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이전 글 ① 조상제한서와 스티븐 호킹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지금 우리의 하루 일생에서 은행이 이라는 곳이 없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돈이 필요한 사람은 여기저기 여유돈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고, 여유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필요한 사람을 여기저기 수소문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니즈가 있는 두사람이 설령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또 이자는 얼마를 주어야 하는 지 등등 돈을 빌리고 빌려주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계(契)라는 것이 있었다.
그 유래가 삼한시대(三韓時代)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전통이 오래되었지만 최대의 경제 빌런(villain)인 항상 밤중에 야반도주를 주로 하는 그 계주(契主)의 이야기를 한번쯤을 들어 봤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제도권 금융보다는 사금융이 훨씬 더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다.
나라의 발전 정도(금융과 사회기반시설 등 모든 면에서)와 사람들의 의식 수준 등에 따라 은행의 이용정도는 매우 나르게 나타난다.
2025년도 세계은행이 발표한 글로벌 핀덱스 데이데베이스(Global Findex Database 2025)에 따른면 2011도에 51%였던 전세계 사람들 중 은행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비율이 2024년도에는 79%로 13년만에 약 50%가 넘는 어마어마한 증가를 보였다.
아마도 인터넷 보급과 모바일통신 네트워크의 발전에 따라 물리적 거리가 은행 접근의 장애가 더이상 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당연히 계좌 보유가 쉬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니제르(Niger)와 같은 나라의 계좌 보유 비율은 10%대에 머물고 있다.
이는 같은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케냐의 90%에 비하면 매우 큰 격차라 할 수 있다.
즉 같은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 일지라도 이처럼 정부의 태도와 사람들의 인식 수준과 관행에 따라 은행에 대한 거래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서양의 세력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거부감이 컸고, 유교 문화가 뿌리깊게 잡혀 상인이나 돈과 관련된 비즈니스를 우대하지 않았던 우리 나라에서는 과연 언제 은행이 만들어졌을까?
이에 대한 다양한 얘기와 주장이 있다 보니, 나는 금융감독원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연대표를 중심으로 얘기해 보고자 한다.
공인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업한 근대적 은행은 안타깝게도 일본의 다이이치은행(제일은행)의 부산지점이다. 왜 안타깝다는 말을 했냐하면, 우리의 아픈 역사인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 침탈의 시작점에 바로 그 은행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적 교류가 많아지고 그 것들을 지원하기 위해 금융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이후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에 대한 장악력이 점점 더 커졌을 것이고, 바로 그 즈음인 1896년에 몇몇의 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근대적 민간은행인 ‘조선은행’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관료들 중 상당수는 흔히 말하는 친일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이완용(李完用)과 김종한(金宗漢)이 ‘조선은행’의 발기인에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그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의 은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조선은행’은 그 후 5년간 운영되다가 1901년에 폐점하게 된다.
그 후 1897년 2월 ‘한성은행’이 출범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간섭과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을 당시 민간에서 다시 은행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은행’의 발기인에 들어가 있던 김종한(金宗漢)이 이번에도 한성은행 출범에 주축멤버로 들어가게 된다.
아마도 그 당시 은행을 만들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은행 경영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 중에 상당 수는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우호적이지 않고서는 은행을 만드는 것을 주도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싶다.
어쨌든 ‘한성은행’의 출범 이후 국내에는 여러 은행들이 여러 목적에 의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2년 뒤인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 생겼다. ‘한성은행’은 최근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조흥은행’의 전신이었고 이후 ‘조흥은행’은 현재 ‘신한은행’과 합병을 통해 ‘신한은행' 상호로 영업을 하고 있다.
‘대한천일은행’은 ‘상업은행’의 전신이었고 ‘상업은행’은 이후 ‘한일은행’과 통합하여 현재는 ‘우리은행’이라는 상호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초의 국내 은행을 얘기할 때 나오는 재밌는 논쟁이 하나 있다.
최고(最古)은행을 놓고 벌인 ‘조흥은행’과 ‘우리은행’간의 설전이다.
시기적으로는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이 2년더 먼저 설립 되었지만, ‘우리은행’은 민족은행이라는 개념을 내 놓으면서 일본의 자금이 들어가 운영된 ‘한성은행’과는 달리 ‘대한천일은행’이 과거 조선황실의 자금을 바탕으로 명맥을 이어왔다는 논리로 실질적 최초의 민족은행은 현재의 ‘우리은행’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심지어 당시 황영기 은행장까지 이런 논리를 공식 석상에서 발표할 정도였다.
아마도 당시 은행장이 되고 뒤숭숭한 조직을 장악하고 직원들을 하나로 단결 시킬 모티브로 최고(最古) 민족은행을 내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미 기네스북에서는 ‘한성은행’이 한국의 최초 은행이라고 인정했으며, 금융감독원 또한 이를 공인한 상태이다.
을사늑약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과연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반대해 독자적인 경제적 독립을 위해 운영된 은행이 있을 수 가 있었을까?
‘한성은행’의 경우는 1905년 금융공황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일본 ‘다이이치은행’으로 부터 자금 수혈을 받아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일본자금의 은행 또는 친일 기득권 세력의 은행과 별반 다르지 않게 운영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10년 국권상실 이후에 친일파의 자금이 상당 부분 들어오면서 은행에 대한 비난이 커졌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은행장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 이윤용(李允用)이었고 조카가 전무를 맏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대규모 자금 인출 사태가 있었고 결국 추가적인 일본의 자금이 더 들어가게 되면서 이후에는 아예 은행장을 일본 사람들이 맡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은행’의 ‘민족은행’ 개념이 맞는 얘기인가? 얼핏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은행’이 주장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황실자금이 ‘우리은행’의 자본금이라고 하는데, 결국 황실의 사금고와 같이 사용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는 자금이 부족하다 보니 ‘대한천일은행’도 일본세력이 들어와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름도 ‘대한’을 떼어 내고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꾸게 되었다.
나중에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우리나라 은행 경영에는 일본적 잔재와 영향이 아주 많다.
비단 은행만의 문제는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거친 다양한 형태의 산업에서 비슷한 영향이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고, 특히 서비스 업의 경우 어딘가 일본적인 응대(?) 같은 것이 받아들여 지는 부분들이 많이 느껴지게 된다.
일본의 은행원 출신 소설가 이케이도 준(池井戸潤)이 쓴 ‘한자와 나오키’라는 소설을 보면 그 이야기 속의 일본은행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현재 은행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아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그 중 하나를 얘기 나온 김에 말하지면, 은행에서 사용하는 용어에도 그런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용어, 특히 일본에서 기술이 들어온 의류 산업 같은 곳에서 쓰는 용어들에 특히 일본어의 잔재가 많은데, 아시다 시피 실제 일본어와도 사실 거리가 있는 약간 이상한 형태의 용어들이 있다.
은행 용어 중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방’이라는 표현이다.
도장을 칭하는 용어로 ‘방’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출납방과 대체방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예전 은행 업무에서 전표에 여러 표시를 해서 자금 처리의 성격을 표시할 목적으로 도장을 찍어 표시를 했는데 그때 현금이 수반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을 대체라하고 그 표시를 위해 전표에 찍는 도장을 대체방이라고 했다.
출납방은 아시다 시피 고객으로 부터 돈을 받았다는 증빙으로 찍어주는 도장을 말한다.
이 ‘방’이라는 표현은 일본말 ‘판(板)’의 일본발음인 ‘방’이 넓게 쓰인 것이 아닌가 싶다.
참고로 요즘은 이 말도 확대되어 대체방은 은행원들 끼리의 결혼을, 출납방은 고객과의 결혼을 교환방은 타행 은행원들끼리의 결혼은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