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친절한 콜센터, 악마의 유혹
이전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앞에 이야기한 전화기에 매달려 어린아이처럼 보채던 직원의 모습은 사실 ‘악마의 유혹’에 빠진 결과물이다.
2000년대 초반, 몰아치는 합병과 구조조정의 폭풍 속에서 은행이 내민 '친절한 콜센터'라는 손길은 당시 직원들에게는 구원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들의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는 달콤한 독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IMF 구제금융으로 대표되는 경제위기의 여파로 많은 은행들이 통폐합 되었다.
경쟁력 확보를 위해 우량하다는 은행은 몸집을 더 불리려 했고, 부실한 은행은 자의 반 타의 반 어떻게든 살길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 과정에 정부의 강력한 의지까지 겹쳐지면서 엄청난 은행권 재편이 있었다.
국민은행, 주택은행이 KB국민은행으로, 조흥은행과 신한은행은 통합 신한은행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외환은행은 론스타의 손을 거쳤다가 하나은행으로 통합되었다. 거기에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한빛은행을 거쳐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은행이 통합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제조업의 통합이라면 기존 생산품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고, 일부 생산라인의 조정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순전히 합병관련 회사 내부에서 알아서 자연스럽게 조정되어 질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은행의 합병은 그와 여러 가지로 조금은 같은 듯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
그 당시만 해도 은행은 영업점이라는 물리적 장소를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객은 본인이 주거래로 거래하는 영업점이 있었다.
그런데 두 거대은행이 합병을 하게 되면서 인근의 영업점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같은 건물에 합병되는 두 은행의 영업점이 모두 있는 경우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점포의 통폐합이나 이전이 매우 급하게 일어 나게 되었다. 직원들의 고용도 유지되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최적의 영업점 운영과 함께 인력의 통합 운영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전산 통합이었다.
은행마다 각각의 고유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산 시스템의 구조 및 구성도 달랐고, 직원입장에서 조작하는 방법도 달라 시스템을 어떻게 통합해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드느냐는 생산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통합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협상 파트너 후보군을 정할 때도 상대방 은행의 전산시스템이 우리 쪽 은행의 시스템과 얼마나 비슷한지도 합병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검토 요건 중 하나였다.
즉, 윈도우 기반 PC를 쓰는 사람에게 작동법이 조금 다른 애플 맥(Mac)컴퓨터를 주고 일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혼란 상황을 막아 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은행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고객과 거래를 해서 금융상품을 판매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은행 전산시스템에 관련 내용을 입력하는 조작을 해서 전산 데이터베이스에 관련 거래 데이터를 등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빙으로 통장이나 약정서를 전산으로 인자(印字)해 교부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A은행과 B은행이 합병을 했는데, 전산 시스템이 B은행 것으로 확정된다면 A은행 직원 입장에서는 ‘맨인블랙’ 영화에서 뉴럴라이저라는 기계를 쳐다보면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기억이 리셋되는 것과 같이, 갑자기 업무를 모르게 되어 신입직원으로 강등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게된다.
이것은 합병 후 직원간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통합이후에는 모든 통합 은행은 급하게 전산시스템 재개발과 정비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발빠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산시스템을 익히는 것은 합병한 두 은행 직원 모두에게 큰 부담이었다.
합병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 점포 통합에 따라 두 은행의 직원이 섞여서 같이 근무하게 되었고, 거기에 전산시스템까지 바뀌게된 상황을 상상해 보시라.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중복된 위치에 두개의 지점이 있다가, 그중 하나의 지점이 다른 곳으로 이전된 지점은 통합 이전에 2개 영업점에서 처리하던 고객의 수를 이제는 한개의 영업점에서 응대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대 혼란이었다.
직원도 직원인데, 고객의 불편함과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전산조작 조차 서툴러지게된 직원들의 업무처리는 늦었고, 고객들의 대기시간은 늘어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합병 후 조직이 조금씩 조직 안정화가 되어 간다고 생각한 은행들은 이제 인력 구조조정을 슬슬 검토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합병 전에는 합병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몸집불리기를 통해 마구 늘렸던 인력을 조금씩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야기된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쳐지면서 은행은 희망퇴직을 정례화 하게 되었고 인력조정을 더욱 확대하게 되었다.
이때, 영업점은 아수라 장이 되었다.
특히 인구밀도가 높고 오래된 구도심쪽의 영업점은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고객이나 직원 모두가 아우성을 질렀다.
이렇듯 합병에 따른 혼란을 이유로 불만을 가진 고객의 대량 이탈이 걱정되었던 은행은 특단의 조치를 단행한다.
바로, 직원 업무를 상담하는 전담 콜센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통합된 은행의 업무방식의 혼란에 대해 직원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특히 전산방식이 달라진 것에 대해 안내를 해주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각 은행마다 그 이전에도 전산업무를 안내하던 인력들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콜센터의 형태 까지는 아니고 전산 조작에 미숙한 직원에 대한 최소한의 지원과 같은 것이었다.
직원 전용 콜센터가 생긴 초기, 말그대로 대 히트였다.
여러가지 혼란스러운 시기인데다가 금융상품이 매우 다양해지고 각종 제도도 복잡해 지던 시기인지라, 직원들은 직원용 콜센터에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또, 그 당시는 나의 일도 바쁘다 보니 새로 들어온 신입직원들이나 업무가 미숙한 후배들을 가르치고 돌보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직원용 콜센터는 은행과 직원의 니즈에 딱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은행은 직원용 콜센터의 규모를 점점 더 키워갔고, 단순한 전산 업무 안내를 넘어 각종 은행 규정이나 제도에 대한 안내까지 그 범위를 점점 더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직원들의 콜센터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더 커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중요한 또다른 변화가 두가지 더 있었다.
이러한 영업점 업무의 혼란을 덜어주기 위한 또다른 움직임이 있었는데, 바로 영업점 업무의 후선집중과 영업점의 원스탑 뱅킹이었다.
영업점에서 처리하기에 업무지식이 많이 필요한 일, 특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과 시간만 많이 들고 생산성은 떨어지는 일들을 별도의 후선 업무 센터를 만들어 그 곳에서 전담하게 하면서 영업점의 업무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취지였다.
이렇게 후선 업무 집중화가 이루어 지면서 영업점 직원은 오로지 상품 판매나 고객 관계 관리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당시 은행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또 이렇게 업무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상황이 되다 보니, 영업점에서 각 업무 별로 별도의 창구를 두어서 운영하던 것을 하나의 창구에서 대출업무와 예금상담업무를 동시에 하고 외환 업무까지도 같이 수행하는 종합상담창구를 만들어 고객이 업무 별로 다른 창구를 찾아갈 것 없이 한 창구에서 원하는 다른 업무를 다 할 수 있는 원스탑뱅킹을 일반화 시키게 되었다.
은행입장에서는 영업점 직원들이 느끼기에 어렵고 귀찮은 업무는 다 후선 부서에 몰아 놓고, 원스탑뱅킹을 하면서 필요한 다양한 업무지식과 전산조작은 직원전용 콜센터를 통해 직원들을 지원하면서 영업점은 오롯이 영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에 달면 언제가는 몸에는 해로워진다는 그 진리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