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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Oct 25. 2020

직업으로서의 편집자

냉정한 밥벌이의 세계

책 읽는 걸 좋아해서 편집자가 되었다. 물론 취향을 떠나 처음 취업을 준비하던 당시에는 글을 다루는 직업이 그나마 내가 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흔한 토익 점수조차 만료되어서 정말 맨손으로 취업 시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학원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을 최대한 부풀리고 다듬어서 자소서를 썼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직장에는 모두 지원했다. 제대로 된 회사에 취업하기로 결정한 후에, 여러 번의 면접 끝에 세 개 회사에서 입사 제의를 받았고 두 개 회사에서 2차 면접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마음이 조급했던 나는 그중 가장 빠른 날짜로 입사할 수 있는 회사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2017년 7월 3일 월요일.

처음으로 책 편집자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입사해서 처음 배정받은 일은 청소년용 과학 도서에 나오는 재활용품 로봇을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리는 업무였다. 전임자가 워낙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며 잔뜩 겁을 준 사장님의 말에 나도 그 사람만큼, 아니 그 사람보다 더 일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족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했다. 일단은 결과물이 가장 잘 보이는 '글쓰기'에 자신이 있다고 강력하게 어필했다. 덕분에 나에게는 '신간 도서 홍보'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전임자가 퇴사 직전에 출간한 신간의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로 했다. 마침 관심 있고, 배운 적도 있던 주제의 인문학 도서였다. 처음에는 블로그에 글을 써 본 적이 없어서 감이 잡히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집에 가서 책에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고, 어떤 내용을 소개할지 이렇게저렇게 구상해 보았다. 다른 출판사의 블로그도 찾아보며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책을 소개할 방법이 있는지 고심했다. 고민 끝에 힘들게 써 간 홍보글을 보고, 사장님은 한마디 했다.


"너, 글은 잘 못 쓰는구나."


그 한 마디가 나의 자존심을 할퀴고 지나갔다. 글을 잘 썼으면 뭐라도 써서 작가를 했겠지만, 그래도 무심한 듯 던진 사장님의 말은 국어 전공자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한방에 휴짓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뭔가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회사 블로그에 책 소개를 꾸준히 올리면서 구독자가 늘기 시작했고, 꾸준히 쓰다 보니 포털 사이트 메인에도 내가 쓴 글이 올라왔다. 비록 개인적인 생각을 쓴 글은 아니었지만, 회사 이름을 걸고 쓴 글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댓글을 달아주니 기분은 좋았다. 조금씩 속도가 붙으면서 일주일에도 여러 개의 글을 올릴 수 있었고, 사장님도 내가 쓴 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꽤 하네?"


대단한 칭찬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별거 아닌 그 말에 자꾸 욕심이 났다. 내가 편집한 책의 책소개도 더 독자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게 잘 쓰고 싶었고, 원고를 편집할 때도 자꾸 문장을 더 잘 다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물론 욕심은 당장 실력에 반영되지도, 당장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지도 않았다. 이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편집자가 되기 전에는 몰랐다. 책을 만드는 데 이렇게 많은 공수가 들어가는 줄은. 저자의 역할이 콘텐츠를 쓰고, 내용을 채워넣는 일이라면, 편집자의 역할은 내용을 더 재미있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구성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어떤 내용을 뽑아서 책을 소개할지 방향을 잡는 일이다. 저자만큼이나 편집자도 글을 보는 눈과 글을 잘 쓸 수 있는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직업이다. 무엇보다 편집자는 편집하는 책의 내용을 저자만큼이나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가장 좌절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순수하게 '국어'만 할 줄 알았던 내가 IT 도서 편집자로 지원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책을 만드는 일은 단순이 맞춤법을 잘 안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내용에 맞는 표현과 문장 구성 방식이 책마다 다르며, 내가 배운 맞춤법은 책을 만드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맞춤법조차도 나보다 더 정확한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내가 담당한 도서는 IT 실용서였고, 초보자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구성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기능키의 표현 역시 IT 실용서에서 쓰는 방식이 따로 있었고, 나는 마치 태어나 처음 걷는 어린아이처럼 정말 책 편집에 관해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배워야 하는 상태였다.


IT 도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기능 키의 표현 방법조차 몰랐기에 상사는 답답해하며 하나하나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나 역시 나름대로 배운 내용은 최대한 정리하고 야근까지 불사하며 책을 만들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다섯 번쯤 교정했다. 모르는 내용은 전부 메모해서 상사에게, 저자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았고 다행히도 모두 물심양면으로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려고 했다. 원고를 세 번째로 교정하려던 무렵, 상사는 내가 편집한 원고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발견했다.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고, 변명의 여지도 없이 너무나 큰 실수였다. 사람의 일이니 다시 하라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힘들게 나를 가르친 상사가 느꼈을 허무함과 그런 상사를 보며 드는 송구한 마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첫 책을 만들 때는 정말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내가 무엇을 알고 편집하고 있는 건지도 확신이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이 멈춰버린 듯한 기분에 그저 상사가 시키는 대로 로봇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뿌듯하기도 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책이 출간되던 날, 상사와 술을 마셨다. 회사 사람들이 전부 회식에 동원되었고 내 옆에 앉은 상사는 술을 조금 마시고 나에게 진심 어린 한마디를 했다.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은데, 다른 길을 찾아보는 건 어때?"


그때의 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잘못 들었나 싶었다. 책도 무사히 출간됐는데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퇴사하라는 뜻인가? 첫 직장생활에 3개월밖에 안 된 나는 이대로 회사에서 잘리는 건가 싶어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같이 있던 사람들도 전부 당황해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누군가 상사에게 술이 취했다며 말리기도 했고, 실컷 마셨으니 이제 자리를 정리하자며 다들 부산스러워졌다. 상사가 내뱉은 말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 버티고 앉아 있다가, 술이 깨면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회식 자리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마음이 복잡했고, 그 날을 기점으로 나와 상사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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