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은행에 대한 짧은 역사(1)

① 조상제한서와 스티븐 호킹

by 고정금리

Episode 04. 은행에 대한 짧은 역사

① 조상제한서와 스티븐 호킹


내가 처음 일하게 된 은행은 입행 당시 후발은행이라고 불리우는 곳이었다.

그 당시 은행은 시중은행과 후발은행이라고 불리우는 신생은행들이 있었다.

‘조상제한서’라는 말로 시중은행을 부르고 있었고, 이는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을 앞글자만 따서 부르는 명칭이었다.

‘조상제한서’보다 한참 뒤에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주로 80년대 초반부터 만들어진 은행을 후발은행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시중은행이라고 부르는 곳은 왠지 모르게 근엄하고 묵직한 느낌인 반면 후발은행이라는 곳은 뭔가 새롭고, 깔끔하면서 트랜디한 느낌을 주는 은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의 차별화 포인트가 있지 않으면 어찌 오랜 시간 거래해온 시중은행의 고객을 빼앗아 올 수 있겠는가?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아니면 부자인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성인이 되어 어찌어찌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은행의 고객이 된다.

사업을 하거나 급여 생활자 이거나 모두 은행을 거래한다. 사업을 경영하는데 있어서는 자금의 입지(入支)를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중의 하나이고, 급여를 받은 사람은 은행 계좌로 입금을 받아 온갖 공제할 것들과 지불할 것들을 은행에서 자동으로 지출되게 처리하는 것을 은행을 통해서 하게된다.

즉, 시중은행이 이미 활발히 영업중인 상황에서 뒤 늦게 생겨난 후발은행은 놀라운 마케팅 능력으로 세상에 없던 신규 고객의 니즈(needs)를 만들어 내어 기존에 없던 고객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다른 은행의 고객을 빼앗아 와야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후발은행 초기 그리고 이후 상당한 성장의 시기 까지 후발은행 직원들은 야근이라는 것을 거의 일상 생활처럼 해왔다.

지금이야 다른 은행 대비 차별적 경쟁력을 IT 솔루션이나 거래 앱, 웹페이지의 편의성, 고객경험 등 조금 다른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다른 은행보다 우위에 있는 차별적 경쟁력을 상당부분 인력의 땀과 노력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결국 더 편리하게, 더 믿음가게 하기 위해 몸으로 때우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세상을 호령할 것 같았던 (적어도 입행 당시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시중은행 조.상.제.한.서 5군데 중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 물론 제일은행은 영국계 은행인 스탠다드 차타드 (Standard Chartered)에 인수되었어도 여전히 SC제일은행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 예전의 제일은행과는 완전 다른 은행이다.

물론 기존 시중은행이 야근을 안해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속에는 당시 경제 상황, 정부의 정책, 한국의 특수성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을 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 요인들이 존재해 그런 이유들 때문에 그 은행들의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맞을 듯 싶다.


언젠가 전형적인 문과생인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물리학에 관심이 생긴적이 있었다.

그때 읽은 책 중에 스티븐호킹 박사가 쓴 ‘시간에 대한 짧은 역사’(A Brief Histroy of Time)라는 명저가 있다.

원래 학교 다닐 때는 온갖 외워야 할 것이 많다는 이유로 역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을 읽은 후로는 역사라는 것을 어떤 진리를 찾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현재 나타나는 현상의 정확한 원인이고 지금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중요한 시작점과 같은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은 물리학 책으로 역사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는 않는다)


현재의 내가 지금과 같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로 인식되는 데에는 나의 여러가지 개인적 경험, 고민, 학습 등등 개인적 역사가 녹아서 어떤 형태의 정체성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산업의 관행이나 특징적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산업이 성장하고 발전한 역사가 아닐 듯 싶다.


한국에서의 은행이 어떤 모습과 어떤 사연을 가지고 발전하여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지금의 은행 조직과 행태를 이해하고 밝혀 내는데 아무래도 여러모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번 장을 만들었다. 현재의 은행의 모습만 보기에도 귀찮은데, 과거까지 보자고? 하지만 걱정마시라 나 역시 역사학자나 경제사, 금융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다보니 그리 학문적 접근으로 은행을 얘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저 ‘아 이래서 지금 은행이 이렇구나.’라는 정도로 지금의 은행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간략한(brief) 정리정도만 하려고 하니 배경 지식 정도로 쉽게 봐 주시길 바란다.


복잡한 수식이 없이 물리학의 세계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던 스티븐 호킹 박사의 ‘시간에 대한 짧은 역사’처럼 내가 쓰는 은에 대한 짧은 역사가 지금의 은행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 편에서 본격적인 우리나라 은행의 역사를 전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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