고, 종종 이벤트도 했다. 재미를 느끼니 속도가 붙었고, 속도가 붙으니 다양한 글을 기획하고 싶었다. 책 소개를 한 번에 끝내지 않고 다음 내용이 궁금하게 여러 번에 나누어서 시리즈로 올렸다. 소소하게는 감상평을 남기는 독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이벤트도 기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속 상사에게 받는 미움은 나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상사에게 들은 말이 마음에 박혀 정말로 내가 이 일과 맞지 않는 사람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이직을 결심했다. 처음 입사한 출판사에서 일 년도 버티지 못한 내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사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쯤 이직 면접을 봤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있을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고 했던가.


너그러운 신은 나라는 인간에게 ‘퇴사할 용기’를 잔뜩 주셨다. 9개월 동안 차근차근 쌓아올린 스트레스로 결국 나는 사직서에 손을 댔다. 인터넷에서 본 멋있는 퇴사 사유 문구를 따라 쓸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말들로 헤어짐의 이유를 늘어놓는 것은 오히려 나를 구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깔끔하고 가장 보편적인 이유를 달았다.


퇴사 사유: 개인 사정


이곳을 나가는 이유를 굳이 당신에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이렇게까지 결정을 하게 된 나의 마음을 위로 받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단 네 글자로 설명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사장님과의 면담을 거쳤고, 입장차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깔끔하게 회사와 나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래도 작업하는 도서가 있어서 출간까지만 마무리를 하고 나가기로 했다. 나의 퇴사 소식을 들은 사수는 한숨을 쉬었다. 나 대신 업무를 이어 할 직원에게 인수인계도 하고, 조금씩 짐을 빼면서 퇴사를 준비했다. 정리하면서 보니 그래도 1년 동안 편집한 책이 적지 않았고,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운 포트폴리오를 쌓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몇 번 퇴사를 만류하던 사장님도 결국 나를 포기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이미 사의를 밝힌 이상 이 회사에 남는다고 해도 전과 같은 마음으로 일하기는 힘들었다. 회사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회사나 나나 힘들어지는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무의미할 테니. 퇴사까지 시간이 더디게 흐를 줄 알았지만, 퇴사일은 오히려 빨리 다가왔다. 너무 고대하고 있어서였을까. 퇴사하던 날은 심지어 날도 맑았다. 사장님의 배려로 점심에 회식을 하고, 친한 직원 몇 명과 카페에서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퇴사하고 나니 조금 더 많은 책을 내지 못했던 게 후회되기도 했다. 맑은 날씨에 그간 사장님이나 사수에게 쌓여 있던 원망도 다 잊히는 기분이었다. 많이 부족했을 나를 끌고 가느라 그들도 꽤 애를 먹었겠다는 너그러운 생각도 하게 됐다.



안타깝게도 나의 퇴사를 필두로 참고 있던 몇몇 직원들도 사직서를 던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즈음 나를 비롯한 네 사람이 회사를 떠났다. 각자 근무한 햇수도, 퇴사한 이유도 달랐지만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쳐서 괜히 나 하나 때문에 다들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닌가 하는 자의식 과잉에 빠지기도 했다. 아무튼 퇴사한 사람들은 각자의 행복을 찾았고, 회사도 새로운 사람을 뽑아 분위기를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막연히 빌어 보았다.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고 퇴사한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인내심에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에 퇴사하지 않았다면 지금 더 나은 내가 되어 있을 거란 보장도 없다. 학생들처럼 방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들다고 휴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회사를 다니면서 인내심은 배우지 못했지만, 힘들 때는 나를 지키기 위해 퇴사하는 용기를 배웠다. 어딜 가도 100% 완벽한 직장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내가 인내심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직장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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