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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Nov 01. 2020

이 바닥이 원래 그래

냉정한 밥벌이의 세계

이번에는 여름 씨 연봉을 안 올리기로 결정했어.


입사 후 일 년을 코앞에 두고 사장님이 어이없는 말을 꺼냈다. 왜냐고 물어봤지만 뚜렷한 이유도 들을 수 없었다. 회사에 끼친 손해나 나에 대한 평가를 수치로 환산한 걸 보여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거절당했다.


아랫사람의 신분으로 윗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괴롭다. 연봉이 동결된 이유는 상사가 나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제기해서였다. 물론 상사가 못마땅해하는 만큼 나 역시 그에게 불쾌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현명한 대처는 아니지만 이치를 따질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유치하지만 나도 최선을 다해 상사를 미워했다.  '옷깃만 스쳐도 이놈'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상사나 나나 일찍 출근하는 편이어서 아침마다 사무실에 둘만 있으려니 더욱 불편했다. 그래도 나는 아랫사람이었기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상사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나와 상사의 신경전을 다른 직원들까지 알 정도였다. 누구도 우리를 중재하려 하지 않았다. 살얼음판을 걷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벌어졌다.


신간 홍보 문구를 정하는 회의를 하는데 공들여서 쓴 기획안 몇 개를 모두 반려당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기획한 문구가 전부 마음에 들지 않고 신선하지 않다며 다시 써오라는 말을 들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을 짚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당한 비판이었다면 참을 수 있었을까. 마침  상사를 고깝게 느끼고 있었던 나는, 그날따라 상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조차 명확한 대안은 없었다. 같이 의견을 조율하자고 불렀는데 나 혼자만 회의 자료를 준비한 게 유난히 화가 났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의견은 없이 내가 쓴 기획안을 보고 의견을 냈을 뿐이었다. 원래도 좋게 보이지 않았던 그 모습이 그날따라 거슬렸다.


평소 같았으면 군말 없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을 텐데. 그날은 갑자기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사에게 구체적인 예시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쓴 기획안의 어떤 부분이, 어떤 이유에서 부족한지 피드백을 해달라고 했다. 내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 처음이어서 상사는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할 말을 했다. 상사는 한숨을 쉬더니 자기는 따로 생각한 게 없다고 했다. 이미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다가 회의실을 나간 나를, 상사가 다시 불렀다. 면담을 하자고 했다.


그가 나와 이 감정의 타래를 풀 생각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몇 달 간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고 또다시 나에게 퇴사를 권했다. 사장님도 꺼내지 않는 퇴사 권유를 재차 들으니 기분이 나빴다. 그 정도로 내가 일을 못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건가 싶었다. 결국 사장님도 이 문제를 해결하러 나섰다. 사장님은 퇴근 후에 셋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상사는 좋다고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같이 점심을 먹어도 되고 카페를 가도 되는데 굳이 퇴근 후에 술자리까지 가지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상사는 자주 골프도 치고 술도 먹는 사이였는데 내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나 하나를 두고 면박을 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장님과 상사는 카페에 가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곪을 대로 곪은 갈등에서 이미 패자는 정해져 있었다. 박봉이지만 업무 강도가 높지 않은 작은 출판사에서 나름의 장점을 느끼며 오래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이런 갈등 상황에서 연봉으로 페널티를 준다는 건 앞으로 이 회사에서 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마침 준비하던 책도 출간된 직후였고 너무 지쳐있었던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 길로 바로 사직서를 냈다. 한 달 후에 퇴사하겠다고 했더니 남은 연차는 돈으로 환산해줄 수 없고 전부 소진하고 떠나는 것도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무엇보다 사장님은 내가 퇴사하겠다는 말에 크게 당황했다. 연봉을 올려주지 않은 사장님의 의도가 퇴사 권유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직서를 내고 나니 사장님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끝내 나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퇴사를 결정하고 회사에서 친했던 사람들에게 따로 이야기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지만 그냥 그렇게 됐어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퇴사를 결심한 나에게 같은 업계에서 일하던 친구가 한마디 했다.


이 바닥이 원래 그래.


많은 말이 필요할까.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모호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같이 화를 내준다거나, 약자인 내가 참아야 한다는 식의 조언이 아니어서 좋았다. 이 회사가 아니었어도 어딘가에서는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원래 그런 이 바닥에서 나의 가치를 높여서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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