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장사치'만 알고 있는 보리차의 치명적 황금비율
(앞의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이런 자동 정수기가 없던 시기였다.
또 많은 식당에서 보리차를 끓여서 주곤 하던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그 식당에는 커다란 보냉 스테인리스 물통이 있었는데, 여름철 시원한 물을 손님들께 드리기 위해 통 안에는 큰 얼음 덩어리를 넣어서 진한 보리차물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10시에 내가 출근하면 사장님은 나보다 한참 먼저 식당에 오셔서 나와 다른 식당 직원들이 시원한 맛난 보리차를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다.
고마운 부지런한 사장님!
도대체 얼마나 일찍 나오셨길래 보리차를 끓여서 식혀서 얼음을 넣어서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날은 왠지 눈이 일찍 떠져서 새벽에 뒤척뒤척하다가, 집에서부터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서 한동안 피곤하다는 핑계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책 읽기를 하고자 집을 나섰다.
사장님의 배움에 대한 스스로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배려심에 식당 입구 앞 건너편에 있는 간이 공원처럼 꾸며놓은 곳으로 가서, 식당 안이 멀찍이 들여다 보이는 조그만 야외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우렁각시처럼 다른 직원이 없는 동안 많은 일을 하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 비해 9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는데도 식당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사장님이 뒷문으로 출근을 하셨는지 식당에 불이 들어왔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던 나는 아직 닫힌 출입문 옆 통창을 통해 곧 분주히 가게 안을 왔다 갔다 하시는 사장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것이.
좀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장님이 주방에서 기다란 고무호스를 가져와서 식당 출입문 바로 앞 카운터 옆에 있던 스테인리스 보냉통의 뚜껑을 열고 그 호스를 보냉통 속을 깊숙하게 밀어 넣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 커다란 통 안에 한동안 호스를 통해 물이 받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 물이 다 받아졌는지 이번에는 사장님이 정체불명의 무엇인가를 숟가락 같은 걸로 통 안으로 뿌리듯이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와 쏟아붓고는 뚜껑을 닫았다.
그 후에도 사장님은 혼자 분주히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계셨고, 난 먼발치에서 벌어진 일에 제대로 된 영문을 모른 채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10시가 되었고 난 최대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식당으로 출근을 했다. 다만 다른 때와 다르게 그날은 물통 주변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 주변까지 레이더를 작동해 스캔하듯 둘러보면서 통 안에 넣었을 것으로 의심될만한 후보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보고 말았다.
‘맥심’이라고 쓰여있던 커다란 통을 보고 만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하자마자 마신 보리차에서는 왠지 모른 커피원두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배우 안성기 씨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
놀란 나는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그 구석 쪽 벽면에 설거지와 식재료를 세척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하는 수도꼭지가 있었는데, 그 꼭지에는 고무호스가 끼워져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물건을 찾는 척 주방 선반 서랍 여기저기를 찾아보았다.
그러다 슬프게도 둘둘 말려져 있는 검정색 고무호스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손님들이 사장님의 정성이 담긴 맛있는 보리차라며 마시던 그 물의 정체는 농도가 매우 낮아 커피라고는 생각 못하고 당연히 보리차일 거라 생각했던 수돗물이라는 것인가?
세상에나 그 물을 마시면서 나는 사장님의 정성을 느끼곤 했는데, 이런 황당한 상황이 있나.
그날 이후로 난 그 물을 마시지 않았다.
마시지 않았다기보다는 못 마실 것 같아서 손이 가질 않았다.
나는 순간 식당의 다른 사람들이 생각났다. 주방장님과 그 부인인 보조 주방장님, 그리고 사장님의 친척이라던 홀 서빙 누나. 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보조 주방장인 아주머니께 슬쩍 얘기를 꺼냈다.
그 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묻는 나의 말에 그 아주머니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수돗물 먹는다고 문제 되느냐는 대답을 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결국에는 사장님에게도 얘기를 꺼냈다.
“저 사장님, 이 물이 진짜 보리차는 아닌 거죠?”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그걸 언제 끓여서 식혀서 보리차를 만드니? 커피가루만 잘 넣으면 맛이 똑같아. 내가 "황금비율"을 알거든.”
사장님은 그 물을 만드는 비법이 큰 영업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순간 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멍하니 있었다.
아무리 먹을 수 있는 물이고 큰 탈이 없다고 해도, 보냉통 앞에 붙어있는, 손으로 나름 정성스럽게 써서 테이프로 붙여 놓은 ‘보리차’라는 단어와는 전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식당의 막내는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의의 사도처럼 ‘이건 거짓말이잖아요!’라고 말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장님도 주방장님도 원래 음식장사라는 것이 다 그렇다는 듯한 태도였고, 인생의 대부분을 식당에서 음식장사를 하신 분들이 그렇다면 사실 적어도 그 세계에서는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 세상물정 모르는 내가 지역 요식업계의 큰 어른이 하시는 말씀에 감히 어떻게 반대의 얘기를 하겠어, 그리고 사실 몸에는 보리차보다 좋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나름 얼음으로 시원하게 만들어 더위를 식혀주는 ‘먹을 수 있는’ 물인데 뭐가 그리 큰 잘못된 것이겠는가?
마음 한편에는 절실한 아르바이트의 생명연장을 위해 또 다른 한켠에는 혼자 관종이 되고 싶지 않은 생존 전략으로 그냥 덮고 지내기로 했다.
나만 안 먹으면 되지 뭐.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나에게 더 큰 충격이 다가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조금 이른 아침이었는데 다소 앳되어 보이는 애기 엄마가 애기를 안고 식당으로 들어와 메밀국수를 주문했다.
날이 더워서였는지 애기 엄마는 사장님이 따라 준 보리차(사실은 연한 커피물)를 벌컥 마시더니, 주섬주섬 애기 기저귀 가방에서 빈 젖병을 꺼내고는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보냉통을 가리키며, 사장님께 말했다.
“저, 이물 잘 끓인 물 맞죠?”
‘아, 제발… 제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사장님은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요, 제가 아침 일찍 와서 매일매일 하루에 마실 만큼 좋은 볶은 보리로 차를 끓여 놓습니다. 시원하게 드세요”
애기 엄마도 안심이 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보냉통 레버를 당겨서 젖병에 물을 담고 젖꼭지 뚜껑으로 닫은 다음 아기에게 젖병을 건넸다.
아이도 목이 말랐는지 바로 삑삑 소리가 날 정도로 힘차게 빨아서 보리차를, 아니 커피가 녹아있는 끓이지 않은 수돗물을 마셨다.
난 그때 배달 나갈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주방 옆쪽에 서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바로 달려 나와 재빨리 애기 엄마에게서 젖병을 뺏고 싶었지만, 내 다리는 그 자리에 그냥 얼어붙어 있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아 아이를 한번 쳐다보고 바로 카운터 안쪽 키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장님을 바라봤다.
사장님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치 본인이 한 말을 기억을 못 하는 것처럼, 아니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걸려온 배달주문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