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은 잡채와 더불어 준비하기 귀찮은 한식의 대명사다. 구절판을 고스란히 말아 넣은 것 같기도, 작은 비빔밥이 연상되기도 하는 녀석을 먹는 날은 정해져 있었다. 운동회나 소풍처럼 모두가 김밥을 먹는 날이다.
어렸을 적엔 새벽부터 김밥을 준비하는 어머니 옆에 붙어 노닥거렸다. 시금치를 데치고, 계란으로 노란 지단을 만들고, 짭쪼롭한 우엉과 노란 단무지. 맞다! 그 기다란 김밥햄. 마지막으로 채 썰어서 볶은 당근을 준비한다.뜨거운 기운을 빼낸 밥을 김에 바르고 속을 넣어서 둘둘 말면 된다.
한 줄 두 줄 세 줄. 말려진 김밥이 쌓여가는 동안 내 마음도 급해진다. 이십여 줄의 김밥이 말린 뒤에야 하나씩 썰기 시작한다. 도시락 통에 이쁘게 들어가고 남은 기다란 김밥 꼬다리가 접시에 남는다. 잘 먹겠습니다. 꼬다리가 만들어지기 무섭게 입으로 들어간다. 생일날 보다 더 행복한 날이었다. 꼬다리를 거의 다 먹고도 김밥을 몇 통이나 가져갔다. 매일매일 키가 크던 시절. 남자아이들은 네 끼를 먹어도 늘 배가 고팠다.
김밥이요? 제일 쉬워요.매일 만드는 데요.
꼬맹이 둘을 키우는 동료가 그랬다. 아이들이 잘 먹는 것이라 매일 싼다고. 회사에도 아침으로 싸와 나눠준 적이 있었는 데 웬만한 김밥집보다 맛이 있었다. 우리 회시 그만두고 건물 앞에 김밥집 차려요. 그때부터 일이 힘든 날이면 때려치우고 Y김밥집을 차리자고 노닥거렸다. 김밥처럼 쉬운 음식이 별로 없다는 그녀의 말. 그림 그리는 밥 아저씨의 참 쉽죠처럼 들렸다. 김밥은 사 먹자는 결론이 손쉽게 도출되는 음식이었다.
대구 와서 알게 돼 가끔 시켜 먹는 가게가 있다. 뚜껑을 열면 행복해지는 그 집 김밥에는 노랗고 보드라운 지단이 한 움큼 들어있다. 씹을 때마다 달달함이 퍼져 나오는 우엉과 마약 김밥의 핵심 볶은 당근에선 미묘한 감칠맛이 배어 나온다. 게다가 밥은 딱 입안을 헹궈줄 만큼만 들어가 있어서 질리지 않고 끝까지 먹을 수 있다.
하늘이 파아란 평일날. 김밥을 싸서 기차여행을 가고 싶다. 창 너머로 지나가는 들판. 거기서 난 것들로 푸짐하게 채워진 김밥을 조물 거리며 흘러가는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일. 탄산이 가득한 시원한 사이다도 꼭 마셔야지. 숨소리도 줄이는 깜깜한 밤에 책상에서 방황하다 꿈을 꾼다. 내일은 오랜만에 김밥을 시켜 먹어야겠다.